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20화 (420/1,021)

#420.

김동욱 국장은 불과 지난달에 고성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번 금감원 개편 덕분에 거시 건전성 감독국 국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승진이었다.

‘금감원 내부에도 무슨 일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는 인터뷰를 반드시 하기 위해서라도 자료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런데 마침 범용구 기자가 나타나서 당장 회의실로 모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범 기자님, 설, 설마 지난 ARN 지분 사태 기사 때문입니까?”

범용구 기자는 혀를 찼다.

“제가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최 실장이 대충 상황을 넘기는 것 같아도 자신의 눈 밖에 난 이들에 대해서는 단호하다고!”

“하, 하지만 ARN 지분 인수 문제라면 이미 최민혁 실장이 없던 일로 묻겠다고 공언했지 않습니까?”

“다른 언론사는 그런데 우리 한영 일보는 예외라고 합니다.”

딱 이 말이면 충분했다.

최광수 기자는 최민혁 실장이 한영 일보를 찍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 큰일 났다!’

그는 다시 짐을 자리에 놓고는 회의실에 들어갔다.

* * *

갑자기 모인 한영 일보 기자들 때문에 회의실은 어수선했다.

다들 이미 왜 모였는지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최민혁 실장’ 이야기만 계속 나왔다.

물론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최 실장이 얼마나 독한 인간인데, 그 일을 그냥 넘어가겠어.]

[적당히 좀 했어야지. 최 실장이 자신을 상대로 욕을 한 언론사를 그냥 두겠어?]

[결국, 누구 한 명이 희생양이 되는구나.]

[역시 최경진 편집장이겠지? 그 양반이 간혹 무리수를 많이 두잖아. 이동수 부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헛짓을 한 거야.]

뜻밖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경진 편집장은 평소에는 자신이 무슨 정보 장교인 것처럼 큰소리치지만, 위기 상황을 마주하면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동수 부사장이 최경진 편집장보다 입 가벼운 것으로 치면, 한 수 더 위라는 것이었다.

[아, 그래서 오늘 이동수 부사장이 유럽으로 출장을 떠났구나.]

[헉, 그거 정말입니까?]

[최 비서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이동수 부사장 출장 준비물을 챙기던데, 잔소리를 많이 하더라고요.]

[책임질 일이 아니면 하지를 말든지, 아니면 만약을 대비해서 뭔가 준비를 하든지 해야 할 텐데, 감당 못 할 문제 때문에 도망만 가다니.]

[…….]

최광수 기자는 돌아가는 사태에 헛웃음을 터뜨린 채 조용히 자리만 지켰다. 아니, 그는 범용구 기자가 준비해 온 자료를 보자 오히려 이 내용에 집중했다.

그도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곧 안색을 굳힌 채 묵묵히 자료를 끝까지 일독했다.

“…이, 이거 정말입니까?”

범용구 기자는 회의실에 자료를 다 돌린 후에 최광수 기자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네. 그나마 최 실장이 협상안을 내놓은 것이 바로 그 자료입니다.”

“…이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긴 일본 기업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는 일인데, 그럴 수도 있죠.”

푸념을 털어놓은 범용구 기자는 사실 와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건 공황 상태에 빠져서 뒤늦게 회의실로 들어온 최경진 편집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대략 자료를 알기는 했지만,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서 세세한 것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광수 기자가 이 일에 전문가였다.

“최 기자, 그 계획이 가능성이 있어?”

최광수 기자는 그제야 안도했다. 최민혁의 보복을 피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 일이 꼭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최 편집장은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어.’

“전혀 아니라고 말 못 하겠습니다. 이 자료대로라면 와컴의 원천 기술도 별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무슨 펜 기술이라고 나오던데, 그 분야가 그렇게 가능성이 있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 전자 펜 분야의 독보적인 회사가 바로 와컴입니다.”

와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회의에 참석한 다른 이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최광수 기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최광수가 이야기해도 다들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와컴이란 기업에 대해서 아는 이들도 있지만 정확한 정보는 모르고 있었다.

결국 최광수 기자는 사무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와컴과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챙겨 왔다. 주로 와컴 기업이 어떤 기업이고, 앞으로 어느 정도 미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자료다.

그는 그 자료를 범용구 기자와 같이 복사해서 다시 나누어줬다.

그 안에는 와컴이 이제까지 낸 원천 기술 목차가 꽤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일본 기업을 조사하면서 빼놓을 수가 없는 기업 중의 하나가 와컴이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최경진 편집장조차 추가된 자료를 보고서야 와컴이 가진 영향력을 겨우 파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자 펜 하나에만 집착한 기업이 바로 와컴이었다.

그것도 무려 1985년부터 이 바닥에 회사 역량을 집중해 왔다.

그러니 세상 그 어떤 기업도 전자 펜 분야에서는 와컴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봐, 최 기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듣게 설명해 줄 수 없어?”

“여기 특허 목차를 잘 보면 알겠지만, 이 특허가 기존의 와컴 특허 연장선이 부분이 많습니다. 비록 KM 전자는 와컴 특허를 이용할 수 없지만 막아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최광수 기자는 몇 번이나 알아듣게 설명했지만, 이해를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니, 이해한 이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결국 회의실이 가득한 기자 옆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회의실 단상으로 끌어와서 핵심 자료를 정리해서 기록했다.

주로 와컴이 가진 원천 기술 특허를 정리해서 좌측에 기록했다.

가지를 쭉 이어서 와컴이 이제까지 추가로 낸 특허를 다시 써넣었다.

그다음에는 붉은색으로 KM 전자가 낸 특허 중에 핵심이 되는 것을 정리해서 기록했다.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부분만을 기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약간의 오차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와컴 원천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와 KM 전자가 고안한 특허가 이 기술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카테고리가 하나씩 만들어지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KM 전자가 출원한 특허가 와컴의 미래 비전을 다 막아버렸다.

스킬 트리 중간마다 중요한 통로 곳곳을 막고 있는 것은 KM 전자의 스마트 펜 특허였던 것이다.

그걸 가장 알아본 범용구 기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거 저래도 됩니까?”

“…상관은 없습니다. 딱히 불법은 아니니까. 아이디어 특허도 특허입니다. 더욱이 단순히 그냥 아이디어가 아니라 구현된 것도 있습니다. 모양이 부실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최광수 기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자신이 만든 기술 테크 트리를 보면서 새삼 감탄했다.

“이 테크 트리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와컴이 대안이 없다면 앞으로 전자 펜 관련 기술 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최경진 편집장은 경제 전문 통은 아니어도 눈에 딱 보이는 테크 트리에 혀를 내둘렀다. 최민혁 실장이 뭘 원하는지 금방 깨달은 것이다.

‘와컴을 말려 죽이려는 거구나. 독한 새끼.’

그리고 최민혁이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한국 언론이 아니라 일본 언론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특허 요건을 충족하기 위함이다. 딱히 한영 일보에게는 큰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 내의 자기 채널을 이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이번 일만 지시에 따른다면 더 협박이나 강요는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인 기자를 상대로 한 사람씩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아사히 신문 쪽에 연락해 봐. 뭘 해야 할 지는 내가 설명 안 해도 되겠지. 잘 모르겠으면, 최광수 기자가 도움을 요청해!”

“…알겠습니다.”

최광수 기자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최민혁 보복 문제를 가까스로 피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최 민혁 실장은 정말 무섭구나. 설마 이런 식으로 멀쩡한 기업의 숨통을 쪼이다니.’

* * *

아사히 신문은 발행 부수로 보면, 요미우리 신문에 이어서 일본 내에서 2위다. 성향 자체는 한영 일보와는 좀 다른 면이 있다.

다만 아사히 신문이 한국의 입장을 그나마 잘 대변해 준다.

따라서 아사히 신문은 한국의 한영 일보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로 소통 채널이 있다는 점이다.

한영 일보의 제안을 아사히 신문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와컴 관련 KM 전자의 특허는 그들도 무시하기 어렵다.

아사히 신문이 한국의 입장을 잘 대변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자국 기업이 한국 기업에 당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아사히 신문은 와컴이 처한 상황을 돕기 위해서 한영 일보가 내놓은 자료를 가지고 스마트 펜 특허를 기사화했다.

[위기의 와컴!]

[펜 관련 원천 기술로 독점적인 시장 직위를 유지하던 와컴이 KM 전자에게 뒤통수를 맞다!]

[안주한 와컴의 미래는 우리 일본의 잃어버린 경제의 자화상일까!]

그리고 이 일은 최민혁이 딱 원하는 방향이었다. 그는 기꺼이 아사히 신문 쪽에 큼직한 콜린스와 KMP-01 광고를 넣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 기사 내용의 본질이 뭔지 몰랐다.

와컴 기업을 아는 이들조차 ‘아, 그냥 특이한 전자 펜인가’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와컴 입장은 좀 달랐다.

특히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갑작스러운 아사히 신문의 ‘위기의 와컴’ 기사에 경악했다. 그는 아사히 신문 기사를 보기가 무섭게 전자 시스템 총괄을 담당한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를 찾아갔다.

“크, 큰일 났습니다!”

아사히 신문이 호들갑을 떤 덕분에 이미 따로 연락을 받은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얼마 전에 최민혁 실장이 일본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KM 전자를 무시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그냥 없던 일로 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나도 소식 들었어. 호들갑은 그만 떨어.”

이번 사태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파악한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하, 하지만 상황이 생각한 것보다는 더 심각합니다!”

“안다니까!”

버럭 화를 낸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안색을 굳힌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불과 지난 얼마 전에 병원에 입원한 히타치 공작소의 시가 마사아키 박사를 찾아간 기억을 떠올렸다.

대학 3년 선배인 시가 마사아키 박사의 처지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병신 같은 놈들.’

들어 보면 히타치 공작소의 황당한 결정이 사태를 만든 한 원인이었다. 만약 히타치 공작소가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KM 전자보다 먼저 IPS LCD 특허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가 마사아키 박사가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병실에 누워 있는 시가 마사아키 박사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당시만 해도 KM 전자를 얕잡아 봤다. 그런데 자신 앞에 놓은 기사와 자료를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와컴 이사회다. 그 자신은 고인물 핵심 인사다. 당시 자신은 KM 전자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뜻을 고수했다.

와컴 이사회 중에 이를 반대한 이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동 성향의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다.

당시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일단 순순히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협상이 깨진 것을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비겁한 조센징!”

“어, 어떻게 할까요?”

이전과는 달리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 눈치만 봤다. KM 전자와의 협상이 틀어진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사다 수석 부장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분노가 치미는 것을 쉽게 참지 못했다.

“항의를 해야 할 거고, 법적인 검토를 해야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 역시 다양한 전문가 쪽에 연락을 해봤다. 하지만 상황이 그가 상상한 것을 가볍게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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