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
새삼 자신의 처지가 황당하기만 했다.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와컴을 압박한다는 것일까?’
새삼 와컴과 관련된 보고서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최근에 와서 와컴을 상대로 갑질한 기업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 * *
최민혁 역시 와컴이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다른 기업과는 달리 와컴은 원천 기술도 있고, 일본 시장을 독점했다. 심지어 해외 시장에서도 요즘 그 범위를 넓혔다.
기술 독과점 형태라서 다른 어떤 기업도 와컴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와컴은 자본이나 외압으로 두들겨 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치 KM 전자처럼.
KM 전자는 비록 최용욱 회장이 외압에 대응하는 방패가 되기는 하지만 거기에 더불어 외압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것은 원천 기술 기업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대기업조차 KM 전자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결국 기술뿐인가?’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기술에는 기술로 대응하면 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와컴이 스마트 펜 관련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모든 기술을 전부 다 가진 것은 아니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알고 있었던 스마트 펜 관련 원천 기술에 대한 기준을 잡은 후에 하나씩 그 기술을 리스트화했다.
관련 기술이 전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상 작용이 이때는 크게 적용했다.
최민혁은 자신이 기억하는 와컴 핵심 원천 기술을 토대로 해서 리스트 화한 기술 목차를 하나씩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좌표화, 도트 프린팅 구현을 위한 렌더링 알고리즘, 샘플링 인식 기술, 전자 노트 작성, 디지타이저 기능으로 나눈 카테고리에 따라서 이 아이디어를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리스트 물량은 꽤 많았다.
카테고리를 기준으로 아이디어를 채우다 보니, 그 물량이 무려 500건을 넘어갔다.
‘실무진에서 이걸 토대로 메꿔 나가면 더 많은 양이 만들어지겠지.’
이 아이디어는 인생 1회차에서도 핵심 특허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해전술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물량이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곧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이 특허 출원 비용을 계산하면서 내심 혀를 찼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자신이 와컴과 무슨 원수지간은 아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와컴을 괴롭혀야 되냐 싶었지만, 곧 마음을 다졌다.
KM 전자가 힘이 없다고 비슷하게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오성 전자가 주로 써먹는 수법인데…….’
최민혁은 이 방식이 새삼 큰아버지인 최문경 부회장이 인생 1회차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자 왠지 자신의 행동이 최문경 부회장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곧 미련을 떨쳐 버렸다. 어차피 와컴이 저렇게 건방진 태도를 보였으니, 차라리 이번에 밟아주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는 오혜정 비서를 불렀다.
“각 부서에 연락해서 임시 회의를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 * *
오랜만에 열린 임시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런 식으로 긴급하게 회의를 개최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다들 조성돈 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최병연 이사 역시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피로에 절어 있는 조창호 차장이 최병연 이사를 못살게 굴었다.
“생각보다는 일이 좀 많아서 힘드네요.”
툴툴거리는 그의 입은 금붕어처럼 툭 삐져나왔다.
하지만 최병연 이사는 조창호 차장의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차세대 MP3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자잘한 프로젝트가 병행해서 진행되면서 가장 로드가 많이 걸린 사람 중의 하나가 조창호 차장이었다.
특히 터치 컨트롤러는 새롭게 만들어진 개념이라서 삽질한다고 고생이 많았다.
그나마 최민혁 실장이 큰 줄기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더 고생했을 것이다.
임기석 부장 역시 최근 KM 전자와 관련된 특허를 정리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단순히 특허를 출원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방어 특허도 출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사람을 알음알음 늘렸지만 늘어나는 일거리를 감당하지 못했다.
“조 팀장님, 최근 일본에 갔다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와컴과 협상하기 위해서 자리를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2시간 정도 미팅한 후에 협의 자체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와컴 측에서는 아예 협상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와컴이라…….”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임기석 부장은 ‘와컴’ 이름만으로 어떤 회사인지 금방 깨달았다. 그는 최근 팀 내에서 조사했던 와컴 관련 내용을 떠올렸다.
‘하긴 전자 펜은 우리 회사 관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하지만 와컴은 다른 한국 대기업에서도 관심을 뒀지만 협상이 실패했어.’
특히 오성 전자나 LC 전자 이미 와컴과 몇 번 과거에 협상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결과는 KM 전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두 대기업은 더 심한 차별을 당했다.
와컴은 일본 대기업에도 할 말 다하는 기업인데, 한국 대기업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진 안부 이사와 비슷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회의가 소집되었는지 벌써 깨달은 것이었다.
다만 디자인 팀 강선주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최민혁 실장이 회의실에 나타났다.
분위기가 팍 바뀌었다.
임직원들은 최근 언론이나 입소문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지켜봤다.
그런 최민혁 실장을 직접 보게 되자 회의실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최민혁은 회의실 테이블에 엉덩이 한쪽을 걸친 채 회의 참석자 표정을 살폈다. 굳이 자신이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 비서!”
오혜정 비서가 다른 비서 두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들고 있는 보고서 내용을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었다.
최민혁은 그 모습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 보고 있는 보고서는 아이디어를 대략 정리한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토대로 해서 각자 특허를 작성하면 됩니다.”
“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민혁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와컴과 협상을 한 소식은 이미 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 와컴과의 계약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협상을 다시 이어간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와컴 이사회는 진짜 썩은 고인물이니까. 따라서 이번에는 대화로 해결하기보다 회초리를 들기로 했습니다.”
“…….?”
다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 이야기는 주어, 목적어도 다 빠졌고, 남은 것은 동사뿐이었다.
그들은 보고서를 살피고서야 다들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적어도 다들 팀장급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물답게 최민혁이 내놓은 보고서가 특허 아이디어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모호하지는 않았다.
‘디지타이저 시스템’, ‘디지타이저 좌표 입력 시스템’, ‘자세 검출 장치와 응용 장치’, ‘좌표 입력 방법을 응용한 장치 시스템’, ‘가변 포인트 시스템’과 같이 제목이 구체적이었다.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도안은 이 특허에 대한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기술 특허 범위를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한 사람당 적어도 50건을 받았다.
최민혁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실무진 얼굴을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아, 받은 특허에서 최소한 5개씩 특허를 더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최민혁이 제시한 아이디어 특허는 모두 500개였다.
따라서 새로 새끼를 친 특허까지 합치면 모두 3,000건이 넘는다.
이 특허는 핵심 특허와는 달라서 특허 출원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물량 자체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
오성 전자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임기석 부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수법이 딱 오성 전자에서 경쟁사를 죽이는 방법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다만 오성 전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제로 물건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니, 있기는 있구나.’
그랬다.
시제품 KMP-02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줄줄이 새끼를 친 특허가 제법 있었다. 그것을 응용하라는 뜻에서 첨부 항목이 있었다.
‘하, 정말 기가 막히네.’
임기석 부장이 정말 놀란 것은 아이디어 특허가 단순히 그냥 아이디어만으로 스케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특허 요건에 부합되는 부분이 특허 항목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다만 그는 따가운 최민혁 시선을 느끼자 움찔 몸을 떨었다.
최민혁이 임기석 부장을 호출해서 단상 위로 보낸 것이었다.
“자세한 안건은 여기 임 부장님이 설명해 줄 겁니다. 굳이 제가 여러분에게 쓸데없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말을 안 듣는 와컴을 상대로 회초리를 들 생각입니다. 그들은 제 제안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딱 여기까지만 한 최민혁은 회의실을 조용히 나가 버렸다.
임기석 부장은 단상 위에서 헛기침한 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다만 이 일에 대한 기한이 위에 있으니, 그 일정을 준수하기 바랍니다. 최 실장님은 최대한 빨리 와컴의 버릇을 고치기 원하십니다.”
“…네.”
다들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특허를 다들 낸 적이 있는 터라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돌겠군.’
* * *
스마트 관련 특허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니, 어려운 일이 없었다. 아이디어를 토대로 특허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필요한 자료는 서버에 따로 올라와 있어서 너무 순조로웠다.
최민혁은 불과 일주일 만에 정리된 3,000건의 스마트 펜 관련 특허를 바라보았다.
“고생했습니다.”
갑자기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가능하면 이런 일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는 잘 없을 겁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무리한 것입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특허 목차 복사본을 살피면서 최민혁의 눈치를 계속 봤다. 기획 팀도 이번 일에 다 동원이 되었는데, 다들 학을 뗐다.
그들도 이제는 최민혁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잘 알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다들 스마트 펜 이름만 들어도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좀 걱정이 됩니다. 아무리 하급 특허라고 해도 무려 3,000건이 넘습니다. 특허 출원 비용만 해도 무려 100억 가까이 됩니다. 이게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낭비입니다. 하지만 와컴에게는 치명타입니다. 이 많은 특허 범위를 피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기업 전쟁은 총성 없는 싸움터입니다. 오직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집니다. 와컴을 죽이면, 그로 말미암은 반대급부가 큽니다. 물론 와컴을 없애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최소한 두 번 다시 우리 KM 전자를 상대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면 이 특허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다.”
“한영 일보를 이용합니다. 걔들은 이전에 우리에게 진 빚도 있으니까.”
“한영 일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최민혁은 실상 다른 언론사는 내버려 둬도 뒤통수를 친 한영 일보는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다만 와컴 일이 바빠서 내버려 둔 것이다. 차라리 이번 기회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영 일보는 흔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아서 움직이겠지.’
“말 들을 겁니다.”
확신에 가득한 최민혁 말에 조성돈 팀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긴 지금 최민혁 실장 말을 안 들어봐야 타격을 입는 것은 한영 일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