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
그는 에플 이사회를 대리해서 이 자리에 나온 아맬리오 이사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조용한 행보를 보이던 그가 자신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도 나름 에플을 살리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IBM, GE도 막판에는 에플에게서 등을 돌렸다.
에플이 좌초한 배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책임이다.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마이크를 아귀처럼 들이대는 기자를 보면서 혀를 찼다.
[토비 CEO님, 이번 에플 인수와 관련해서 외압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기자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외압이 있었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에플 경영에 간섭한 겁니까?]
[IBM과 GE가 에플 인수에 관심을 여전히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 에플이 KM 전자에 지분을 매각한 데는 이 일이 관련되어 있습니까?!]
[에플의 지분 매각이 하루 이틀 걸리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허술하게 인수 작업을 진행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마 미국에서 이 일이 진행되었다면 사전에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홍콩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사전에 연락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문하는 기자들은 목이 찢어지라고 계속 외치는 중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에플 기업을 인수한 기업이 KM 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나라 기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국 기자는 다들 괴이한 표정을 한 채 기사를 본국으로 타전하기 바빴다.
[와, 이게 진짜였어?]
[최민혁 실장이 결국 사고 쳤네. 아니, 이번에는 에플 인수 안 할 확률이 높다고 했잖아.]
[지금 시사 초대석에 나와서 에플 인수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잖아.]
[아니, 사전에 이미 에플 인수를 확정했다면, 시사 초대석에는 왜 나온 거야?]
[그게 황당하다는 거잖아. 정부가 KBC를 통해서 이번에 자리를 만들어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걸 못 참아서 그사이에 에플을 인수한 거야!]
[역시 최 실장답다!]
그래도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기자도 있었다.
[그래도 대단한 일이잖아. 한국 기업이 미국을 대표하는 에플을 인수하다니!]
[아니, 그놈의 에플이 지금 망해가잖아. 오성 전자 안건민 회장이 몰라서 에플을 그냥 내버려 뒀겠어? 부실한 기업이니, 그냥 둔 거야!]
그들은 이 사태를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싫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조금이라도 상황을 판단하고자 질문을 했는데…….
나선 사람은 바로 스티븐이었다. 이곳에 나온 KM 전자와 에플의 임직원들을 대신해서 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단호하게 기자들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다.
[자세한 사안은 다시 기자회견을 통해서 알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는 에플 지분의 40%를 인수한 곳이 KM 전자와 벨린 투자란 사실을 알리는 자리입니다. 이미 에플 이사회에서는 이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던 셈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뭘 했나 허탈한 기자들은 넋을 놓고 말았다.
다만 스티븐이 다시 에플 CEO가 되었다는 점은 또 다른 특종이었다.
곧이어서 기자회견장은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시끄럽게 변했다.
기자들이 스티븐에게 몰려가서 인터뷰한다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시사 초대석 역시 잠깐 나간 방송 때문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제까지 준비한 것은 에플 인수에 관한 토론이었다.
그런데 이미 최민혁 실장이 사고를 쳐놓은 덕분에 그 토론은 의미가 없었다.
최민혁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시사 초대석 담당 직원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다들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시사 초대석에서 처음부터 준비해 놓은 자신들의 시나리오와는 일이 아주 달라졌기 때문이다.
패널은 더했다. 그들은 마치 고장이 난 라디오처럼 의미 없는 내용만을 계속 반복했다.
[저, 저기 실장님, 정말 KM 전자가 에플을 인수한 겁니까?]
[하, 하지만 지, 지금 이 자리에서 에플 인수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실장님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자, 잠깐만. 정말 에플 인수는 이미 확정이 된 겁니까?]
[이미 에플 인수에 서명했다는 말입니까?]
[도, 도대체 KM 전자는 무슨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까?]
최민혁은 웃으면서 하나씩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KM 전자는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민혁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한 채 알게 모르게 자신을 공격하던 이들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좋기만 했다.
‘어쩔 거야. 이미 에플 인수는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에플 인수를 없던 것으로 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될 리도 없잖아. 위약금이 얼마인데…….’
그나마 사회자 정명구는 경험이 많아서 다른 패널보다 빨리 정신을 차려 이 상황을 수습했다. 물론 그의 질문은 최민혁을 향했다.
[최, 최 실장님. 도,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입니까? 아직 KM 전자 내부적으로 결정이 나지 않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는 오리발을 슬쩍 내밀었다.
[우리 회사를 움직이는 것은 당연히 이사회입니다. 오영근 사장님이 이사회 임원진과의 협상을 통해서 의사결정을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에플 인수를 결정했다면 그렇게 된 겁니다. 저랑은 무관한 일입니다.]
[하지만 KM 전자의 오너는 최민혁 실장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최민혁은 느긋한 얼굴로 패닉에 빠진 촬영 스텝을 구경하면서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였다.
[이거 맛이 별로네요. 흠, 그렇게 절 쳐다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너가 회사 경영을 독단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자칫하다가는 배임에 걸립니다.]
횡령과는 달리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불법 행위를 통해서 재산상의 이익을 얻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 이익을 취해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범죄행위다.
따라서 최민혁이 임의로 에플 인수를 결정해서 밀어붙여서 KM 전자에 손실을 입히면 배임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최민혁은 자신이 결정하더라도 KM 전자 임원을 불러 모으고, 오영근 사장으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게 한다.
이런 과정 자체에서 별다른 불협화음이 나오지 않는 것은 최민혁의 일 처리가 그만큼 합리적이고, 회사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정명구 사회자가 이 배임죄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의 말에 납득이 가진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사실을 말하는 중이었다.
[에플 인수와 같이 중요한 결정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KM 전자 이사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최종 결정은 제가 모를 수도 있는 겁니다.]
[그건…….]
정명구나 패널도 다들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행태지만 딱히 최민혁의 말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민혁은 갑자기 KM 전자의 에플 이야기가 아닌,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기업가치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아마 나이키란 기업에 대해서 아실 겁니다. 이 회사는 신발을 파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정작 나이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나이키를 신은 슈퍼스타의 모습입니다. 즉, 나이키는 이미지를 판 전형적인 기업입니다.]
답답한 정명구 사회자가 질문했다.
[그것과 이번 에플 인수설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한 눈으로 패널을 힐긋 쳐다본 후에 다시 방송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는 절대적인 확신이 가득했다.
[이런 나이키의 경영을 존중하는 사람이 바로 스티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KM 전자에서 미는 사람이 스티븐입니다. 스티븐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한 사람입니다. 저 역시 그런 스티븐의 신념에 크게 공감합니다.]
[스티븐이 누구인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이미 에플 창업은 지난 이야기입니다. 스티븐은 이제 한 개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정작 에플의 매출은 최악입니다.]
최민혁은 여전히 기업의 미래가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 에플의 상황은 과거 그들이 가진 신념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치가 몰락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에플이 스티븐 CEO와 절치부심해서 과거의 비전을 다시 찾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에플이 다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최민혁은 사회자인 정명구나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패널들을 보지 않았다. 그는 수백만의 시청자를 대변하는 카메라를 직시한 후에 또박또박 말했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KM 전자 역시 에플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전 디지털 시대의 패러다임 변화를 확신했고, 여기에 투자했습니다. 이 가치를 전적으로 밀었고, MP3가 새로운 시대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확신했기에 이 사업을 밀어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 이 시사 초대석에 참석한 패널분들도 오히려 MP3 기술을 공개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아뇨. 규모와 처한 환경이 다르지만 같습니다. 제가 KM 전자의 미래가치를 설계했듯이 스티븐 역시 인류 기술의 발전을 위한 패러다임을 내놓을 겁니다. 그 가치에 올라탄 에플은 다시한 번 세상을 변화시킬 겁니다.]
[…….]
정명구 사회자는 신념으로 가득한 최민혁 실장의 눈빛에 질려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에플도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군요.]
최민혁은 마치 에플의 성공을 확신이라도 한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서 다섯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혁신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신사업입니다. 시련은 당연히 생길 겁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스티븐의 에플이라면 그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 스티븐이 부족하다면 저는 기꺼이 스티븐을 도와줄 생각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에플에 투자한 이유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딱 5개월 후에 볼 수 있을 겁니다.]
[…….]
딱히 강한 어조도 없는 무덤덤한 최민혁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기백은 절대로 가볍지가 않았다.
당장 그렇게 떠들기만 하던 패널들도 최민혁의 기백에 질려서 입을 다물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민혁이 그냥 단순히 에플을 인수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다만 에플이 회생할 수 있는 그 방법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실장님은 에플 부활을 위한 대안이 있다는 말입니까?]
최민혁은 물론 그 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해답을 다 알면 이 세상이 재미없습니다. 스포가 되니까. 지금 제 말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후 에플의 경영 성과가 전부 보여줄 겁니다!]
[…….]
패널, 사회자, 담당 PD도 최민혁의 강력한 압박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조용히 앉아서 에플의 성공을 예상하는 최민혁 실장의 모습을 보니 그의 주장이 단순히 말로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콜린스 신화를 이룩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상준 PD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말았다. 그는 넋을 잃고 있는 방송 스텝의 모습을 보고서 굳이 시청자들의 반응을 볼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생방송으로 시사 초대석을 준비한 것도 전부 준비해 놓은 시나리오를 통한 압박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생방송을 이용해서 거꾸로 KM 전자와 에플 인수설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다.
손정수 국장이 한 지시를 정확히 반대로 해서 최민혁을 영웅으로 만든 셈이다.
‘…설마 방송국에서 쫓겨나지는 않겠지?’
* * *
VA 패널은 동작 중인 상태에서 액정이 눕도록 편향된 기술이다. 따라서 기존 LCD 공장과는 이 부분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기존의 LCD 생산 설비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기존 LCD 설비를 갖춘다고 해도 손을 많이 봐야 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KD LCD 관련 담당자를 계속 만나서 검토에 검토를 거듭해야 했다.
KD LCD 설립 이전에 기술적인 문제에 먼저 직면한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엔지니어를 통해서 기술적인 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족했다.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네.’
VA 패널은 IPS 패널과 비교해서 여러 가지 강점이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이 이 원천기술 소유자라서 불안했다.
그런데 이제는 불안을 충분히 떨쳤다.
오히려 전화위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