#461
그가 떠올린 건 서방유량과 페레그린의 증권 합작사 설립이다.
이 일로 시끄러울 때마다 비자금 은닉설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이 비자금의 원주인이 최문경 부회장이란 설이 찌라시로 돌기도 했다.
물론 이 비자금의 출처 중 일부가 바로 KM 전자에서 빼돌린 돈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연루된 사람이 바로 최훈열 전무이기도 했다.
최민혁도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건 몰랐다. 그는 1회 차 인생에서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추론할 뿐이다.
당시 이 일과 관련해서 외부에 밝혀진 사실은 없었기 때문이다.
‘샐로먼이 뒤를 봐준다면, 가능한 스토리지. 증권 합작사 설립을 통해서 얻은 비자금을 샐로먼을 통해서 빼돌려서 미국 자회사 설립에 보탤 수도 있으니까.’
그는 고민 끝에 금고에서 최훈열 전무 사건 때 쟁여둔 비자금 장부를 꺼내서 세세하게 살폈다.
그 내역 중에는 당시 힘이 없어서 그냥 덮어둔 부분도 있었다.
대표적인 자료가 바로 박석기 사장 자료였다.
최민혁이 굳이 이 자료를 덮어버린 것은 최용욱 회장과도 일부 관련이 있다.
최용욱 회장은 괜히 그룹 내의 비자금 관련 정보가 나도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금은 상관이 없지. 우리 부회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자신과 관련된 증거를 없앴을 테니까.’
아마 그때 이 정보를 흘렸다면 박두영 부장검사도 외압 때문에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상황이 너무 커져서 외부 외압이 심해지면 최훈열 전무의 부패를 정리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정치권 어장 관리는 잘하시니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지. 거기에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새로 취임했으니까. 잘만하면 괜찮은 그림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어.’
* * *
최근 중앙지검장이 바뀌었다.
바로 김종도 차장검사로 인한 내부 알력 때문이다.
김종도 차장검사는 나름의 처신을 잘하기는 했지만 최근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현 중앙지검장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다.
결국 새로운 중앙지검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다름 아닌 조정수 중앙지검장이었다.
박두영 부장검사의 사수이기도 한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매사에 냉철하기로 검찰 내부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다만 그는 뇌물을 좋아하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고다이는 또 아니다.
적당히 챙길 것은 챙기는 타입이다.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박두영 부장검사의 원판이라고 보면 딱 맞다.
다만 이런 행보가 꽤 철저해서 외부에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를 가져서 카리스마가 꽤 있는 타입이다. 다행이라면 밑에 있는 이들을 제법 잘 챙겨준다는 것.
박두영 부장검사와는 꽤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특히 효율을 중시하는 타입이라서 다른 지검장과는 많이 달랐다.
최민혁은 중앙지검장이 바뀐 후에 어수선한 중앙지검 내부 분위기를 꼼꼼히 살폈다. 역시 박두영 부장검사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아예 작정하고 박두영 부장검사는 내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딱 타이밍이 좋네. 조정수 중앙지검장과는 천천히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차세대 검찰총장이라면 나쁜 인맥은 아니니까.’
“우리 박 검사님과 조용히 약속을 좀 잡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조금 뜬금없는 최민혁 실장의 지시에도 딱히 질문하지 않았다. 그 역시 중앙지검장이 바뀐 것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 * *
박두영 부정검사는 여전히 최민혁 실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다고 최민혁 실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제 거물(?)이 된 최민혁 실장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김현탁 본부장을 처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 그래도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온 이후에 중앙지검 내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아서 최민혁 실장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제 부담스러웠다.
김현탁 본부장 구속에도 자신이 관여했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과 김현탁 본부장 사이의 원한 관계 때문이다.
‘이젠 그만 만날까?’
하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 에플 주식 매입에 착수했는데, 외가 쪽을 통해서 에플 주식을 꽤 사들였다.
달달한 최민혁 실장과의 연은 도저히 손을 떼기 힘든 계륵이었다.
결국 이번 만남 장소는 이전과는 달리 아침 새벽 시간에 지하 3층 공영 주차장이 되었다.
차량 두 대가 나란히 선 자리에서 박두영 부장검사와 최민혁 실장이 만났다.
최민혁이 탄 차량은 너무 검은색으로 도배해 놔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창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는 최민혁 실장의 눈을 확인했다.
“이게 무슨 첩보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정말 불편합니다.”
“아무래도 조심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차창이 내려가서 살짝 얼굴만 드러난 최민혁이 툴툴거렸다. 그는 지난 에플의 정보를 이야기하려다가 아직은 타이밍이 아니라 생각하여 말을 줄였다.
“아니, 그렇게 부담되면, 김현탁 본부장 제보처럼 차라리 대리인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얼굴은 자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두영 부장검사는 너스레를 떠는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혀를 찼다.
“이전과는 이제 상황이 다릅니다. 최민혁 실장님과 이렇게 만나는 장면이 찍히기라도 하면 제가 곤란합니다.”
“증거도 없는데, 검찰 내부에서 말이 나옵니까?”
“우연이 너무 많이 겹쳤으니까요. 유독 최민혁 실장님과 원한 관계가 있는 이들만 다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우연을 계속 남발하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일 때문에 박두영 부장검사의 실적은 비례 함수를 그렸다. 이제는 중앙지검 내부만이 아니라 검찰 내부에서 박두영 부장검사를 주목했다.
박두영 부장검사가 점점 그 영향력을 키워갈수록 서서히 견제도 들어왔다.
이들 배후에는 반최민혁 실장파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 솜씨입니까?”
“최문경 부회장만이 아닙니다. 오성 전자 역시 검찰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님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거의 내사 수준입니다.”
“그렇습니까?”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이 이 일에 끼어든 것은 딱히 최민혁 실장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콜린스 사업부 인수와 관련해서 칼자루를 쥐기 위함이었다.
최민혁 실장의 약점을 안다면 협상은 생각보다 유리하게 흘러갈 수도 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최민혁 실장에게 계속 휘둘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MP3 특허와 같은 원천기술이다.
심지어 어떻게 보면 좀 느린 감이 있었다.
이런 거야 오성 전자가 늘 하던 행동이었으니까.
다만 이 사실을 최민혁이 몰랐던 것은 수면 밑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어서다.
최민혁 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박두영 부장검사 입에서 저런 이야기가 나온다면 중앙지검이나 대검 위층에서 이미 지시가 내려갔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박두영 부장검사도 이제는 최민혁을 꽤 걱정했다.
“요즘 최 실장님 인기를 고려하면 딱히 툴툴거릴 일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아니, 오히려 느린 감이 있습니다. 최 실장님에 대한 진실이 좀 더 밝혀졌다면 더 빨리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박 부장검사님 말투가 좀 어색하네요.”
“현직 부장검사인데, 아무래도 조심할 필요가 있죠.”
경고를 해주는 박두영 부장검사 말에도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가 굳이 박두영 부장검사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부임한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박 부장검사님 평검사일 때 사수인 것으로 압니다. 이전과는 달리 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줄었지 않습니까?”
“……!”
박두영 부장검사는 크게 당황했다. 조정수 중앙지검장과 자신의 관계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가 조정수 밑에서 일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때는 다른 평검사도 몇몇 있었다. 자신만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다.
최민혁이 자신의 지난 일을 아는 것이 신기했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궁합이 잘 맞아서 굵직굵직한 사건을 꽤 많이 해결했다.
그 과정에서 관계가 매우 깊어졌다.
실제로 박두영 부장검사가 지금 자리에 와 있는 것도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밀어줬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놀란 박두영 부장검사를 계속 괴롭히지 않았다.
“조금만 조사하면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박 부장검사님 호구조사 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차창 밖으로 쓱 내민 자료.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 실장의 혓바닥에 휘둘려서 반사적으로 자료를 받고 말았다.
“우리 박 사장님을 좀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잡아들여도 좋기는 한데,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적당한 선에서 압박하면 그것도 좋습니다.”
자료를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깜짝 놀란 박두영 부장검사는 자료 앞부분을 허겁지겁 읽고 나서는 앓는 소리를 냈다.
“…연합 SB의 사장인데, 괜찮습니까?”
“아, 우리 첫째 큰아버지 라인이라서 오히려 저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할아버지 쪽과도 엮여 있어서 제가 손을 대기 난감합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님이 한칼에 쳐내 버리는 것이 훨씬 보기 좋습니다.”
“…그렇군요.”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 실장이 건네준 비자금 이력을 확인하면서 내심 혀를 찼다. 딱 봐도 박석기 사장만을 노린 자료였기 때문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게 최훈열 전무와의 연결 고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중간에 브로커가 끼어 있다는 점이다.
‘애매하네.’
최민혁 실장은 떠나기 전에 한마디를 해주었다.
“저도 박석기 사장이 연루된 증거를 넘기고는 싶지만, 그 자료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박 부장검사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혀를 찼다.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것은 박석기 사장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 자료라면 박석기 사장을 소환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머지는 언론이 알아서 하겠지.’
* * *
박석기 사장의 갑작스러운 검찰 소환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방유량과 페레그린의 증권 합작사 설립 때 나돈 비자금 조성 때문이다.
이 비자금 파동은 그저 말뿐인 이야기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자금에 연루된 브로커가 박석기 사장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었다.
중앙지검은 결국 박석기 사장을 소환해서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은 이 뉴스를 특종으로 다루었다.
[과거 KM 그룹 고문 박석기 사장이 비자금 세탁 협의로 중앙지검에 소환 조사를 받다!]
정말 갑작스러운 나온 뉴스였다.
하지만 이 뉴스가 KM 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비자금 문제가 KM 그룹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팝콘을 입에 문 채로 최민혁과 샐로먼 브러더스와의 갈등을 지켜보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경악했다.
자신이 박아 넣은 박석기 사장이 자칫 입을 잘못 놀리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다.
그는 권재홍 비서실장과 다급하게 윤종수 전 SB 지사장을 찾아갔다.
놀라운 것은 윤종수 전 SB 지사장의 반응이었다.
“20억.”
“이봐, 윤 지사장, 자네 앞으로의 사회생활을 포기한 건가?”
야심에 가득 찼던 윤종수 전 SB 지사장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주름도 생기고, 새치도 제법 나 있었다. 그는 사실 억울했다.
딱히 최문경 부회장을 싫어하지도 않고, 특별한 자기 의견을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고작 최문경 부회장 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SB 지사장에서 잘린 것이다.
설립한다고 생고생했는데, 연합 SB가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잘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윤종수 전 SB 지사장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박석기 사장님 수완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하지만 비자금은 불법입니다. 아마 그 폭탄이 터지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바로 최민혁 실장입니다.”
“…그 비자금은 KM 그룹과도 관련이 있어. 즉 회장님도 문제가 될 수 있어. 만약 회장님이 나선다면,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 집안도 쓰나미를 피해 가지 못할 거야.”
윤종수 전 SB 지사장은 씩 웃었다. 그는 초조한 최문경 부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일축했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복수라도 하고 자멸하고 싶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원독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윤종수 전 SB 지사장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