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
정확히는 이미 여윳돈으로 에플 주식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무리수가 있었다.
삼정 빌딩을 매각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생긴 구멍을 메꾸기 위함이었다.
최두진 사장은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최용욱 회장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민기식 고문 변호사에게 손짓해서 일 처리를 지시했다.
이 건물을 사들이려고 나온 이의 변호사는 민기식 변호사와 같이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건물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자리를 떠났다.
최용욱 회장은 수행원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삼정 빌딩 지분 중에 40%는 자신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건물을 사들일 때와 비교하면 100억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워낙에 건물 위치가 좋아서 굳이 팔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역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삼정 빌딩을 매각한 후에 그 돈을 쓸 곳이 있었다.
정확히는 과도하게 사용한 비자금 때문에 여유 자금으로 굴릴 용도였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때?”
“아니, 생각은 많이 했어.”
“도대체 에플 주식을 얼마나 사들인 거야?”
“액수를 말할 수는 없어.”
“하면 지금이라면 좀 늦지 않아? 에플 주가가 1.8 달러는 넘겼던데?”
“이미 사들였지. 그 돈이 빠진 자리를 어떻게든 메꿔야 했거든. 돈이 더 필요했어. 그리고 자네 손자 민혁이 충고도 고려했어.”
“…설마 아직도 그 X 리포트를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겠지?”
X 리포트에서 말하는 것 중에 부동산 폭락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다만 이 내용을 그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에플 투자로 벌써 재미를 단단히 본 최두진 사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네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잖아.”
“하지만 난 빌딩을 매각하거나 그러지 않았어.”
최두진 사장은 최용욱 회장의 반발에 쓰게 웃고 말았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는 최용욱 회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의 에플 인수 후에는 생각을 좀 달리했다.
생각보다는 이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에플 지분을 0.8 달러에 사들였다. 모두 1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었다. 이때만 해도 다른 이들은 그저 눈치만 보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은 에플 주가가 벌써 1달러를 넘어섰다.
아니, 현재 에플 주가는 1.8 달러에서 조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이봐, 용욱아. 뻔히 눈 가리고 아웅 할 생각은 하지 마. 자네도 비자금을 이용해서 에플 지분을 매입한 걸 아니까.”
최용욱 회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해외 비자금 일부를 이용해서 에플 지분을 매입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이 친구가 참. 나랑 자네가 같이 살아온 시기가 얼마인데 모르겠어. 자네 비자금 흐름은 내가 모를 수가 없어.”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거야…….”
최용욱 회장은 최두진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최두진 사장은 피식 웃었다.
“얼마나 매입한 거야? 내가 절대로 비밀을 지킬 테니, 나에게만 말해봐.”
“난 모르는 사실이야.”
“쯧, 자네가 그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이 없어. 오죽하면 에플 주가가 1달러를 돌파했겠나.”
“…….”
최용욱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정작 앞에서는 손자 최민혁의 행동을 구박하면서 뒤로는 딴 주머니를 찼기 때문이다.
최두진 사장은 딱히 최용욱 회장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솔직히 이번 일은 나도 확신할 수가 없어. 민혁이 그놈 속내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최용욱 회장도 까칠한 손자 최민혁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그는 이미 최민혁을 몇 번이나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다.
불행히도 최민혁은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최두진 사장이 툴툴거렸다.
“스티븐 그 친구가 나와서 설치는 것만 봐도 에플 부활은 믿을 만하잖아.”
“글쎄.”
“자네는 이미 최병연 소장을 비롯한 파견 팀이 에플 본사로 들어간 것을 알면서도 그런 사실까지는 말할 생각이 없나 봐?”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불행히도 손자 최민혁에게 듣지 못한 사실이었다. 오영근 사장이 이 문제는 KM 그룹에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나도 그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아. 그리고 최병연 소장의 능력은 잘 알아. 하지만 그 친구가 과연 에플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잖아.”
최두진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말고. 혹시 최병연 소장 그 친구가 하는 일이 뭔지는 알아?”
“나도 잘 모른다니까.”
“그런가?”
최두진 사장은 혀를 내두른 채 최용욱 회장을 잠깐 째려봤다. 그런데 확실히 최용욱 회장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눈치였다.
‘최 실장 이 친구가 또 무슨 작업을 꾸미는 것일까?’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플 주가가 꿈틀하기 전에 묻지 마 투자를 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과거에는 주변 눈치를 보다가 손해를, 정확히는 봐야 할 이익을 놓친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KM 전자의 지분으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친구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그 일 때문에 이번에는 단단히 에플에 투자한 것 같았다.
‘초대박까지는 바라지 않아. 대박만 되어도 딱히 손해를 볼 일은 아니니까.’
* * *
최민혁은 스티븐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계획에 대한 수정을 고민했다. 에플 지분 인수는 애초에 없던 계획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소식에 깜짝 놀랐다.
“정말 할아버지가 에플 지분을 1억 달러 넘게 사들였습니까?”
“장승일 실장이 오프더레코드 형식으로 말했지만 사실입니다.”
“하.”
실로 깜찍한 일이다.
자신만 보면 에플 투자는 하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아니, 뒤에서는 작정하고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그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다가 아니었다.
“최두진 사장 말입니까?”
“네, 에플 지분을 가용 자금과 대출 자본으로 매입한 후에 두 분 다 들고 있던 부동산과 빌딩을 대거 처리해서 돈을 메꾸었습니다.”
두 사람의 부동산 매각은 장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친 기다렸다는 듯이 일시에 강남 빌딩과 부동산을 전량 정리했다.
워낙에 부동산의 수요가 높아서 매각 대금은 꽤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다만 이 부분과 관련해서 재계에서 말이 나오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이 가진 물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금액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매각된 리스트를 확인했다.
‘…시기적으로 최상의 타이밍이기는 한데, 정말 기가 막히네.’
그는 솔직히 두 사람에게 IMF에 대한 정보를 흘릴 생각은 없었다.
냉정하게 두 사람이 IMF 동안에 자금이 쪼그라들어도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도와줄 우군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그런데 이 계획도 변경이 불가피했다.
에플 주가는 무조건 오를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상승폭이 어디까지 달할지는 최민혁도 모를 뿐이다.
“그러니까. 사전에 준비해서 에플 지분을 매입한 것이 아니라 그냥 지르고 본 거네요.”
“장승일 실장도 그 문제 때문에 꽤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죠.”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물량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에플 주가가 갑자기 1달러를 돌파한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하지만 이 일이 다는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은 뜻밖에 에플 주식 매입에 많은 세력이 끼어든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30만 원을 돌파했던 KM 전자의 주가였다.
KM 전자의 주식이 30만 원대에서 갑자기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후로 27만 원대까지 한 번에 밀렸기 때문이었다.
에플 주가에 대한 외국인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아니, 소수의 몇 세력이 그랬다.
다만 27만 원에서 더 내려가지는 않았다. 25만 원을 한 번 찍고, 다시 반등해서 27만 원 선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최민혁은 KM 전자의 주가에 오히려 거품이 있다고 확신하기에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다.
“DL 그룹이나 이쪽은 어때요?”
“그쪽은 아직 눈치를 보는 중입니다. 5년 동안 에플의 평균 주가는 고작 0.3~0.4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지금 주가는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하긴 지금 에플의 주가가 1.5달러 정도니 생각보다 고민되겠어요. 하지만 이대로 두면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 스티븐 쪽에 연락해서 언론플레이를 좀 더 확실히 하라고 하세요. 필요하다면 ‘콜린맥’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도 됩니다.”
최민혁은 문득 에플에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이왕이면 혁신적인 디자인이면 더 좋겠군요. 에플 쪽 디자인 엔지니어를 통해서 우리 디자인을 최대한 이용하라고 알리세요.”
“…알겠습니다.”
* * *
조나단 폴은 스티븐의 복귀 전까지만 해도 불안에 떨었다. 그가 디자인한 메시지 패드가 흑역사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메시지 패드의 실패는 딱히 그의 책임 때문은 아니지만, 그 자신이 디자인에 전적으로 책임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스티븐이 화장실에 가서 눈밖에 벗어난 직원을 막 잘라낸다는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차라리 그만둘까?’
솔직히 우울증까지 걸린 것은 단순히 그런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엔지니어가 복귀한 후에 에플 임직원에 대한 구조조정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직서를 늘 책상 안에 놓아두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디자인 미팅 분위기는 오늘따라 어수선했다.
팀장을 비롯한 위의 실무진들은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스티븐이 한 동양인과 같이 나타났을 때는 그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가 메시지 패드 시제품을 가져와서 바닥에 던져서 박살 내는 퍼포먼스를 펼쳤을 때는 공포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벤틀리 수석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벤틀리, You're Fired!
벤틀리 수석 옆에 있던 매니저는 패닉에 빠져서 결국 회의실을 나갔다. 잘린 것이 아니라 병원으로 간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스티븐이 마치 카멜레온처럼 독재자 분위기를 벗어던진 것이다.
그는 최병연 소장에게 손짓해서 다른 시제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곧 회의실 단상 위에 올라온 것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물건이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이 제품은 에플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회사에서도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24인치의 커다란 덩치에도 생김새가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단 폴이 그때 받은 것은 영감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렸던 디자인 중의 하나가 떠올랐다. 다만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저렇게 얇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술이 가능해 보였다.
그는 다급하게 수첩을 뒤져서 과거에 자신이 그렸던 디자인을 찾았다.
지금 전시되고 있는 모델보다도 디자인적으로 더 얇게 처리가 된 물건이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해서 시각적으로 최대한 그 효과를 올린 물건이었다.
이 디자인은 지금 전시된 디자인보다도 한 단계 격이 높은 제품이었다.
스티븐은 자신이 나서서 연설하는데, 딴곳을 보고 있는 조나단 폴의 앞으로 와서 그 수첩을 강제로 뺏어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나단을 잘라 버리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곧 단상 앞으로 가서 최병연 소장에게 수첩의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곧이어 최병연 소장은 전시 물품을 가져온 최구만 과장에게 이를 보여주었다.
최구만 과장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파워 쪽은 이 디자인에 맞추기 위해서 커스텀 방식으로 새로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비용이 제법 들어갈 겁니다.”
한마디 내뱉은 최구만 과장이 주변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굳이 새로 파워 쪽을 설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대비한 시제품은 이미 한국에 있을 때 진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워 시제품은 이미 최구만 과장이 가지고 온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