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이런 에플의 사정을 뒤늦게 파악한 최용욱 회장은 결국 은퇴를 약속한 후에 찾지 않던 자신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착잡한 얼굴을 한 채 회장실에서 에플과 관련된 보고를 받으면서 인상을 굳혔다. 처음에는 손자 최민혁이 뭔가 생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플의 자세한 현황을 알고 나니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에플을 지금의 수렁에서 건져낼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장 실장, 정말 민혁이가 에플을 회복시킬 수 있는 대안이 있는 건가? 상대는 MS인데, 아무리 봐도 대안이 있을 수가 없잖아.”
“나도 어지간하면 민혁이 그 녀석을 믿고 싶어.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윈도우95라고, 이 친구야, 자네도 윈도우 95의 인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않는가!”
“아무리 민혁이 그 녀석이 뛰어난 머리가 있다고 해도 윈도우95에 대응할 OS를 당장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이건 말도 안 되잖아!”
노인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에플 관련 정보를 확인하자 오히려 최문경 부회장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최용욱 회장과는 달리 장승일 실장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있을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을 상대로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런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내 말은 그 대안이란 게 대체 뭐냐고?!”
“그거야…….”
장승일 실장도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의 실드를 쳐 주려고 해도 최근 실적만 놓고 본다면 에플은 솔직히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비서가 한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최민혁 실장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 * *
최민혁 역시 스티븐의 내한과 에플 인수설로 시끄러운 상황에 혀를 내둘렀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는 더 혼란스러운 양상이었다.
특히 황당한 이는 바로 최문경 부회장이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출판 기념회에 찾아가서 최용욱 회장을 괴롭혔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하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윈도우95의 폭발적인 인기 때문이다.
지금 에플의 매출이 문제가 아니었다.
윈도우95가 빠르게 시장을 쥐면서 에플의 미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바로 에플의 주가였다.
최근 에플 인수설과 관련해서 에플 주가가 주목을 받나 싶었지만 결국 또다시 지하실을 확인하면서 밑으로 계속 추락 중이었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신의 제안 때문에 에플 이사회가 바뀌었다. 서로 아귀처럼 싸우던 에플 이사회가 휴전한 것이다.
에플 이사회가 태도를 바꾸어서 스티븐을 본사로 초대한 것이 그 증거였다.
‘생각보다는 빠른 변화야. 내가 알기로 스티븐과 에플 이사회가 그나마 대화의 물꼬를 터는 것은 적어도 2년 후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대응이 느렸다.
그는 때문에 최용욱 회장의 연락을 받고 나서 KM 그룹 본사를 방문하면서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큰 그림은 정해져 있다.
그런데 첫째 큰아버지와 같은 인물이 계속 깽판을 치는 덕분에 세부 그림이 자꾸 바뀌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일이 바로 최용욱 회장이다.
은퇴를 늘 이야기하던 그가 KM 그룹 회장실로 다시 복귀했던 것이다.
최민혁은 덕분에 회장실로 가면서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KM 그룹 본사를 오가는 사람 중에 최민혁 실장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시선이다.
과거와는 달리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경외와 존경이 가득했다.
또한 에플 인수설은 임직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설사 에플 인수 후에 KM 전자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해도 미국의 대기업을 인수한다는 것 자체가 국내 기업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민혁은 KM 그룹 임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그걸 새삼 느꼈다.
밑의 경비원, 데스크, KM 그룹 임직원. 그들은 직급과 관계없이 한결같이 최민혁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KM 그룹 회장실 앞에 도착해서도 비서의 지극한 환대를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다과는 굳이 최용욱 회장이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고마워요.”
최민혁은 인삼차를 마시면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바로 최용욱 회장이다.
그 옆에는 장승일 실장이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면서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쯧, 할아버지에게 달달 볶였군.’
“할아버지, 보기 좋습니다.”
“그러냐?”
심드렁한 최용욱 회장은 오랜만에 노화를 풀어서인지 그나마 편한 얼굴이었다.
최민혁은 회장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넌지시 툴툴거렸다.
“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건강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최용욱 회장도 이에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에플 인수설에 대한 대응책을 조사한 지금까지의 행동이 허탈하게 느껴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손자 놈은 자신의 감정 따위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지금 이 난리를 피워놓고 할아비에게 할 말이냐?”
“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에플 인수설! 당사자인 네가 모른다고 할 거냐?!”
최민혁은 일단 한 가지 잘못된 점부터 바로 잡았다.
“에플 인수설은 애초에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이냐? 그러면 앞으로 에플이란 기업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냐?”
“제 말은, 에플 인수설 이야기는 우리 쪽에서 먼저 나온 것이 아니란 소리입니다.”
“허, 아니, 그러면 어떤 미친놈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거냐? 설마 한영 일보의 그 멍청한 놈이 또 수작을 부렸다고?”
최민혁은 흥분해서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오른 최용욱 회장을 자제시켰다.
“아마 에플 이사회에서 흘린 정보일 겁니다.”
“아니, 그놈들이 왜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야?”
“스티븐에게서 에플 지분을 인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아마 스티븐은 그 이야기를 에플 이사회 측과 했을 겁니다. 에플 이사회로서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에플 인수 대상자 후보를 늘리는 방법을 썼을 겁니다.”
“…에플 주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불과 요 며칠 사이에 200% 가까이 올랐습니다. 몇억 달러가 오고 갈 큰일입니다.”
“그러냐?”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찌라시의 소스가 에플 이사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최민혁은 오히려 방긋 웃었다.
“전 할아버지가 이렇게 일하시는 모습이 좋네요. 그룹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회장님이 움직여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장 실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장승일 실장은 힐끗 최용욱 회장 눈치를 보면서 뒤로 물러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내심 웃고 말았다. 에플 인수는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스티븐이 끼어들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딱히 나쁜 선택은 아니다. 차라리 금이나 달러로 비축하기보다 에플 지분을 사들이는 것도 IMF 대응책으로 괜찮은 방법이었다.
‘달러나 금은 정부한테서 강제로 내놓으라고 압박을 받을 수 있어. 차라리 지금 시기에 에플 지분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것이 훨씬 나아.’
시기적으로 보면 콜린맥이 출시되는 시점과 IMF 시기가 어느 정도 겹친다. KM 전자 주식 폭등 이후에 제대로 된 대박일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제야 안도한 최용욱 회장을 힐끗 살핀 후에 장승일 실장에게 툴툴거렸다.
“에플 인수설이 그렇게 신경이 쓰이던가요?”
“아무래도 KM 그룹 계열사인 KM 전자의 일입니다. 더욱이 최 실장님이라면 다른 사람과는 달리 에플 인수설을 추진하고도 남을 분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에플이 부활까지는 아니어도 지금 상태만 유지할 수 있다면 주가는 1,000%, 아니, 2,000%씩 껑충 뛸 겁니다. 7억 달러 지분만 확보해도 무려 수십억 달러의 차익을 볼 수 있습니다.”
“하하하.”
최민혁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고 말았다. 장 실장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긴 최용욱 회장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확실히 봤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사람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좀 더 시간을 줄 테니, 이번 일을 가지고 한 번 더 생각을 해보세요.”
그대로 그냥 나가 버린 최민혁.
최용욱 회장은 기가 막혔지만, 손자 최민혁의 행보를 막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놈 꿍꿍이가 뭔지 알 수가 없어.’
* * *
최용욱 회장은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 들어가서도 침묵했다.
사장단 회의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이 나서서 계속 뭐라고 해도 듣지를 않았다.
그는 최민혁이 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다. 도대체 손자 최민혁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린 것은 바로 자신이 넘긴 KM 전자의 지분 가치다.
무려 200배 차익이었다.
아마 타인에게 지분을 넘겨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손자라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배가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1,500원에 넘긴 주식 가치가 무려 300,000원을 넘겼기 때문이다.
‘설마 비관적인 에플 상황도 KM 전자처럼 바꿀 수 있다는 것일까?’
그는 결국 장승일 실장을 다시 불렀다.
“내가 장 실장 추측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주변에서 걱정하는 소리가 너무 커. 에플이 정말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
“솔직히 저도 지금의 에플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이라면 대안이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KM 전자입니다.”
“하지만 KM 전자는 에플보다 상황이 오히려 더 나았어!”
“전 둘 다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래?”
그는 결국 장승일 실장에게서 KM 전자와 관련된 과거 기록을 다시 받아서 살폈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기록이었다.
2조가 넘는 매출액을 올렸으면서도 큰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정말 민혁이 이 녀석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필요한 곳에만 돈을 썼구나.’
곰곰이 KM 전자 프로필을 확인하고서야 어쩌면 에플의 부활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다시 손자 최민혁을 호출했다.
다시 회의실을 찾은 최민혁은 우선 에플 인수설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가볍게 한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올해 PC 시장 매출이 작년 대비 25% 가까이 증가한 사실은 아십니까?”
“…에플 PC의 매출이 작년과 비교하면 20% 가까이 증가한 것을 말하고 싶은 거냐? 하지만 에플 전체 매출은 계속 줄고 있다.”
“그건 에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따라서 에플 내부 구조가 변한다면 어느 정도 극복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게 되었다면 왜 에플 이사회가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겠느냐?”
“네, 사실 그들이 무능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 배후에 있는 에플 투자자가 바보가 아닌데, 에플 이사회를 계속 보고만 있겠습니까? 언젠간 갈아 치울 겁니다.”
“네 이야기가 맞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용욱 회장의 에플에 대한 신랄한 평가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에플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 계속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당장 에플 파워북 5300 모델에서 배터리 결함이 있다는 소문이 나와. 이것만 봐도 에플은 이미 초심을 잃었다.”
“아, 파워북 5300이라, 흠.”
최민혁은 인생 1회 차에서 해당 모델의 충전 과정에 배터리가 타버려서 리콜한 기억을 떠올렸다. 의외로 최용욱 회장의 안목이 죽지는 않았다.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고작 천 대가 팔린 제품입니다. 그거 다 리콜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이니, 큰 이슈는 아닙니다.”
따박따박 대답하는 손자 최민혁의 행동에 최용욱 회장도 혀를 찼다.
그는 뒤늦게야 에플 인수설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정말 에플을 인수할 셈이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애초에 에플 인수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에플 인수가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더욱이 굳이 KM 전자를 통해서 수출하기보다는 미국에 에플이라는 KM 전자 베이스 기지를 설치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