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
구준모 차장은 자신이 원치 않았던 이 상황에 이를 악물었다. 그는 기약 없이 최민혁 실장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과 손을 잡고, 최민혁을 계속 압박하고 싶었다.
“…알았네.”
“지금은 지켜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전 차라리 KM 전자가 에플을 인수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 이후에 회사 매출이 줄어들면 그때는 우리가 일어설 명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래, 내가 너무 서둘렀어.”
* * *
안산 공장에 있는 KM 전자 노조 움직임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진짜 파업을 한번 해보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조용히 다시 침묵하자 멀리서 지켜봤을 때는 어떻게 된 건지 그 내막을 알기 어려웠다.
김명준 과장은 이런 노조의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고,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바로 이 사실을 보고했다.
“노조가 다시 조용해졌다고요?”
“네, 마치 실장님이 TV 사업부를 매각하려 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행보와 비슷합니다.”
최민혁도 쓰게 웃고 말았다. TV 사업부는 매출 규모가 너무 커서 빠르게 정리하기 힘들었다. 새로운 캐시 카우를 어느 정도 확정한 후에야 TV 사업부를 매각할 수 있었다.
“비교해도 그것과 비교합니까?”
“하지만 이전과는 노조 움직임이 사뭇 다릅니다.”
“그야 강성 노조에 가까운 정홍순 공장장을 비롯한 핵심 인물이 다 구속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노조원 중에 강성 성향인 인물이 꽤 있습니다. 그들조차 눈치를 보는 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뭐 그 문제는 저 때문이라고 인정해야겠네요.”
최민혁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역시 자신의 눈 밖에 벗어난 일들을 단호하게 처리했다. 대부분은 지금도 감방에 가 있었다.
강성 노조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켕기는 것이 있나 보지.’
최민혁은 노조 문제에 대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노조 움직임이 위축된 것을 새삼 느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청소할 기회는 언제라도 있을 테니까.’
다만 그렇다고 주동자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어서 보고서 리스트 명단을 살폈다.
“구준모 차장이라…….”
“눈치가 보통 빠른 친구가 아닙니다. 거기에 독단적인 면이 없어서 상황 판단력이 좋습니다. 이번에 오히려 민노총을 비롯한 다른 외부 노조가 더 끼어들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렇겠죠.”
그 역시 인생 1회 차에서 구준모 차장이 얼마나 노련하게 행동했는지 잘 안다. 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것을 보자 오히려 공장 파업을 막은 이가 그였다.
내심 기회가 되면 조직에서 제거하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어차피 구준모 차장 후임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어.’
물론 이런 상황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KM 전자의 주가는 30만 원에 안착해서 다시 더 위를 보고 있었다. 다만 상승세가 주춤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외국인 투자자들 역시 KM 전자의 에플 인수를 좋게 본 것은 아니다. 최근 KM 전자의 주가가 주춤한 것이 그 증거였다.
에플 인수설을 한국 언론이 핵폭탄처럼 터뜨리자 세력이 온통 이 문제를 가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당한 것은 그 대상 중에 한국 언론도 있었다.
최민혁의 기존 행보와 에플의 폭탄이 만나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들도 확신하지 못했다.
물론 대부분은 에플의 원자폭탄이 터져서 KM 전자를 날려 버릴 것으로 생각했다.
“재미있네요.”
보고를 위해서 기획실장실을 방문한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그는 한영 일보에 전화해서 왜 이따위 기사를 냈는지 확인을 했지만 마땅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문제는 다른 언론사들 역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에 KM 전자를 씹는 기사를 내보냈다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뭐, 충격받을 일은 아닙니다. 사실 틀린 기사는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히려 좋습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들 에플 원자폭탄론을 부추기면서 에플 주가가 계속 추락하지 않습니까. 인수자 처지에서 이보다 좋은 여건이 어디 있습니까?”
조성돈 팀장은 느긋한 최민혁 실장 태도에서 콜린맥을 떠올렸다. 그런데 과연 콜린맥이 미국에서 성공할지는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왜, 정부가 끼어들까 걱정스럽습니까?”
“그게 좀…….”
“요즘 제가 판을 깔아준 위성 사업이 그렇게 잘 나가서 정보통신부가 잔치 분위기라고 하더군요. 제 이야기도 많이 한다고 하는데, 결과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 설마 훼방을 놓겠습니까?”
실제로 무궁화 위성과 오큘러스 시스템 때문에 정보통신부의 위상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 덕분에 여당 지지율도 탄력을 받아서 계속 오르는 중이다. 때문에 그들은 KM 전자에 계속 전화해서 최민혁을 초청하기도 했다.
당연히 최민혁은 정치 쪽과는 아예 원수지간처럼 선을 그었다.
대신 브로커 역할을 하는 최용욱 회장이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를 알음알음 들은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만 봤다.
“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안재운 황태자가 그 수혜를 입어서 신바람이 난 거 잘 압니다.”
“네.”
조성돈 팀장도 혀를 찼다.
위성 사업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역시 오성 그룹 황태자 안재운 대리였다.
오성 그룹 내에서 안재운 대리의 평가는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수성형 타입으로 괜찮다는 이야기만 나오는 중이었다.
과연 안재운이 오성 그룹을 완벽하게 경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바뀐 것은 바로 위성 사업 때문이다.
이 일에 숟가락을 얻은 e오성.
바로 최민혁이 깔아놓은 판이다.
무궁화 위성 발사 이후에 오큘러스 시스템의 가치는 계속 올랐다.
오큘러스 시스템이 가동하면서 그 기술력이 미국 다이렉TV보다 한 수준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덕분에 한국의 위성방송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뜨겁기만 했다.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동남아 쪽은 특히 이 위성방송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러브 콜을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안재운은 덕분에 방송가, 정부, ETRI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을 만나면서 자신의 영향력과 존재감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이건 단순히 회사 매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안재운이란 인물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성 그룹 전략실에서도 이 결과에는 매우 놀랐다.
이게 바로 그들이 최민혁 실장의 에플 인수설에 대해서 머리로는 미친 짓이라고 하면서도 만약 성공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는 이유다.
최민혁은 이런 오성 그룹의 생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이 만든 판 위에 올라선 꼭두각시 중의 하나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정부가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할아버지를 통해서 경고는 할 겁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묻겠다 식이겠죠.”
“에플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씀이군요.”
“네. 걱정 많은 우리 할아버지랑 비슷하죠. 다만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요는 이랬다.
정부 공무원에게 스티븐을 투입해서 에플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조성돈 팀장이 걱정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 눈치를 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콜린맥이 콜린스나 KMP-01처럼 성공하겠습니까?”
“네. 됩니다. 콜린맥에 NextOS의 OS를 포팅하게 되면 윈도우95보다 더한 경쟁력을 가질 겁니다. 에플에 대한 미국 매니아 층의 지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면 계약이 복잡해질 텐데요?”
최민혁은 씩 웃었다.
“방법은 간단해요. 우리가 에플 지분을 인수한 후에 기술지원을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대주주 이사의 지분 확보가 우선인데, 지금이라면 가능합니다. 에플 이사회도 다들 에플 상황에 질려 있을 테니까. 일은 스티븐이 해도 결국 이익은 우리가 먹으니까.”
“…….”
조성돈 팀장은 곰곰이 고민을 해봤다. 그러자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핏 봐서는 호구처럼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에플 지분 가치가 오른다면 상황이 좀 달랐다.
‘진짜 그렇게 될까?’
만약 최민혁 실장의 탁월한 실적이 없었다면 결사반대했을 일이다. 그런데 이전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KMP-01 대박이 그 증거였다. 당시 유럽을 돌아다닐 때만 해도 초대박은 생각도 못 했다.
‘…어쩌면 실장님 말대로 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반발이 더 심해질 텐데, 특히 KM 전자 대주주라면 태클을 걸 수도 있어. 그걸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네.’
* * *
오성 미술문화재단이 이번에 마련한 전시회에는 미국 화가 조지 시걸의 작품 40점을 선보였다. 이에는 파스텔, 부조, 조각 소품이 포함되었다.
석상은 실제 사람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평범한 인상을 절묘하게 잘 다루었다.
원래 이런 작업은 실제 사람 몸에 회반죽을 발라서 만든 방식이라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산업용 석고를 사용한 덕분에 이런 단점이 사라져서 땀구멍까지 드러날 정도였다.
최두진 사장은 마음에 든 그림과 석상을 손으로 골랐다.
동행한 민기식 고문 변호사가 즉시 갤러리 직원을 불러 협상에 들어갔다.
최두진 사장은 작품 가격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거 좋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사들이게.”
그는 호암미술관 한쪽에 나열된 10점이 넘는 작품을 한번 쭉 다 골랐다.
대충 계산해도 수십억이 넘는다.
아무리 대기업 사장이라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에플 인수설’과 관련해서 최두진 사장에게 자문하러 왔다가 그저 황당한 눈으로 웃기만 했다.
“부러워?”
“…아니네.”
“자네도 돈 많잖아. 그 돈, 저승에 갈 때 가져갈 건가?”
“그건 아니야. 하지만 요즘 내 사정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니까.”
“아, KD LCD 건 때문에 돈 좀 들어갔지?”
“말도 말게.”
최용욱 회장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3억 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비자금이 아무리 많아도 3억 달러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신경을 쓸 일이 많았다.
“자네는 괜찮아? 이유야 어쨌든 자네도 KM 전자 대주주 중의 한 사람이잖아.”
“10%도 안 되는 주식 소유자일 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넘어갈 수준은 아니잖아.”
“그런가. 하지만 큰 의미가 없어. 중요한 것은 KM 전자 주식이 초대박을 쳤다는 거잖아. 뭐, 자네 손자 때문이지.”
최두진 사장은 씩 웃고 말았다. 최민혁에게 앙심을 품고 사둔 주식이 대박을 치자 계속해서 주식을 사들여서 8%까지 매집했다.
2~3% 지분은 10만 원대 후반에서 사들여서 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지분은 아니었다. 그 주식들을 매입한 시기는 1,500원, 그리고 3만 원 정도 일 때였으니까.
KM 전자 주가가 대박을 친 후에 그가 번 이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돈 때문에 요즘 쳐다도 보지 않던 자식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자신을 찾았다. 지금도 미술 갤러리 한쪽에서 김현우가 자기 눈치를 보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최용욱 회장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난 솔직히 자네 손자 민혁이에게 많이 배우는 중이야. 투자는 이렇게 하는 거다. 그야말로 투자의 정석이지.”
“하면 에플 인수 일은 신경도 안 쓴다는 말인가?”
“난 민혁이를 믿네!”
“흠.”
최용욱 회장은 신호등 앞에 초점 잃은 주인공이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 역시 최두진 사장의 상황을 들었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자산보다 KM 전자 주식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배가 아팠다.
‘지분 일부를 들고 있어야 했나?’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KM 전자는 정말 망해가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에플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최용욱 회장은 장난스럽게 ‘이쪽에서 저쪽까지도 다 사!’라고 외치는 친구 최두진 사장을 보면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왠지 손자 최민혁에 대한 자신의 걱정이 쓸데없는 궁상처럼 느꼈다.
그는 그래서 넌지시 한 가지를 질문했다.
“다른 대주주들의 반응도 자네와 비슷한가?”
최두진 사장은 당연히 다른 대주주들과도 안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