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하지만 이렇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줄은 몰랐다.
‘쉽지 않아. 비자금 흔적을 찾아서 압박하면, 자금 출처의 배후 흔적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또 다르네.’
그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묘한 눈으로 깊은 사색에 잠긴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도 처음에는 단순한 최문경 부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민혁 행보를 보면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해외 법인을 통한 자금 세탁 과정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간에 법인을 청산해 버리면, 그쪽 나라에서도 대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아직 테러와 같은 사태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각 국가가 자금 이동에 대해서 그렇게 엄격한 편은 아니다.
물론 테러 자금이 명확하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
한국과 무역을 하는 각국에서 사소한 문제로 이를 들여다보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검찰 조직이라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문경 부회장이 그런 맹점을 절묘하게 잘 이용한 것이다.
아니, 다른 대기업도 이와 같은 수법을 응용한다는 것이 정확하다.
박두영 부장검사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이 부분은 손대기 어려웠다.
“혹시 노리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습니까?”
“제가 그걸 알면 이렇게 문제를 복잡하게 처리하지 않았을 겁니다.”
“네?”
그로서는 예상도 못 한 대답이다.
최민혁의 첫인상은 재벌 3세 양아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덧 자신도 함부로 하기 힘든 거물이 되었다.
그런 최민혁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최민혁은 박두영 부장검사의 따가운 시선에 피식 웃고 말았다.
“다만 그들이 우리 첫째 큰아버지와 엮여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이 꿍쳐놓은 것을 하나둘씩 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모릅니다.”
“네? 최 실장님이 모르는 것도 있습니까?”
최민혁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실…….”
‘와컴 지분 인수 일도 따지고 보면, 그들과 싸우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입니다’란 말까지는 굳이 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마트폰의 기반 기술을 얻은 것 자체가 하나의 연장선이다.
‘그들을 견제할 동맹도 필요해. 역시 스티븐이 괜찮은 파트너이기는 하지만 워낙에 신중한 사람이라서 협상이 쉽지는 않을 거야.’
자신이 에플에서 빼돌린 기술이나 연구원은 별개로 말이다.
최민혁도 박두영 부장검사가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지만, 굳이 이 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잘 살펴보세요. 어쩌면 월척이 걸릴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여전히 깊은 번민에 가득한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최근 최민혁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주변 시선을 최민혁은 크게 생각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늘 입만 열면 조용히 살고 싶다고 말을 하지만 그 말도 믿기가 어려워. 도대체 최 실장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어.’
최민혁은 의혹 섞인 박두영 부장검사의 시선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와컴 지분의 인수는 이전과는 다른 행보였어. 이제 서서히 반격이 시작될 거야. 아무래도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어.’
* * *
근육은 서로 상대적인 형태로 각 운동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발전한다.
스탠딩 바벨에서는 이두근이 주를 이루고, 삼두근이 대응된다.
라잉 트라이셉스 익스텐션 시에는 두 근육이 서로 반대가 된다.
따라서 신체 전반적으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훈련을 해야 한다.
인생 1회차에서 최민혁의 몸은 볼품이 없는 일반인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서 인생 2회차에서는 시간이 날 때면 꾸준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
따라서 전문 보디빌더와 같은 근육질의 몸은 아니지만, 신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근육을 만들었다.
“후유.”
최민혁은 벤치 프레스로 단련된 가슴 근육이 요동치는 모습에 꽤 만족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기구를 정리하는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어때요?”
“좋습니다.”
“어, 그게 다입니까?”
사실 최민혁에게 운동을 권한 것은 김명준 과장이었다. 그는 처음에 호신용 무술을 일부 가르쳤고, 여기에는 헬스도 포함됐다.
그런데 최민혁은 그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고, 지금은 전문 보디빌더 못지않을 정도로 운동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몸은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였다.
그는 그 흔한 여자 한 명 만나지 않는 최민혁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지금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헬스 하는 재미로 살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라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사귀는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여자는 아직 제 여유가 안 됩니다.”
최민혁은 자신의 단련된 가슴의 대흉근과, 소흉근에 힘을 줬다.
두 근육은 어깨 위의 승모근에 영향을 받아서 복근에도 압력을 줬다.
복직근은 강철 같은 탄탄함을 보였다.
남자가 봐도 아름다운 몸이다.
김명준 과장이 자신이 조언한 결과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예상치를 아득히 넘어섰다. 일, 식사, 밥, 일, 식사, 밥을 반복하는 최민혁의 일정 덕분이다.
여전히 따가운 김명준 과장의 시선에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정색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김명준 과장은 몸을 움찔 떨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최민혁은 마치 김명준 과장의 내심을 안 것처럼 툴툴거렸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와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겨우 이 시점에서 자만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겨우 같은 출발선에 선 것뿐입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대응책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성 전자 같은 세력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죠. 그러니 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IMF 3년 후까지는 그래야 합니다.’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그의 푸념과는 달리 최민혁은 지금이 최고로 행복했다. 인생 1회차의 지옥을 살아봤기에 이렇게 건강한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더욱이 육체가 좋아지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다양한 아이디어였다.
와컴 인수 때문에 지금도 시끌시끌한 스마트 펜 이야기는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최민혁은 덕분에 기획 팀에서 올려주는 사소한 보고도 그냥 놓치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에게 와컴 사태 이후에 주변에서 다른 움직임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세요. 이제는 그저 지켜만 보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 * *
기획 팀 박광민 사원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들떴다.
와컴 지분 인수 이후에 KM 전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가족이다.
“광민아, 여기 한번 봐.”
어머니가 내놓은 것은 여자 사진이었다. 그것도 20장이 넘는 사진이었다. 중매가 계속해서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엄마도 참, 난 여자 만나기 싫다니까.”
“이것아, 정신 좀 차려.”
하지만 박광민은 당장은 굳이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 가 있는 강준석 대리 때문이다. 비록 정성근 대리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그가 보고한 최근 보고서의 내용은 절대 가볍지가 않았다.
보고서 건 이후로 팀 내에 강준석 대리의 조기 승진에 대한 불만이 쑥 들어갔다.
안 그래도 잘나가는 KM 전자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박광민은 솔직히 위기감을 느꼈다. 강준석 같은 이가 또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젠장.’
요즘은 늘 자정까지 회사에서 일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일이 많은 것도 한 원인이기는 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대폭 받은 덕분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 외에 다른 자료를 살폈다. 강준석이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조성근 팀장이 회의를 소집했다.
박광민은 자기 일과 수첩을 챙긴 채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회의실이 시끄러웠다.
그 조용한 이영란 대리가 일어나서 회의실 한쪽에 가서 뭔가를 구경하는 중이다.
임웅 대리나, 이정원 과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박광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상기 차장에게 갔다.
박상기 차장은 몰려온 기획 팀원들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면서 툴툴거렸다.
“자자, 그렇게 서두르지 좀 마.”
그가 나누어준 것은 KMP-01이었다.
‘아닌가?’
좀 달랐다.
하단에 있는 버튼이 사라졌고, 측면에 있는 LCD도 없어졌다.
그냥 카드 다섯 장을 겹쳐 놓은 듯한 모양의 사각형 물건이었다.
중앙에 달린 것은 뜻밖에도 LCD였다.
2.7인치로 꽤 작았는데, 디자인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KMP-01과 차이점이 있다면 옆에 달려 있는 검은색 펜이었다. 일반 펜과 비교하면 반 정도 크기에 두께도 얇았다.
아니, 일반 펜과는 달리 형태가 비슷했다.
‘미니 연필이네. 아, 아닌가.’
박광민 사원은 박상기 차장에게 받은 샘플을 들고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때마침 조성돈 팀장이 들어왔고, 그 모습을 보았다.
“오늘 회의는 이 물건 때문입니다.”
간단한 설명.
딱 그것이 다였다.
박광민 사원은 자기 자리에 앉은 채 힐끗 배종대 과장을 쳐다보았다.
배종대 과장은 설명이 없이도 전원 버튼을 눌러서 기기를 동작시켰다.
부팅과 동시에 화면을 차지한 것은 역시 ‘KM 전자’ 로고였다.
그는 잠시 기기가 동작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부팅이 끝나고 화면을 채운 것은 노래 목차 리스트였다. 마치 PC에 있는 MP3 플레이어를 줄여놓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화면을 눌렀는데, 노래 리스트가 정교한 시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아래위로 움직였다.
“어?!”
깜짝 놀란 박광민 사원은 습관적으로 파일을 눌렀다.
뜻밖에도 소리가 났다.
기기 박스에 놓인 이어잭에서.
“선이 없는데…….”
박광민은 반사적으로 박스 안에 있던 무선 이어잭을 귀에 꽂았다. 놀랍게도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
그는 깜짝 놀라서 다시 기기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조성돈 팀장은 그 모습을 아빠 미소로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손가락으로 위로 움직이면 다른 응용 애플이 생길 거야.”
“아, 네.”
박광민은 손가락 두 개로 화면을 누른 채 위로 올려 보았다. 음악 플레이 화면이 뒤로 밀리면서 나타난 것은 5가지 아이콘이 배치된 화면이다.
그중에 한 개는 바로 MP3 플레이어였다. 다른 것은 계산기, 메모, 시계, 게임 아이콘이었다.
“…….”
입을 딱 벌린 박광민 사원은 이번에 메모를 눌러보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단색의 쪽지 메모였다.
그도 차세대 모델 기획안을 봤기에 이와 유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결과물이 벌써 나왔는지 몰랐다.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알다시피 이 KMP-02에 적용된 LCD는 IPS LCD입니다. 그런데 아직 정식으로 납품 계약이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어둠의 통로를 통해서 샘플을 받는 것이다.
김호동 교수가 큰 역할을 했는데, 오성 전자나 LC 전자 역시 켕기는 것이 있어서 적당히 그의 제안을 들어주었다.
외주 업체를 통해서 들어온 IPS LCD는 아직 양산품이 아니라 시제품이었다.
정확히는 시제품 전 단계로 개발 막바지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전자펜은 당연히 와컴의 기술이다. 와컴의 원천 기술을 이용해서 이번에 적용했다.
이 부분은 최병연 이사가 주도해서 진행한 결과물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이런 프로세스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기획 팀이 먼저 기획한 결과로 시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일이 거꾸로입니다.”
“어쩔 수 없잖아. 당장 비슷한 결과물도 없는데, 일단 형태는 봐야지.”
“팀장님도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