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19화 (419/1,021)

#419.

조성돈 팀장은 내키지 않았지만, 최민혁 지시에 따라서 한영 일보 범용구 기자를 만나서 조용히 지난 일을 언급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한영 일보가 했던 행동은 그쪽에서 더 잘 알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최 실장님은 반드시 짚고 넘어갈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범용구 기자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항의를 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일은 조용히 덮고 넘어가는 것으로 최 실장님이 언급했습니다만.]

[하지만 한영 일보의 지난 행보는 다른 언론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든 기업이 똘똘 뭉쳐서 KM 전자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KM 전자가 가지고 있는 특허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다른 언론사도 이들 대기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만 한영 일보가 다른 언론사와 차이점이 있다면 박쥐같이 행동했다는 점이다.

[한영 일보 행동은 보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대로 그 일을 넘긴다면 다른 언론사도 똑같이 행동할 테니까. 최 실장님이 그 부분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게 다였다.

조성돈 팀장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푸념을 털어놓고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범용구 기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자기 할 말만 하고 조용히 떠나는 조성돈 팀장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급히 한영 일보 본사로 돌아와서 가장 친밀한 최광수 기자에게 이야기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그는 솔직히 최광수 기자의 행동 때문에 할 말이 많았지만, 굳이 지난 일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네?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까?”

최광수 기자는 범용구 기자의 시선을 슬쩍 피한 채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툴툴거렸다.

“아니, 최민혁 실장이 원래 당하고는 못 사는 사람 아닙니까. 그때 상황을 잘 보면 우리 한영 일보를 딱 찍은 것 같았습니다.”

“본보기란 말입니까?”

“그렇죠. 그게 딱 맞는 이야기일 겁니다. 안 그러면 다른 언론사는 여전히 최민혁 실장을 호구로 볼 테니, 희생양이 필요할 겁니다.”

“흠.”

범용구 기자는 잠시 최광수 기자를 쳐다보았다. 당시 최광수 기자는 최경진 편집장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낭비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ARN CPU는 아직 제대로 된 검증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회사 지분을 굳이 매입할 필요가 있습니까? 콜린스 성공에 취해서 사기라도 당한 것 아닙니까?!

최광수 기자도 뒤늦게 지난 일을 떠올리고는 슬쩍 입을 다물었다. 당시 최민혁이 자신을 씹어 먹을 듯이 쳐다본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범용구 기자는 돌아가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일에 참여한 다른 기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지시를 받은 대로 행동했다고 툴툴거렸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 그런 변명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 * *

범용구 기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자 최경진 편집장실에 가서 이 안건을 보고했다.

“조성돈 팀장을 만났는데, 지난 ARN 지분 인수 시에 KM 전자를 일방적으로 공격한 문제에 관한 책임을 묻겠다고 했습니다.”

“빌어먹을.”

최경진 편집장은 툴툴거리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한 대 맞으면 열 대로 보복해야 속이 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추후 반드시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범용구 기자의 말에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당시 다른 언론사는 다 같이 한통속으로 움직였지만, 한영 일보가 조금 달리 움직인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 일에 대해서 불문을 붙인다는 이야기에 안도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 김진석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최민혁 협박 사태에 대해 언급을 했다.

[최 편집장님, 죄송합니다.]

이제 막 이사를 단 김진석 이사는 시작부터 저자세를 보였다. 보통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 직원, 그것도 이사 직급이라면 도저히 보이기 힘든 태도였다.

하지만 이건 말투가 그런 것뿐이다. 업무 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라면 이번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김 이사님, 정말 이럴 겁니까. 지난 일도 김 이사님이 우리 쪽에 지시를 한 것 아닙니까. 문제가 되면 그쪽에서 나서주기로 했지 않습니까. 설마 최 실장이 이런 사실을 알기를 원하는 겁니까?!]

하지만 김진석 이사는 지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 김 이사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최 편집장님은 개인 욕심 때문에 오버한 것 아닙니까.]

[……?!]

최경진 편집장은 김진석 이사가 오리발을 내밀자 등에 소름이 쫙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설마 IPS LCD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그러면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합시다.]

실제로 IPS LCD 문제는 오성 전자 기획실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 기획실이 직접 다루는 레벨로 파이가 커져 버렸다.

오성 연구원을 갈아서 나온 IPS LCD 시제품을 본 전략 기획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아직은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PDP 패널보다 장점이 많았다.

IPS LCD 상업화에 완전히 성공한다면 PDP 패널 사업부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오성 전자는 IPS LCD 패널 연구에 속도 조절을 하기 힘들었다.

바로 LC 전자 때문이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KM 그룹을 압박하면서도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이 IPS LCD 때문에 최민혁 실장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중에 최민혁 이사가 지난 일을 걸고넘어졌으니.

김진석 이사는 이 미묘한 시기에 그 내용을 한영 일보 최경진 편집장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오늘 오후에 미국 출장이 잡혀 있습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그때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

일방적으로 뚝 끊어진 전화에 최경진 편집장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김진석 이사는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따가운 범용구 기자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위기감이 더해지자 그의 안색은 마치 중병 환자처럼 새파랗게 변했다. 이동수 부사장 비서에게 허겁지겁 전화를 걸었다.

[부사장님은 조금 전에 막 유럽으로 출장을 떠나서 3주 후에나 복귀합니다.]

[저, 정말이야?]

[네. 급한 일이 있다고 독일 쪽으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기에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유럽으로 떠나?!]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최경진 편집장은 이동수 부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런데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동수 부사장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제기랄, 씨발, 이 개새끼가!’

그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똥 마른 강아지처럼 편집장실을 오락가락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동수 부사장이 다른 채널 통해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책임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아예 연락을 받지 않으면 그뿐이다. 자신은 모른다고 하면 다른 수단이 없으니까.

결국 그렇게 된다면 그 일에 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단지 한영 일보 광고만 조져도 타격이 커질 수밖에 없다.

‘KM 전자 광고만 문제가 아냐. 최 실장이라면 오성 전자, LC 전자, 필요하다면 KM 그룹, 심지어 DL 그룹에까지 압박을 넣을 수 있어. 그 작자들이야 최 실장과 비지니스 협상 때문에 지시를 따를 거야. 그러면 내가 몽땅 다 뒤집어쓰잖아. 어떻게 하지?!’

딱 보니 이동수 부사장이 자기를 희생양 삼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지난 일도 최경진 편집장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라고 해버리면 한영 일보는 더 피해 볼 일도 없다.

실제로 자신이 그 일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이동수 부사장에게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인데, 증거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의 눈에 마침 들어온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범용구 기자다.

눈치가 빠른 범용구 기자는 자칫하면 자신도 최경진 편집장과 같이 갈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이 사태가 외부에 알려지면 다른 언론사 이직도 어렵게 된다.

범용구 기자는 눈알을 굴리면서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최경진 편집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범 기자,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했지?”

범용구 기자도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 KM 전자의 조성돈 팀장이 한 가지 제안을 들어주기만 하면 지난 일을 확실히 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피가 마른 최경진 편집장은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야, 범 기자 이 새끼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죄송합니다.”

“너 지금 나 놀리려고 그런 거야?!!”

“저,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놀라서 흥분했을 뿐입니다.”

“지랄 같은 소리 마. 야, 당장 정리한 파일이나 내놔 봐!!!”

초조한 최경진 편집장은 범용구 기자에게 받은 자료를 받아서 쭉 읽어봤다. 그의 눈은 동그랗게 커지고 말았다. 생각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가서 경제 파트, 일본 파트와 관련이 있는 애들 전부 다 회의실로 불러와!”

“아, 알겠습니다.”

범용구 기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최경진 편집장은 자료를 읽으면서 이걸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그는 이보다 최민혁 실장의 수법에 치를 떨었다.

‘최 실장, 이 인간이 이젠 일본 와컴까지 대놓고 건드리는구나. 가만 그런데 와컴은 왜 건드리는 걸까. 영문을 모르…….’

* * *

최광수 기자는 범용구 기자가 언급한 말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혹시 ARN 지분 사태 때에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자신도 최민혁 실장의 보복 대상자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의 머릿속은 시간이 갈수록 복잡했다.

안 그래도 최근 풀리지 않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일어난 정부 조직 개편 문제인데, 한국은행,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을 비롯한 조직의 통폐합 때문이었다.

바로 금감원의 탄생이다.

이번 정부 개편안의 입법화와 관련해서 관련 조직은 전부 다 반발했다.

특히 증권 감독원과 보험 감독원 노조가 무기한 밤샘 농성을 벌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반발을 전혀 예상을 못 한 것일까? 갑자기 정부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네.’

황당한 것은 각 조직의 강력한 반발에도 증권, 은행 두 가지 조직은 이미 개편이 이루어졌다.

비록 절름발이 형태라서 큰 힘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일은 아니었다.

한국은행 노조가 어제 강력 투쟁을 선포하면서 갈등이 극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국은행 실무진 몇 사람이 횡령 혐의로 구속된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검찰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황당한 것은 한국은행 담당자 역시 이상할 정도로 침묵했다.

‘도대체 뭘 하는 걸까? 그리고 이 사태가 KM 그룹 때문이라는 설은 또 뭐지. 설마 최민혁 실장이 관련된 것일까?’

최광수 기자는 충분히 최민혁 실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KM 전자가 최근 보이고 있는 이상한 행동 때문이다.

KM 전자는 버는 돈을 족족 전부 다 달러나 금으로 회사 금고에 쌓아 두고 있다. 심지어 유럽이나 미국 지사 쪽은 아예 국내 쪽으로 돈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냥 달러로 회사 금고에 넣어서 짱 박아두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KM 그룹은 무리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입방아에 올랐다.

거기에 KM 전자가 LCD 사업에 뛰어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시선을 끌었다.

최광수 기자는 분명히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 최민혁 실장이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야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때문에 비록 절름발이라고 해도 이미 만들어진 금감원의 거시 건전성 감독국 국장인 김동욱을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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