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결국 최광수 기자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에플에 대한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에플이 처해 있는 상황에 관한 진짜 기사 말입니다.”
“그리고?”
“에플이 망해가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여론이 나빠지면 이 일은 없던 것이 될 겁니다.”
“계속해 봐!”
“만약 KM 전자가 정말 에플을 인수할 생각이었고, 최민혁 실장에게 뭔가 해결책이 있다면 그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린 그때 가서 재미만 보면 됩니다.”
최광수 기자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자 침을 튀겨가면서 자기 생각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아니, 괜찮았다.
최경진 편집장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좋아, 에플 심층 기사로 가지. 아, 차라리 잘되었어. 우리 언론이 하는 일이 진실을 알리는 거잖아. 이번 기회에 언론 역할 제대로 한번 해보자!”
“…네.”
다들 대답을 하면서 내심 비웃었다. 가짜 뉴스를 찍어내라고 지시한 것이 최경진 편집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최경진 편집장이 기원한 대로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도 정말 최민혁 실장이 에플을 인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 * *
스티븐이 에플을 떠난 후에 에플은 한때 다시 부흥하는 시기가 있었다.
스컬리가 페이지메이커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전자 출판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맥을 대체할 컴퓨터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플은 덕분에 꿀을 쭉쭉 빨았다.
책상 위에 컴퓨터만 있다면 개인 출판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에플 천하는 계속될 것 같았다.
실제로 에플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스컬리가 에플 고유 인터페이스를 MS가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만 것이다.
그게 사실 윈도우95의 탄생을 이루어 낸 배경이나 마찬가지였다.
윈도우95가 출시된 후에 에플 천하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엉뚱한 삽질 때문에 어려워진 에플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자충수였다.
더군다나 메시지 패드의 실패는 휘청거리는 에플의 미래 희망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플 인수는 미친 짓이다!]
[GE가 에플 인수를 포기한 것은 에플이 그만큼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국내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이 기사를 따라서 나온 에플 심층 기사.
에플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고 있던 이들은 이 기사를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나온 이 기사들의 쓰나미는 메이저 방송 뉴스도 비켜나지 않았다.
뉴스를 보기만 하면 나오는 것이 ‘에플 제국의 몰락’이란 기사였다.
심지어 에플 몰락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와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바로 KM 전자의 에플 인수설이었다.
[물론 사기업이 인수합병을 하는 것은 경제 활동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경영자가 독단적으로 망해가는 기업을 인수해서 그 기업이 휘청인다면 그것은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닙니다.]
[경영자의 독단으로 당장 피해를 보는 이는 묵묵히 일하는 근로자입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역시 KM 전자 안산 공장 노조였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그동안 죽만 쑤고 있던 곳이 KM 전자 노조였기 때문이다.
특히 KM 전자 노조 위원장인 구준모 차장은 이번이 기회라고 판단되자 곧바로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연락했다. 그는 다행히 비서실장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
[부회장님도 이번 일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KM 전자가 어디 남입니까. KM 그룹은 언제까지나 근로자 편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상황이었으니, 시위를 벌이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그는 이번 일은 철저하게 하고 싶어서 권재홍 비서실장의 도움을 얻어 김정현을 만나서 먼저 도움을 청했다.
요즘 KMP-01 생산 공장에서 일하던 김정현은 구준모 차장을 직접 만난 후에 쾌재를 불렀다. 그는 이제 충분한 명분만 있다면 직원을 선동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을 더 견디기 어려웠다. 처음은 KMP-01 생산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공장에 배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생산 업무는 바뀌지 않았다.
고작 KMP-01 조립을 하려고 대학을 나왔나 자괴감을 느꼈다.
그건 김정현과 같이 공장에서 일하게 된 신입 사원 중에 일부 역시 비슷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이번 일이 단기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이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권우영만큼은 이런 이들과 태도를 달리했다.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했다.
게다가 그는 가끔 미국에 가 있는 강준석 대리와 연락하기도 했다.
김정현 처지에서는 은근히 신입 사원을 휘어잡고 있는 권우영이 마뜩잖았다. 권우영이 강준석 대리가 팀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가 있는 일 때문에 다른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야, 권우영, 너 혼자 너무 잘난 척하는 거 그만해라. 지금은 이런 공장 일이 문제가 아니야. 너, 에플 인수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는 거야?”
휴게실에 나와서 홀로 담배를 문 채 강준석이 보낸 편지를 읽던 권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툭하면 자신을 찾아와서 괴롭히는 김정현이 못마땅했다.
더욱이 무슨 조폭이라도 된 양 똘마니 두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난 회사 경영에 별로 관심이 없다.”
“넌 억울하지도 않냐? 원래 생산 팀에 신청한 것도 아니잖아?!”
“지금 회사 사정은 너도 잘 알잖아.”
“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원래 관리직이잖아. 그러면 그 비슷한 쪽에 배치를 해야 할 것 아냐. 아,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자. 지금은 급한 상황을 다 넘겼잖아. 그런데도 계속 공장에서 부품 조립만 해야 해?”
김정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휴게실에 나와 있던 다른 신입 사원들 역시 공감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KM 전자의 위상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 그 누구도 KM 전자를 떠나고 싶은 이는 없었다.
권우영은 감정이 없는 얼굴로 바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난 하고 싶은 말 없다.”
“야, 너도 신문 봤잖아. 에플은 망해가는 회사야. 에플 인수는 간단한 문제가 아냐. 만약 에플 매출이 더 나빠지면, 에플에 추가적으로 자본이 더 투입되게 돼. 그러면 KM 전자도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있어. 그러면 당장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란 말이야!”
회사가 어려워진다고 해서 신입 사원이 구조조정 되는 것은 드물다. 지금 김정현의 이야기는 억지에 가까웠다. 사실 본인도 잘 아는 눈치다.
다만 김정현이 말한 경우가 적용될 수가 있다면 구준모 차장 같은 관리자다.
구준모 차장은 그렇다고 직접 대놓고 나서기는 최민혁 실장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가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김정현이었다.
김정현은 물론 이미 최문경 부회장을 만나서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조기 승진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알면서도 구준모 차장보다는 에플 인수에 대한 이슈를 계속 고집했다.
권우영은 늘 평소에 기회주의자처럼 구는 김정현이 싫었다.
“그렇게 말하는 김정현 너는 이미 다른 곳에 면접을 보고 있잖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되잖아?”
이를 들은 김정현이 움찔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서 보험도 들었던 것이다.
“아, 진짜 답답한 소리 하네. 만약을 위해서 면접을 본 것에 불과해. 누가 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
“글쎄. 넌 매사에 불만이 많았어. 저기 있는 친구들 앞에서 늘 회사 경영 비방만 하잖아. 에플 인수 같은 문제는 우리 같은 신입 사원이 고민할 일은 아냐!”
“너 정말 그따위로 나올래? 강준석 그 새끼가 미국에 가 있는 것 때문에 넌 따로 특별 취급 받을 것 같아서 그래? 턱도 없는 소리야. 그거 다 쇼야. 강준석 그 새끼가 하는 게 뭐가 있는데, 신입 사원이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 회사가 어려워지면 당장 소모품에 불과한 우리 직원부터 잘라!”
권우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글쎄, 난 KM 전자에 입사한 후에 직원부터 잘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보너스만 두둑하게 나왔지. 강준석 대리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미국에서 잘 지내. 선동 그만 좀 해라. 회사가 도대체 얼마나 널 위해서 잘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김정현은 강준석이 생각보다 잘 지낸다는 것을 알자 그 이야기는 빼버렸다.
“내 말은 그 말이 아니잖아. 지금 잘 나간다는 것은 인정해. 그런데 에플 인수는 이야기가 좀 달라. 우리라도 항의를 해야 하는 것 아냐?!”
권우영도 바보는 아니다. 그도 다른 공장에 배치된 이들을 통해서 들은 내용이 있었다. 최근 사내 노조의 이상한 움직임에 대한 것이다.
“왜, 노조를 선동해서 최민혁 실장님을 압박이라도 하려고? 하려면 너 혼자 해.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냉정하게 돌아서는 권우영의 모습은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 덕분에 불만을 품은 이들도 갈등하다가 결국 권우영의 뒤를 따라나섰다.
김정현은 내심 이를 악물었다. 그는 권우영의 인망이 꽤 좋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번 에플 인수설을 이용해서 권우영을 선동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먹힌 것이다.
자신이 나서면 모이는 인원은 고작 20명 안팎이다. 그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그만큼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독보적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체, 노조 위원장인 구준모 차장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 * *
구준모 차장은 김정현에게서 연락을 듣고 나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에플 인수설로 KM 전자 내부가 꽤 흔들렸기 때문이다.
‘좋은 기회인데, 역시 어렵나?’
최근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단순히 대단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갑자기 이 기업 저 기업 인수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전부 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었다.
그런 기업을 아우르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경이롭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자신을 즉각 지원해 주겠다고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최민혁 실장이 자기 눈 밖에 벗어난 인물을 그대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신이 KM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 옮긴다고 해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있다고 해봐야 고작 수석 부장 정도인데, 지금보다 연봉을 더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최근 KM 전자 본사 내에서 스톡옵션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다른 노조원 역시 걱정이 가득했다.
“전 정홍순 공장장도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지금은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까지도 계속 구경만 했잖아.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어.”
하지만 안산 공장 노조원은 불안한 듯 눈알을 계속 굴렸다.
“그런데 우리 회사가 다른 대기업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히 KMP-01만 해도 굳이 직접 생산하지 않고, 외주만 줘도 간단히 해결될 일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안선종 팀장을 비롯한 최민혁 실장을 따르는 이들조차 이 문제로 걱정이 많습니다.”
사실이었다.
최민혁이 지금까지 한 구조조정에 따르면 노동집약적인 사업부는 다 정리 순서를 밟았다. TV 사업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아직은 TV 사업부 수익과 덩치가 커서 정리하지 않은 것뿐이다.
노조가 굳이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는 것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최민혁 실장에게 빌미를 준다면 구조조정은 더 가속화될 확률이 높았다.
‘하긴 그것도 이상하지. TV 사업부를 정말 팔 생각이 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 노조를 의식해서 몸을 사리는 건지 모르겠어.’
구준모 차장은 노조원의 불안을 의식해서 강하게 반발했다.
“설마 오성 전자가 우리 TV 사업부를 인수라도 한다는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사업부 매출액이 얼마인데, 그런 짓을 하겠어?”
“압니다. 하지만 KMP-01 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은 낸드 메모리 수급 때문에 누적 물량이 70만 대에서 주춤합니다. 그런데 올 하반기에 낸드 메모리 수급이 해결되면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는 미국 수출도 본격화될 확률이 높습니다.”
‘어쩌면 에플 인수도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노조원들도 다들 바보는 아니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면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다른 포석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