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46화 (446/1,021)

#446.

임권수 부장은 당황하는 천경구 과장을 계속 타일렀다.

“걱정하지 마. 자네는 내가 알아서 오성 전자에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까. 다만 KM 그룹 전략 기획실 움직임을 계속 조사해 봐. 이런 일이 그냥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아, 알겠습니다.”

* * *

천경구 과장의 이야기는 오성 전자 기획실에도 큰 충격이었다.

다들 에플 인수설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성 전자조차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아니, 무리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게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IPS LCD 양산 문제 때문에 피로에 찌들어 있는 황광수 차장조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정말 믿을 수 있습니까?”

임권수 부장은 황광수 차장을 째려봤다.

“내가 아는 채널을 통해서 얻은 정보야. KM 그룹 윗선까지 연결되는 것이니,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최용욱 회장이 이걸 용납할 리가 없습니다. KM 전자가 흔들리면, KM 그룹 역시 온전히 무사하기는 힘듭니다.”

물론 KM 전자와 KM 그룹이 계열 분리가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서로 모른다고 하기는 좀 힘들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임직원끼리는 서로 또 손을 잡기 때문이다.

최민혁 역시 사촌 같은 둘 사이를 강제적으로 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어느 정도 소통 채널이 있어야 최문경 부회장을 더 쉽게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KM 전자가 흔들리면, KM 그룹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들은 권태성 기획실장 역시 당황했다. 그도 ‘에플 인수설’은 어디까지나 인수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임권수 부장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말 확실해?”

‘최 실장이 미친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혹시 KM 그룹이 에플을 다시 살리는 방법을 찾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전략 기획실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아직 대안은 없습니다. 다만 스티븐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것을 봐서는…….”

“스티븐? 하, 나도 스티븐이 누구인지 알아. 하지만 아무리 에플의 창업자라고 해도 지금의 에플을 살릴 수는 없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KM 그룹을 대신해서 욕을 먹은 임권수 부장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자신 역시 최민혁 실장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들은 소식을 전하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 일본만 해도 난리가 났어. MS가 NEC를 압박해서 윈도우95가 탑재된 모델을 올 연말에 출시하기로 했단 말이야!”

일본 내의 PC 시장 지분 역시 이 때문에 크게 조정 중이었다.

IBM과 에플 PC 시장 지분이 벌써 6% 가까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윈도우95 탑재용 NEC 모델이 일본 시장에 쏟아지면 이 지분마저 급격하게 바뀔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일본 후지쓰, 세이코 엡슨 같은 기업도 관련되어 있었다.

즉 에플의 일본 매출 하락 폭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권태성 실장은 윈도우95 출시 때문에 갑자기 변해가는 세계 PC 시장 판도를 살피면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자칫하다가 오성 전자 역시 이런 쓰나미에 휩쓸릴 위험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MS 코리아 측과 계속 긴밀한 미팅을 하면서 MS 측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플이 다시 살아날 뾰쪽한 방법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권태성 실장은 일단 ‘에플 인수설’, ‘스티븐’에 대한 조사를 지시한 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을 찾아갔다.

* * *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은 예상과는 달리 꽤 조용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최소한 부사장급 인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안색이 굳어 있는 김진석 이사와 만나게 되었다.

그래도 차라리 이편이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김진석 이사도 권태성 실장을 무시해서 혼자 만난 것은 아니었다. 전략 기획실에 있는 다른 핵심 실세는 이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후유,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합니다.”

“…그러게요.”

권태성 기획실장은 묵묵히 기다렸다. 이건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전략 기획실 방문 전에 충분히 통보했으니, 김진석 이사의 답변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김진석 이사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최민혁 실장이 에플을 인수할 계획입니까? 최용욱 회장도 이 일에 승인한 겁니까?”

정확히는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안건민 회장이 이미 최용욱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기 때문이다.

다만 확인이 필요했다.

정말 KM 그룹에서 이번 일을 밀어붙이는지 말이다.

“제가 몇 차례 확인해 본 바로는 사실입니다. KM 그룹 전략 기획실이 에플 인수와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룹 차원에서 하는 조사다. 다만 이 일에 매달린 인원이 워낙에 많아서 마치 KM 그룹이 에플을 정말 인수하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최용욱 회장이 이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보기엔 충분했다.

김진석 이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역시 에플이 절박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잘 안다. 당장 에플은 한국에 파워맥 7200 모델을 올 하반기에 국내에 출시할 예정이다.

이 제품은 2세대 파워맥으로 HDD 1GB, RAM 16MB를 장착한 제품이다. 메모리는 최대 256MB까지 확장할 수 있다.

고속의 정보 처리가 가능한 이 제품은 그만큼 윈도우95에 대한 에플의 반격의 의지가 담긴 물건이다.

“권 실장님도 잘 알겠지만, 파워맥 7200 모델로는 윈도우95의 기세를 꺾기 어렵습니다. 에플의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권태성 실장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가격을 대폭 낮추면 통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고 윈도우95의 파격적인 공세를 저지하기는 힘들 겁니다.”

에플의 마케팅 전략에 관한 이야기는 곧이어서 하나둘씩 나왔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다른 추측을 떠나서 지금 있는 정보만으로도 에플의 상황은 암울하기만 했던 것이다.

“김 이사님, 그러면 에플은 생존하기 힘들다는 말입니까? 이번에는 정말 최민혁 실장이 실패할 것이라고 보는 겁니까?”

“그건 또 아닙니다.”

“네?”

김진석 이사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권 실장님이 올려준 자료 때문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한 일을 보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때마다 기발한 방법으로 잘 통과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도 뒤늦게야 자신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뭔지 알았다.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보면 그들은 정말 호구처럼 최민혁 실장에게 놀아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도 보면 그럴 기미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 대책이 뭔지 모른다는 점이다. 임권수 부장조차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최문경 부회장의 반응을 보면, 그조차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김진석 이사가 권 실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증거였다.

“제3자인 입장에서 권태성 실장님을 지켜보면, 이전이나 앞으로나 딱히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번 에플 인수설이 또다시 초대박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우리 전략 기획실이 간섭한 것이 오히려 최악의 한 수가 됩니다.”

“설마 저보고 이 일을 다 책임지란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시 넌지시 넘어가는 김진석 이사는 바보처럼 안경만 만졌다.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은 그의 태도에 오히려 발끈했다.

“아무리 그래도 에플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김진석 이사가 에플 인수가 대박을 칠 거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래서 더 난감했던 것이다.

사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도 이 문제를 분석하면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란 변수가 에플 인수 문제와 결합하면서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게…….”

김진석 이사는 머뭇거렸다. 실상 이전처럼 이 정보를 나중에 알았다면,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이 몰라서 그랬다고 하고는 권태성 기획실장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다.

지금처럼 권태성 기획실장에게 적당한 훈장만 주고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이번에 에플 인수로 초대박을 칠 것이라 예상하는 겁니까?”

“흠흠.”

“…진짜 어이가 없네요.”

권태성 기획실장은 치를 떨었다. 그는 지금 책임 소재 여부 때문에 김진석 이사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이 문제는 안건민 회장이 직접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이다.

만에 하나라도 반대편에 줄을 섰다가 잘못되면 오성호에서 하차해야 할 일이었다.

“…좋습니다. 저보고 알아서 하란 소리는 잘 알겠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전략 기획실에 새색시처럼 보고하고 말입니다. 근데, 다 좋은데, 절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

대답이 없는 김진석 이사. 딱 이 반응이 바로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최민혁 실장만큼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성 기획실장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 일은 잘하면 본전, 못하면 또 자신이 독박을 써야 했다.

‘그럴 수는 없지.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해!’

* * *

권태성 기획실장도 음모론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략 기획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자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는 에플 인수설에 대한 정보를 한국 언론사에 죄다 흘렸다.

그 정보를 얻은 언론사 중의 하나는 역시 한영 일보였다.

최경진 편집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자신이 최근 ‘에플 인수설’에 대한 온갖 루머를 다 퍼뜨렸지만, 이 정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진짜야?”

최광수 기자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한선 일보 측에서도 이미 확인한 사실입니다. KM 그룹이 에플 인수를 두고 본격적인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게 말이 돼?”

“그런데 KM 전자와 벨린 투자 내에 쌓인 현금 규모만 본다면 전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다른 것을 떠나서 우리 정부가 허락할 것 같아?!”

“그거야…….”

최광수 기자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다만 정부가 굳이 나서서 방해할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기업 간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부가 나설 수 있는 명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회적인 혼란 때문이다.

게다가 KM 전자가 과연 에플을 인수해서 제대로 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만약 이 일이 잘못되면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밑에 4~5급 수준 실무진이 나서서 경고할 수도 있었다.

최경진 편집장은 뒤늦게 회의실에 들어온 범용구 기자를 힐끗 일별한 후에 소리쳤다.

“아니, 우리 정부만이 아니잖아. 미국 정부가 이걸 허락할 리가 있겠어?!”

최광수 기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또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에플의 상황을 보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입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 미국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야, 최광수, 너 정말 생각을 하고서 말하는 거야? 아니, 어떻게 KM 전자가 에플을 인수해서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회의실은 조용했다.

심지어 최경진 편집장의 의견에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인 이도 있었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에플 인수설’ 기사를 써 내기는 했지만 그게 진짜로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흥미로운 이슈였기 때문에 열심히 보도했던 것뿐이었다.

실제로 에플 인수설 이야기가 나온 후에 신문 판매 부수가 무려 20%나 껑충 뛰어올랐다.

최광수 기자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범용구 기자가 ‘왜 쓸데없이 나서서 일을 만드세요?’라고 비웃는 표정을 봤다.

최경진 편집장은 한동안 회의에 참석한 기자를 열심히 갈구었다. 다만 그도 이 안건에 대해서 결론을 내기는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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