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09화 (409/1,021)

#409.

김희찬 부사장은 오히려 차가운 장남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감방에 다녀온 후에 하는 행동과 말의 격이 달랐다.

잘못된 행동 때문에 감방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후에 생긴 변화였다.

“일단 보고서를 봐서 알겠지만, KM LCD 설립에는 자본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 현금 줄이 막혀 있어. 그러니 그 기회를 이용하면 우리도 KM LCD 지분을 쥘 수가 있다.”

“그걸 최용욱 회장이 허락할까요? 저라면 절대로 용납할 것 같지 않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 생각은 다를 거다. 애초에 이 일은 최문경 부회장이 최민혁 실장이 염두에 둔 신사업을 강탈할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니까. 그러니 최문경 부회장과 협상을 잘하면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다.”

“설마 최문경 부회장에게 돈을 빌려주란 말입니까?”

“방법은 네가 결정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이다. 최민혁 실장도 엮여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다.”

원론적인 말이다. 이게 돈을 빌려줘서 쉽게 될 일이면 김희찬 부사장이 해도 된다. 굳이 김현탁 사장을 보석으로 감옥에서 꺼내서 이 일을 맡길 이유가 없다.

DL 화재 김희찬 부사장은 이미 LCD 패널 신사업을 둘러싸고 무시무시한 알력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결국 누군가 이 일을 전담해야 했다.

김희찬 부사장이 일일이 다 지시 내릴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국지전을 책임지는 사령관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전쟁에서 패한 김현탁 사장은 그런 면에서 나쁘지 않은 적임자다. 그는 최소한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볼 이는 아니다.

심지어 상황 변화에 대해서 적극 대처할 것이다. 감방에 갔던 가혹한 경험이 김현탁 사장의 판단 실수를 최소한 줄여줄 것이다.

“후유, 알겠습니다.”

김현탁 사장은 생뚱맞은 얼굴을 한 채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그는 돌아가는 상황이 정말 황당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도대체 민혁 이 새끼는 안 끼는 자리가 없어!’

* * *

LC 전자 기획실 한병수 부장은 김현탁 사장에게 연락을 받자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대를 같이 지내면서 서로 안면이 있는 것도 있지만, KM 전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 때문이다.

한병수 부장은 KM 그룹 내에 일어나는 경영권 다툼에 대한 것을 최근에 알았다. 그것도 권재홍 비서실장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일에는 최훈열 전무의 외가인 DL 그룹과 관계가 있다.

DL 그룹이 KM 전자를 노렸던 것은 알음알음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최민혁에 대한 연결 고리 역시 빼놓기가 어렵다.

이 정보를 아는 이들이라면 KM 그룹, DL 그룹, 그리고 오성 그룹이 서로 복잡하게 엮여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DL 그룹 내부 정보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한병수 부장은 강남에 있는 한 한정식집에서 조용히 김현탁 사장을 만났다.

“출소 축하합니다.”

“놀리는 겁니까?”

한병수 부장은 날카로운 김현탁 사장의 태도에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역시 김현탁에 관한 조사를 진행한 후에야 그 배후에 최민혁 실장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다만 증거는 없었다.

정황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진실을 김현탁 사장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 얼떨결에 폭탄을 맞은 셈이다.

이 미묘한 내막을 둘러싸고, 별의별 음모론이 다 돌았다.

제삼자인 한병수 부장은 이 일에 대한 호기심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정말 어떻게 된 거니까? 진짜 살인 교사와는 무관합니까?!”

“닥치십시오!!!”

맹렬한 김현탁 사장의 반응에 한병수 부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술이나 마셨다.

워낙에 큰소리를 쳐서인지 한정식 종업원이 슬쩍 안으로 들어왔다가 살기가 가득한 김현탁 시선을 접하자 조용히 사라졌다.

물론 김현탁 사장은 개인 감정 때문에 일을 망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잠깐 씩씩거리다가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LCD 사업 말입니까?”

“네. LC 전자 쪽에서 정말 LCD 패널 사업에 진출하는 겁니까?”

“글쎄요.”

“그쪽 태도를 분명히 밝혀야 우리 쪽에서도 조심할 수 있어요. IPS LCD 패널 분야만큼은 자기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하란 말입니다!”

“꼭 말로 해야 압니까?”

“아니, 난 LC 전자 태도를 확실히 밝히고 싶은 겁니다. 그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모호한 태도를 집어치우세요!”

“좋습니다. IPS LCD에 대해서는 그룹 차원에서 이미 투자 승인이 난 상황입니다. KM 전자와는 별개로 따로 팀을 추려서 일을 진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겁니까? 나중에 가서 또 딴소리하면 정말 그냥 안 둘 겁니다!”

“IPS LCD만큼은 확실합니다.”

한병수 부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대답하기는 했지만 명확한 언급을 더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오성 전자와의 갈등 때문에 일이 꼬이고 있기 때문이다.

IPS LCD 패널 특허 자체는 KM 전자에 있기는 하지만 이걸 이대로 믿을 수만은 없었다.

오성 전자 나름 IPS LCD 패널을 분석해서 특허를 출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LC 전자 내부에서 이미 진행이 되는 중이다.

이 새로운 연구 팀에 할당된 연구원만 해도 무려 100명이 넘었다.

최근 LCD 패널 관련 국내 연구원은 죄다 쓸어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성 전자의 행보에 비하면 한 걸음 느린 상황이었다.

한병수 부장으로서는 IPS LCD 사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피곤했다.

“김 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DL 전자 내부에도 연구소가 있고, 새로운 신사업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는 늘 하는 일이니까.”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김현탁 사장은 LCD 패널을 둘러싼 업계 분위기를 파악했다.

생각한 것보다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하지만 그가 확인하고 싶은 따로 있었다.

“다른 기술 기반의 LCD 패널은 관심이 없는 거죠?”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내 말은 IPS LCD 패널 쪽에만 집중하고, 다른 기술이 적용된 LCD 패널 기술은 관심이 없습니까. 우리는 그쪽에 투자할 생각이니까.”

“무슨 말씀인지…….”

“그 정말 답답합니다. 세상에 IPS LCD 패널만 있습니까? 얼마든지 또 다른 응용 기술이 존재합니다. 설마 그런 기술까지 전부 LC 전자에서 다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한병수 부장은 무슨 말인지 의미를 알아듣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IPS LCD와 또 다른 기술이 바로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풋내기처럼 이 자리에서 확답하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설마 LCD 관련 기술은 LC 전자가 다 먹겠다는 소리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한병수 부장은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김현탁 사장은 이전의 그 푼수가 아니다. 그는 이미 최민혁 실장이 만든 고등 수법의 유탄에 감방까지 갔다.

이번 일도 최민혁 실장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LC 전자와 오성 전자는 VA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알게 되겠지만, 어차피 최민혁 실장이 원천 기술 소유자이니, 아마 별 뾰족한 수는 없을 거야.’

두 회사의 정보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IPS LCD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이 그만큼 살벌하므로 다른 사업 영역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KM 그룹의 최문경 부회장이나 DL 화재의 김희찬 부사장은 VA 기술을 알고 있다.

‘뭔가 좀 이상해. 역시 최 실장 이 새끼의 함정이 분명해. 그런데 좀 이상하군. 이게 어떻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

김현탁 사장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정확히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이건 시간을 두고 검토해야 할 사안이었다.

‘찾아보면 답이 나올 거야!’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네? 아니, 급히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 IPS LCD 패널에 대한 LC 전자의 답변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 정도 답이면 충분합니다. 그쪽은 우리도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현탁 사장은 자신이 의도한 정보를 확신하자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병수 부장은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이고 말았다.

* * *

김현탁 사장은 어차피 구속 이후에 DL 스카이에서 배제된 후라 DL 전자 기획 본부장으로 DL 전자에 다시 들어갔다.

본부장이란 자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LCD 사업과 관련된 임시 직책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용만 전무는 김현탁 본부장이 DL 전자에 합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DL 전자 이사회 역시 김현탁 사장을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DL 그룹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이다.

어차피 LCD 관련 사업부는 DL 전자와 같이할 정도로 규모가 작지 않았다.

DL 전자의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김현탁 본부장은 우선 전 DL 스카이 박태정 비서실장을 차장으로 진급시켜서 자기 밑으로 인사 발령을 내렸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알면서 그래. 감방 이야기나 해줄까?”

“괜찮습니다.”

“아니, 너도 알아야지. 앞으로 다음 순서는 네가 될 확률이 높아.”

“네?”

“잘 생각을 해봐. 감방에 갔다 오고 나면 위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틀려. 뭔가 이제는 중요한 일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달까?”

“…….”

박태정 차장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김현탁 사장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감방이 훈장이라면 훈장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에 김현탁 사장의 짓궂은 장난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응했다.

하지만 매사에 진지하면서도 소극적인 박태정 차장은 표정 관리를 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평소에도 늘 선을 넘지 않은 박태정 차장이 좋았다.

“좋아, 우선 패널 이야기부터 들어봤으면 좋겠어.”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두 사람이 곧 향한 곳은 DL 전자 내의 중 회의실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다섯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가장 중앙에 있는 사람은 바로 김호동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중배 한국대 교수다.

이중배 교수 역시 유학파 출신으로 미국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포항 공대를 거쳐서 지금은 한국대 교수로 있다.

경력만 놓고 보면 김호동 교수보다 10년은 더 많았다.

이중배 교수는 최근 김호동 교수가 주목받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 차에 마침 한국대 총장을 통해서 제안을 받자 이 자리에 냉큼 나섰다.

이중배 교수는 고집스러운 입을 열면서 지금 DL 전자가 처해 있는 현실을 말해주었다.

[앞으로 LCD 패널에 적용될 광시야각 핵심 기술은 VA와 IPS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IPS는 이미 오성 전자나 LC 전자 측에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DL 전자는 IPS 기술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황이다.

문제는 VA 특허다. 단순하게 보면 IPS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이 차이가 존재한다.

[수직배향 기술은 모두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패턴 수직 기술을 새롭게 만든다고 해도 소송을 걸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싫든 좋든 특허료를 내야 한다는 의미다.

[수직배향 기술에 속하면 모두 저 VA 특허에서 비켜날 수 없는 겁니까?]

[네. 물론 틈은 있습니다. 하지만 소송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될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특허료를 지급해야 할 겁니다.]

‘엿같네. 최 실장 이 새끼가 저 특허에도 미끼를 골고루 박아놓았을 거야.’

김현탁 사장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최민혁 실장의 치밀한 함정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지금 LC 전자나 오성 전자 역시 최민혁이 만든 양식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묵묵히 설명을 들으면서 뒤늦게 사무실로 들어온 김용만 전무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는 왜 김용만 전무가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감시일까?’

하지만 김용만 전무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곤혹스러움이다.

그는 이미 김상구 회장에게 이번 일에 끼기 싫다고 의사 표시를 했지만, 상황이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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