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그러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아, 그러니까요. 이번 사업은 액정 패널과 관련된 미래 연구에 불과합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투자 회사 입장에서는 이런 일에 투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다만 최 실장님이 한 약속도 있으니, 커닝 측에서 적극 나선다면 마냥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영민 부장 이야기는 교묘했다. 최민혁 실장의 성급한 태도를 질타하면서 굳이 켐코의 사업 가능성을 부정했다.
문제는 제프리 하우튼 이사 역시 내부 검토를 통해서 우영민 부장 이야기를 부인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의 승승장구는 지금도 계속되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빨리 검토해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우영민 부장은 잔뜩 분노한 제프리 하우튼 이사의 표정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성공했어!’
* * *
커닝 이사회는 최민혁이 간섭한 이후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사회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된 이후에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커닝 내부 갈등은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해결할 수준을 넘어섰다.
결국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이 커닝 이사회 갈등에 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사회 내부 갈등 때문에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의 경고를 몇 번이나 받자 크게 당황했다.
자신 역시 이사회 분란의 핵심축이기 때문에 에이모리 부회장의 질책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름 커닝의 이익을 최대한 지키려고 한 노력인데, 이사회 내에서도 고립된 셈이다.
그리고 독선적인 데니스 워드 부사장의 행동은 이사회 내부 갈등과 함께 물 위로 떠올랐다.
아무리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데니스 워드 부사장의 실적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사회 내부에서 신뢰를 잃고 있었다.
결국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시간이 갈수록 지쳐만 갔다.
그런 차에 오늘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임시 이사회에서 다시 한번 켐코 사업부 매각 관련 주제를 꺼냈다.
[데니스 부사장님은 지금까지 켐코 사업의 가치 정보를 파악했습니까?!]
[…그건 아직 검토 중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을 더 줘야 그 작업이 가능합니까? 10년 후에는 가능합니까. 아니면 20년이란 시간이 필요합니까!]
[…….]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계속되는 제프리 하우튼 이사의 공격에 입을 다물었다.
커닝 이사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제이크 샌더슨 CTO에게로 향했다.
제이크 샌더슨 CTO 역시 최근 에이모리 부회장에게 계속 불려 가 시달려서인지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는 나름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시간이 있다면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결국 MIT, 칼텍을 비롯해서 자신이 아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도 답을 찾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이사회 회의실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쿵 소리가 울렸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양손으로 회의실 테이블을 쳐서 난 소리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고작 개인 몇 사람의 일방적인 추론 때문에 커닝 이사회가 이 모양이 되어야 합니까?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한 겁니까?!!]
하지만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여전히 충혈된 눈을 한 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질책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놈의 성급. 기업 경영에서 시기가 중요한 걸 모릅니까. 도대체 그놈의 시간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오십 년, 아니, 백 년이 있으면 조사할 수 있습니까? 모르면 좀 나대지나 마세요. 당신같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쓸데없는 똥고집으로 이사회 결정을 독단적으로 막는 것 때문에 우리 커닝이 발전하지 못하는 겁니다!!!]
[…….]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모멸적인 제프리 하우튼 이사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부회장만 믿고 나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주먹으로 안면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런데 이사회 임원 중에 데니스 부사장을 옹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단호하게 결론 냈다.
[켐코 사업부는 일단 정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일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이번 기회에 커닝 내에 불필요한 사업은 추가로 검토해서 선별 작업을 하겠습니다!]
[하, 하지만…….]
[이봐요, 데니스 부사장님은 자신이 커닝 오너라도 되는 양 행세를 하는데, 당신은 오너가 아니야. 너무 나서서 나대지 좀 마!]
[…….]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 때문이 아니라 얼마 전에 에이모리 부회장이 한 경고 때문이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이 왜 이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에이모리 부회장이 본사로 복귀한 자신을 견제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정말 걱정하는 것은 커닝 내부 갈등 때문에 켐코 사업부를 헐값에 매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새삼 그때 만난 최민혁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불행히도 지금은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 * *
켐코 사업부 매각 결정은 쉽게 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사회에서 켐코 사업부 매각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커닝 이사회는 지금 한창 뜨거운 감자가 있는 광통신 사업에 시선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되지도 않고, 미래가 확실치 않은 켐코 사업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켐코 사업부 소속 커닝 임직원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사업부가 매각된다고 해도 오히려 반대가 아니라 옹호하는 쪽이었다.
사업 인수자가 요즘 실리콘 밸리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벨린 투자였기 때문이다.
벨린 투자는 이미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건물과 직원 복지용 오피스 빌딩을 사들인 후에 꽤 알려졌다.
심지어 벨린 소프트 임직원을 통해서 회사 내부 분위기도 드러났다.
KMP-01 내부 OS 개발에 관여한 덕분에 이 회사가 가진 원천 기술 일부도 퍼져 나갔다.
벨린 투자가 아직 지분 일부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KM 전자도 빼놓기 어렵다.
켐코 사업부는 결국 이 벨린 투자가 지분을 100% 인수한 기업이다.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생각도 없이 켐코 사업부를 인수했을까.
최소한 켐코 사업부 임직원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3,000만 달러 사업부 매각과 동시에 이루어진 고용 승계가 그 결과다.
벨린 투자는 다 한 사람도 자르지 않았고, 기존 연구소나 건물을 그대로 뒀다. 커닝과는 시간을 두고 회사를 분리하는 것으로 결정 내린 것이었다.
회사 사명은 벨린 글라스로 바뀌었다.
커닝 역시 도대체 벨린 투자가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해서 가능하면 벨린 투자의 요구 조건을 다 들어 주었다.
최민혁은 조용한 켐코 사업부 인수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 부장님, 고생했습니다.”
우영민 부장은 오랜만에 어깨에 힘을 팍팍 줬다. 이번 일은 최민혁 실장도 실패한 일이었다. 다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모두 실장님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커닝 이사회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우 부장이 사업부를 인수한 겁니다.”
“아닙니다.”
우영민 부장은 힐끗 옆에 자리를 같이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 역시 이번 일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긴가민가했다.
켐코 사업부를 이렇게 인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더욱이 켐코 사업부가 3,000만 달러 가치가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웃고 있는 최민혁 실장을 앞에 두고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최민혁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우선 켐코 사업부 인수에 대한 반응부터 조용히 살펴봅시다. 오성 전자, LC 전자는 정신이 없을 겁니다만 모르는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 * *
켐코 사업부 인수 합병 소식은 이미 IPS LCD란 뜨거운 소식에 묻혀서 한국 언론이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미 한번 켐코 사업부 인수에 관한 기사가 나갔기 때문에 이 일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은 언론보다 먼저 전략 기획실 통해서 이 정보를 접했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오성 전략 기획실에서 이 문제를 이전처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하긴 켐코 사업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큰 이익이 나지 않으니까.”
애초에 켐코 사업부가 가지는 특수 유리 사업은 파이가 크지 않았다.
딱 과거 KM 전자와 같은 기업이 관리하기에 좋은 사업이었다.
하지만 오성 전자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있었다.
임권수 부장이 지급 급조된 IPS LCD TFT팀에서 진행되는 일을 보고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10㎳ 응답 특성의 벽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이 문제는 KM 전자가 가진 액정 기술을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IPS LCD 액정 기술은 단순히 전극만이 아니라 LCD 액정에 대한 것도 포함한다. 이 중에 몇 가지는 히타치 공작소가 보유하고 있지만 다른 것은 KM 전자 소유였다.
따라서 추후 문제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오성 전자 내부적으로 특허를 피할 작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일이 간단하지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은 복잡한 연구 결과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중에 과연 실현 가능한 특허가 어떤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대로 KM IPS LCD 특허를 적용해야 하나?’
하지만 앞으로 협상을 위해서 대안이 필요했다.
자사 기술이 있다면 로열티 자체를 대폭 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LC 전자는 어때?”
“LC 전자 역시 저희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서둘러야 해. 자칫 그쪽보다 늦어지면 그룹 차원에서 간섭할 거야.”
“…알겠습니다.”
권태성 실장도 켐코 사업부에 대한 지시를 일부 팀에게 배당하기는 했지만 크게 믿지는 않았다. 애초에 알 수 있었다면 벌써 결과를 보고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IPS LCD부터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해. 최소한 LC 전자보다 늦어서는 곤란해.’
* * *
오성 전자만 딱 LC 전자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LC 전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오성 전자를 따라잡기 위해서 최대한 매달렸다. 다른 사업은 쳐다보기 힘들었다.
LC 전자는 애초에 켐코 사업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LC 전자가 생각하기에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KM 그룹의 장승일 실장은 정작 DL 그룹 때문에 켐코 사업 상황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DL 그룹 김상구 회장이 직접 최용욱 회장과 만나서 이 일을 진행했기 때문에 더 상황이 복잡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도 김상구 회장의 제안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자금 압박 때문이다.
더욱이 최문경 부회장은 김상구 회장의 도움을 얻어서 자금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김상구 회장이 끼어드는 것을 오히려 옹호했다.
“이번 일의 리스크도 감수해야 합니다. 자칫 새로운 LCD 사업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룹 차원에서 위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황당한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역시 투자를 더 늘릴 수가 없어서 마냥 반대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DL 그룹에서 자금 지원을 꽤 받았다는 점이다.
김상구 회장이 일방적으로 최용욱 회장을 압박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새로운 LCD 사업과 관련한 주도권 때문에 박 터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 유리와 관련된 켐코 사업권 인수에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니었다.
다들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최민혁 행보를 지켜만 봤다.
최민혁은 예상했던 반응에 꽤 만족했다. 다만 아직도 켐코 사업 때문에 고민에 잠겨 있는 조성돈 팀장을 두고 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이 일의 의미를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번 일의 성공에 대한 것보다는 앞으로 할 일에 집중하죠.”
우영민 부장은 신뢰가 가득한 최민혁 실장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한 채 눈빛을 반짝였다. 다음 일만 잘 끝내면 이사 승진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다른 기업 인수입니까?”
최민혁은 욕망으로 번득거리는 우영민 부장 눈빛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인수는 어려울 겁니다. 워낙에 시장에서 독점적인 기업이라서요. 혹시 와컴이라는 기업은 들어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