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10화 (410/1,021)

#410.

김상구 회장은 오히려 김용만 전무의 이런 신중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더욱이 KM 전자 작업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는 굳이 이 일에 적극 개입하지 않아도 일단 감시자로서 지켜보란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용만 전무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김상구 회장 지시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KM 전자에 대한 작업이 실패한 책임을 아직 피할 수는 없었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보고 우습게 생각했지만, 막상 최민혁 실장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보자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경악했다.

최민혁 실장이 지나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솔직히 최민혁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김상구 회장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번 IPS LCD 사업에 끼지 않으려는 이유다.

그런 내막을 잘 모르는 이들은 김용만 전무를 이상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이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DL 그룹 내부는 혼탁한 안개가 가득한 계곡이나 진배없었다.

그들은 김용만 전무가 왜 저렇게 소극적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회의는 잠깐 중지되었다.

김현탁 사장은 힐끗 맞은편에 앉은 김용만 전무를 쳐다보았다.

“작은아버지, 오랜만입니다.”

“그래. 소식 들었다.”

“감옥에 면회 한 번 안 오셨습니다.”

“바빴다.”

“아무리 회사 일이 바빠도 조카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감옥에 갔는데, 와서 위로를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미안하구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십니까. 따지고 보면 지금 사태도 작은 아버지가 최민혁 그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 아닙니까!”

목소리가 올라가자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현탁 본부장의 기분이 처음부터 저기압인 것을 알았지만 그게 감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안 것이다.

김용만 전무는 착잡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본의가 아니었다.”

“아니, 전 정말 작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최 실장 그 새끼에게 당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일입니다. 왜 지금까지 꾹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니까?”

“나름 노력했다. 아버지에게도 보고한 사실이다.”

사실 김현탁 본부장의 태도는 상리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하게 감방에 간 이유 때문에 김용만 전무도 저자세를 취했다.

“사실 최 실장을 빨리 정리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당시 최훈열 전무가 비자금 때문에 서두를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최문경 부회장도 관련이 있다.”

“비자금입니까?”

“그 비자금을 이용해서 KM 전자를 흔들 목적이었으니까. 굳이 서둘러서 일을 만들 상황은 아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최 실장 그 새끼가 갑자기 툭 나와서 개판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래. 최훈열 전문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관련된 사업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서두르지 않았다면 우리 쪽에도 불똥이 튀었을 거다.”

“하, 정말 훌륭하시네요. 아니, 그 일과 저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눈에 핏발이 선 김현탁 본부장은 치를 떨었다. 그도 사건의 시작이 KM 전자 때문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고구마 줄기처럼 물고 물려서 결국 자신이 독박을 뒤집어 쓴 셈이다.

김현탁 본부장은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소리쳤다.

[회의 진행해!!!]

하지만 김현탁 본부장도 이제는 김용만 전무가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한 것을 잘 알았고, 그 이후 일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도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중배 교수는 DL 가문 직계 두 사람의 주목을 받은 것에 고무되어서인지 이번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따라서 KM 전자가 가진 VA 기술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투자와 별개로 기술을 베끼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김현탁 본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술 확보가 어렵다면, 지금 기술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 과정에서 특허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급증할 겁니다. 어쩌면 이번 소송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KM 전자가 소송으로 패널 시장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 투자를 쉽게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 물론 투자를 반드시 하기는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김현탁 본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혹시나 최민혁 실장이 뭔가 꼼수가 있지 않나 싶어서 보험 차원에서 확인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LCD 패널 투자와 관련된 TFT 팀 의견이나 이중배 교수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 덫을 이중 삼중으로 깔아놓았구나. 하긴 최민혁 실장 이 새끼가 남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지.’

그건 김용만 전무 안색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지금 상황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어째 보안이 필요한 VA 기술이 떠돌아다닌다고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어.”

“…….”

김현탁 본부장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최대한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감방에 갔다 온 적이 있는 터라 이전처럼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군. 이 정도 사안이라면 누구라도 다 확인이 가능하잖아. 고작 이런 점을 최민혁 실장이 노린 것일까?’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민혁 실장의 또 다른 의도까지는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 * *

최민혁은 김현탁 본부장의 보석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증언만 있지 증거가 없는 일이라서 김현탁 본부장의 구속은 무리한 상황이었다.

다만 김현탁 본부장이 풀려나기가 무섭게 VA 패널 사업의 책임자가 될지는 몰랐다.

이 일은 굳이 서두를 상황이 아니었다.

비자금을 다시 양지에 끌어 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DL 그룹의 김현탁 본부장이 될 테니, 오히려 팝콘이나 먹으면서 구경이나 하면 되었다.

‘운이 좋으면, IMF 때 DL 그룹을 제대로 날려 버릴 수도 있겠어. 그때 DL 화재를 인수할까. 나쁘지는 않은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최민혁은 이보다 김호동 박사를 통해서 LC 전자와 오성 전자에 IPS LCD 정보를 슬쩍 흘리도록 정보를 조작했다.

필요하다면 이 두 회사에서 시제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정보를 흘리라고 지시했다.

조성돈 팀장은 이 일에 대해서 우려를 드러냈다.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요?”

“아뇨. 어차피 숨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막으면 어차피 기술을 빼돌릴 테니, 차라리 적당한 통로를 만들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가 IPS LCD 패널 기술을 그냥 구경만 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사 특허 문제가 있다고 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었다.

늘 그래 왔기 때문이다.

최민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IPS LCD 특허 로열티와 IPS 패널이다. 특히 당장 상업적으로 팔 수 있는 IPS 패널이 필요했다.

“너무 작은 이익에 집착해서 큰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는 사업은 모바일 사업이라는 점을 유념해 주세요. 그로 말미암은 이익은 IPS 패널 이익과 비교조차 하기 힘듭니다.”

사실 모바일 산업이 팽창하게 되면 일어나는 수익은 조성돈 팀장도 막연히 예측만 하고 있을 뿐이지, 정확한 규모는 몰랐다.

다만 그 역시 모바일 산업 장래가 밝다는 것은 잘 알았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의 표정을 보면서도 굳이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문제가 되어도 나중에 얼마든지 타협을 할 수가 있어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IPS LCD 양산입니다. 그 기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설마 응답 특성을 더 당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죠. 두 대기업이 비록 남의 기술을 베끼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갖춘 능력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라면 IPS LCD 양산을 대폭 줄일 겁니다. 오성 전자의 낸드 플래시가 좋은 예입니다.”

“그렇지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중요한 점은 수익성이 확실하다는 점을 그들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특허료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딱 그거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여전히 내키지 않은 얼굴이다. 막상 신기술을 자신이 개발했는데, 정작 남이 가로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 부분에 대해서 선을 분명히 그었다.

“우리 KM 전자는 이미 모바일 사업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LCD 패널과 같은 장치 사업에는 역량을 집중할 수 없습니다. 이 사업은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사업으로 모바일 사업과는 전혀 다릅니다. 기존 우리 KM 전자 사업과도 영역이 틀립니다. 괜히 지금까지의 성공을 과신해서 백화점식으로 사업을 늘려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금 압박에 시달릴 테니까.”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 내면에 숨겨진 말 때문에 순간 머뭇거렸다. 최악의 상황이 IMF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다만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 행보를 보면 이렇게 두 번 세 번 언급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액정 패널로 말미암은 이익이 얼마나 되기에 저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

의문은 생각보다 더 많았지만, 최민혁에게 굳이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실 기획 팀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 * *

오성 전자의 권태성 기획실장이 양지에서 일을 주로 처리한다.

하지만 오성 그룹같이 큰 조직이 정당한 일만 할 리가 없다.

특히 그룹 전략 기획실은 또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IPS 패널 문제 때문에 잔뜩 긴장했고, 김호동 교수와 관련된 모든 인물을 레이더 선상에 올려놓고 조사했다.

그중에 한 연구원에 접촉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구원 역시 최민혁 실장의 암묵적인 지시를 받은 터라 내부 핵심 기술을 다 폭로했다.

이 정보는 즉시 몇 단계 세탁을 거쳐서 권태성 비서실장 손에 넘어갔다.

그는 ‘이게 뭡니까!’라는 아마추어적인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온 기술이 더 중요했다. 이 기술은 광시야각 패널을 둘러싼 앞으로 미래 신사업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그 전쟁에서 선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미 LC 전자의 권기식 부장이 시제품 개발에 착수했다는 말입니까?”

“네. 그러니 일단 특허 문제를 떠나서 기술 확보가 우선입니다.”

“10㎳ 이하 응답 특성이 있는 액정 패널을 말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당장 그 기간만 해도 몇 개월은 족히 잡아먹습니다. 특허 이전에 양산 기술을 확보하는 것 역시 무시하기 힘듭니다.”

“…알겠습니다.”

권태성 비서실장은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나온 이에게 자세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불법적인 일과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이걸 빌미로 또 얼마 뜯어낼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임권수 부장은 자료를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특허 소송은 보통 미국 업체가 미국 법원을 통해서 진행하는 일이 흔한데, 자칫하면 국내 법원에서 진행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야. 최 실장이라면 굳이 한국 법원이 아니라 미국 법원을 이용할 수도 있어.”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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