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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08화 (408/1,021)

#408.

검찰에서도 과거 횡령금을 더 파해 치지 못한 이유다.

아마 감방이 아니었다면 이 일을 가지고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그는 이미 이런 시기가 올 날만 기다렸다.

“권 실장이 잘 알겠지만, 횡령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 큰형이 그 일에 엮여 있는 사실을 검찰이 알면 어떻게 될까요?”

권재홍 비서실장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제가 아는 바로 증거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애초에 KM 전자 내부 자금을 빼돌린 것은 최 전무님이 혼자 결정한 것입니다.”

“호오, 세게 나오네요. 정말 걱정이 안 됩니까?”

“…전 전무님의 횡령 건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횡령 건에 엮인 돈 말입니다. 설마 그걸 저 혼자 다 먹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룹 감사실에서 지켜보는데, 모를 수가 있겠어요? 당신이 중간에 손을 쓰지 않았다면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감사실에서 그런 보고를 한 적이 있었지만, 증거가 없었습니다.”

“하, 기가 막혀서.”

최훈열 전무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예상한 반응이라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는 권재홍 비서실장이 가소롭기만 했다.

그는 오히려 야릇한 웃음을 한 채 한 사람을 거론했다.

“아마 민혁이가 알면 상황이 재미있을 겁니다. 그놈은 저보다 형을 감방에 보내고 싶을 테니까!”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그게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횡령 금액이 더 늘어나면, 형량이 더 늘어날 겁니다.”

“설마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아니, 제 말은 이미 전무님 선에서 다 끝난 일입니다. 굳이 그 일을 긁어서 부스럼을 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3심까지 가면 형량이 대폭 줄어들 거고, 얼마 있지 않아서 감옥에서 나올 겁니다. 그 이후를 생각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가능하면 좋게 끝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최훈열 전무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음흉한 웃음을 짓은 채 권재홍 비서실장을 잠깐 차갑게 쳐다보았다.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비자금을 달라니. 제가 쉽게 응할 거로 생각합니까?”

“…….”

권재홍 비서실장은 아차 싶었다. 그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은 최훈열 전무가 정상일 때 해당한다. 지금처럼 최훈열 전무가 감방에 있는 경우는 이야기가 아주 달랐다.

최훈열 전무는 자신의 입장이 있기에 권재홍 비서실장을 더 자극하지 않았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것 같으니, 말이 쉽겠습니다. 일단 제 형량을 어떻게 해서라도 줄이세요. 최소한 3년형, 아니, 5년형만 줄이면 그 비자금을 내놓을 테니까.”

“하, 하지만…….”

“우리 부회장님에게 분명히 말하세요. 지난번에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우리 부회장님을 걸고 넘어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독기가 가득한 최훈열 전무의 시선에서 광기마저 엿보였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차가운 최훈열 전무의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보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가 굳이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도 이 문제는 결국 터질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KM 전자 비자금 사태는 너무 갑자기 터진 일이다.

당신 자신이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증거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 최훈열 전무에게도 그 증거는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하면 횡령한 비자금뿐이다.

‘골치네.’

* * *

권재홍 비서실장과 최훈열 전무의 만남은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KM LCD 계열사 설립과 관련해서 돈 흐름을 감시하던 김명준 과장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즉시 최민혁 실장에게 이 안건에 대해서 보고했다.

최민혁은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몰랐다. 다만 최훈열 전무가 빼돌린 돈이 검찰에 다 압수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KM LCD란 명목으로 뭉칫돈을 구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그런 차에 미묘한 관계의 두 사람이 만났으니, 할 이야기는 뻔했다.

“역시 우리 첫째 큰아버지도 KM 전자 비자금에 한 역할을 했나 보군요.”

‘하긴 그래야 미래 일이 설명돼. 차입금 규모가 늘어났다면, 횡령한 금액은 더 늘어났을 테니까. 아마 몇 년 후에는 수천억은 넘었을 거야. IMF 이후에 그룹이 쉽게 공중 분해된 것도 이 때문일 거야.’

문제는 이 돈을 메꾼 것이 은행이다. 바로 국민의 세금을 통해서 채워 넣었다.

최민혁도 재벌 3세이기는 하지만 최훈열 전무나 최문경 부회장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증거가 없어서 당장 검찰에 신고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KM 전자 관련 비자금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소용없을 겁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바보가 아닌데, 증거가 남을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단계별로 해서 비자금을 챙겼을 겁니다. 거래했던 외국 중소기업을 의도적으로 파산시키는 방법이 한 예입니다. 검찰에서도 증거를 못 찾은 이유일 겁니다.”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냥 두고 볼 생각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여우 굴을 수백 개씩 파놓았을 텐데, 검찰이 그걸 다 적발하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스스로 내놓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보고받았습니다. 일이 쉽게 풀려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둘째 큰아버지 처지에서 억울할 겁니다. 갑자기 자신은 감방에 갔는데, 첫째 큰아버지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지금은 첫째 큰아버지를 의심하는 단계일 겁니다.”

최민혁은 자신이 대답해 놓고서야 두 사람의 균열이 생각보다 심한 것을 깨달았다. 막상 최훈열 전무가 감방에 간 이후에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좀 달라진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아직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여유로운 것 같은데, 절박한 상황으로 만들면 됩니다. DL 그룹 측에 VA 특허와 관련해서 정보를 흘리세요.”

“DL 그룹 말입니까?”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DL 그룹은 저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려는 신사업에 대해서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보복하려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새삼스러운 얼굴을 한 채 최민혁 표정을 살피더니 조용히 실장실을 나갔다.

* * *

VA 패널 기술 관련된 정보는 뜻밖에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PS LCD 기술이 히타치 공작소 소송 이후에 너무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기술에 선뜻 공격적으로 나서지 못한 이유는 오성 전자와 LC 전자 때문이다.

이 두 그룹은 아예 그룹의 사활을 걸고 이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마치 스토커처럼 최용욱 회장을 잡아먹을 정도로 달려들었다.

최용욱 회장이 굳이 최민혁 실장을 닦달하는 이유였다.

DL 그룹은 이걸 알면서도 두 그룹이 무서워서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김상구 회장은 DL 그룹 기획실, 비서실, 관련 정관계 인맥을 총동원해서 숟가락을 올리려고 해보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성 그룹의 로비 공세가 너무 살벌했기 때문이다.

그런 차에 들은 VA 패널 기술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DL 그룹은 김현탁 사장의 구속 이후에 겨우 숨을 돌렸다.

일본에서 단기 자금을 끌어와서 DL 화재는 겨우 어려운 상황을 넘겼다.

이런 상황에서 DL 화재를 수습한 김희찬 부사장을 이 일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최용욱 회장의 건방진 태도 때문에 잔뜩 열을 받은 김상구 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DL 전자는 아직도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세대 패널 사업에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자칫하다가 오성 그룹의 압박을 받습니다.”

“직접 끼어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문경 부회장 측과 접촉하면 된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액정 패널 사업은 자본이 한두 푼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DL 전자 매출액보다 더한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걱정하지 마라.”

“물론 아버지가 도와주는 거 압니다. 그래서 더 자신 없습니다.”

“…뜻밖이구나.”

“…….”

김용만 전무는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에게 된통 당한 후에 최민혁의 행보를 지금까지 계속 지켜봤다.

최민혁의 성장 스토리는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VA 기술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육감은 아니라고 해도 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김상구 회장에게 한다고 해서 믿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걸 이해 못 하는 김상구 회장은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놈 성격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군. 하긴 오성 전자와 LC 전자가 깔린 판에 무리하게 끼어들고 싶지 않겠지.’

다른 이들은 새로운 계열사 경영에 끼어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바로 살인 교사로 구속된 김현탁 사장이었다.

“현탁이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해봐!”

* * *

다행이라면 트럭 운전수 안용만에게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김현탁 사장이 구속된 것은 최민혁이 조성한 여론과 정황 증거 때문이었다.

결국 김현탁 사장은 어렵게 보석으로 일단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얻은 기자들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서울 구치소 앞으로 몰려와서 취재 경쟁을 벌였다.

기자들은 김현탁 사장이 서울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마이크를 들이댔다.

[김 사장님, 살인 교사죄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안용만 트럭 운전수 상대로 협박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김현탁 사장님, 비록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해도 정황 증거만으로 이미 DL 화재는 수천억의 이익을 본 셈입니다. 그러니 살인 교사 동기로 충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현탁 사장은 서울 구치소에서 나오자 몰려온 기자 쓰나미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 새끼들아, 소설 쓰지 마!]

[소설이라뇨, 이번 살인 교사죄는 동기, 정황 증거가 명확합니다. 비록 확실한 물증이 없을 뿐이고, 검찰은 여기에 대해서 자신감을 비쳤습니다!]

김현탁 사장은 독기가 서린 얼굴로 몰려온 기자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그 섬뜩한 태도에 기자들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몰려온 기자 숫자가 무려 40명이 넘었다.

고작 눈빛 공격에 밀려난 기자들이 아니었다.

김현탁 사장은 결국 기자 쓰나미를 헤치면서 가까스로 자신을 기다리는 차에 올라탔다.

그는 차량 뒷좌석에 앉은 김기범이 내민 두부 조각을 받아서 차량 바닥에 패대기쳤다. 두부 조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야, 너 돌았냐?!”

“…죄송해요.”

“지랄한다. 차나 출발시켜!”

김현탁 사장은 차량을 향해서 펑펑 터지는 플래시를 보면서 어금니를 으드득 갈았다.

‘최민혁 이 개새끼, 죽여 버리겠어!’

* * *

보석으로 풀려 나온 김현탁 사장은 불행히도 최민혁에 대한 원한을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생각한 것 이상의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KM LCD 신사업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 나오기가 무섭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IPS LCD 사태에 대한 보고서를 살폈고,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최민혁 이놈은 단 한시라도 쉬지를 않는구나.’

최민혁이 그가 감옥에 있던 동안에 벌인 사건은 하나하나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자신의 보석도 DL 그룹이 밀어줬기 때문이다.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은 그런 점을 감정이 없는 말로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네 녀석이 감옥에 더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지. 아니, 그래서 너에게 좋은 기회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네 할아버지에게 그만큼 인정을 받는 것이니까.”

“그렇습니까?”

아들조차 믿지 않는 김희찬 부사장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전 DL 스카이 김현탁 사장은 이를 갈았다. 그는 물론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할 이는 아니었다. 더욱이 감방에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런 자리에서 내심을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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