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장승일 실장을 비롯한 기획조정실 인원은 묵묵히 커닝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커닝 상황이 도저히 잘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최 실장님은 미국에 가서 뭘 하고 온 건가?”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기에 정확하게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최 실장님만이 커닝 사건에 대해서 안다는 말이겠어.”
“다만 그게…….”
구길모 차장은 입을 열길 망설였다. 커닝 상황을 둘러싸고 별의별 음모론이 다 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태와 관련이 있는 최민혁 실장은 정작 일이 커지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알겠네. 그 정도로 하지. 나머지는 좀 더 확인해 봐.”
“네. 그런데 정말로 회장님께서는 IPS 신사업을 시작할 생각입니까?”
“나도 몰라. 아직 검토 단계이니까. 하지만 회장님이 이미 마음을 굳혔다면 못 할 일이 없어. 수익성이 불투명한 사업은 아니잖아. 그래서 더 다른 대기업이 회장님에게 매달리는 것이니까. 다만 이 일을 진행하려면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 그래. 최민혁 실장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해.”
“…이 안건은 추가로 다시 조사하겠습니다.”
“그래.”
* * *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시 원점에서 다 취합했다. 협상하려면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내심 많이 걱정했다. 아무리 최용욱 회장이 부탁한다고 해도 악명이 자자한 최민혁 실장이 쉽게 계열사 설립을 허락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배후가 최문경 부회장인데, 깽판을 칠 확률이 더 높겠지.’
결국 KM 전자 본사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미리 연락받고 나와 있는 배종대 과장은 안내하면서도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룹 기획조정실 인원이 모두 다섯 명이나 동행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KM 그룹 법무 팀 소속도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행보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장승일 실장은 배종대 과장뿐만이 아니라 따가운 KM 전자 임직원 시선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한편으로 활기찬 그들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KM 전자 임직원 중에 조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집트 콜린스 선적 물량이 펑크가 났다니?]
[몇 번 보고를 드렸지 않습니까. 부품 수급이 늘어져서 생산이 밀렸다고!]
[아니, 별문제가 아닌 줄 알았지.]
[심각한 상황입니다. 특히 KMP-01은 낸드 메모리 수율이 늘어나서 잠정적으로 홀딩된 상황입니다. 도시바 측 생산량을 늘려야 합니다!]
[지금은 안 돼. 오성 전자가 납기를 완전히 어긴 것도 아니잖아. 다음 주까지는 기다려 보고 나서 결정하는 것으로 해.]
[하지만 대리점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애초에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은 세계 어떤 곳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니까. 오죽하면 4MB 낸드 메모리도 고가 제품에 속하겠어? 거기에 오성 전자 측은 다른 업체에서도 주문 요청을 받는 상황이잖아. 수급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하, 이거 죽겠습니다. 이렇게 양산이 어려운 경우는 또 처음입니다!]
콜린스와 KMP-01 공급 물량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은 밑이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마찬가지다. 애초에 최민혁이 무리수를 둬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건 오성 전자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최민혁 실장 덕분에 몰려오는 구매자 발걸음에 표정 관리를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
그 모습에 감탄한 장승일 실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KMP-01 이전만 해도 최민혁 행보는 선뜻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최민혁을 미래를 볼 수 있는 선지적인 경영자로 봤다.
거기에 LCD 패널과 관련된 부분은 최민혁 실장이 늘 디지털 시대로의 패러다임을 언급하면서 다 주장했던 부분이다.
당시는 말뿐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과실이 서서히 표면화되고 있었다.
IPS LCD 패널 가치는 PDP 패널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대다수 의견이었다.
장승일 실장도 이전과는 달리 마치 콘크리트가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부담감을 더 느꼈다.
‘어떻게 퍼즐을 풀어가야 하나.’
하지만 그의 고민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은 가벼운 운동을 한 후였다. 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오, 장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안 그래도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주 연락을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요.”
“감사합니다.”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 아니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님이 해준 일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살갑게 장승일 실장을 맞이했다. 그는 동행한 이들에 대해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눈치를 봤다. 최용욱 회장이나 최문경 부회장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괜히 최민혁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IPS LCD 사업 때문에 최 실장님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최민혁 표정은 좋았다. 딱히 반발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자신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특이했다.
장승일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민혁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호, 설마 KM 그룹도 IPS LCD 기술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마 LCD 패널에 관심이 있는 모든 대기업은 다 비슷할 겁니다. 앞날이 괜찮은 사업이니까요.”
“하지만 완전히 양산 단계는 아니라서 KM 그룹에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것까지 감안하면 조 단위의 자본이 필요해요.”
이 말을 하는 최민혁 표정은 크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장승일 실장이 생각하기에는 최민혁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최소한 까칠한 모습을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새로운 사업인데,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 합니다.”
최민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표정 변화를 주는 것은 필수다. 장승일 실장 안색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딱 10분 정도 시간을 끌었다.
장승일 얼굴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 침착한 장승일 실장치고는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최민혁은 내심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오성 전자도 예민하게 나오던데, 역시 장승일 실장도 별반 차이가 없구나. 도대체 날 얼마나 부담스러워하는 걸까?’
“호오, 각오가 대단합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좀 다릅니다. 특히 IPS LCD 패널 기술은 제가 좀 필요해서 KM 그룹 계열사에 넘기기 어려워 어려워요.”
“네?”
최민혁은 지긋한 눈빛으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굳이 IPS LCD 특허를 확보한 것은 필요에 의한 겁니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는 제가 원하는 일정을 맞춰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 일을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만약 KM 그룹처럼 새로 시작한다면 제 계획 전체가 일그러집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장승일 실장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면 어느 정도 협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금이나 인력 문제를 내세워도 대안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기간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 부분은 장승일 실장이 크게 걱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른 신사업에 대한 것이 엮여 있다면 이 협상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최민혁은 마치 그런 장승일 실장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하면 다른 패널 기술이라면 관심이 있습니까?”
“그건 좀…….”
“아뇨. IPS LCD만큼이나 가능성이 높은 기술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극 형태를 바꾼 새로운 타입의 기술이니, 개발 리스크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장승일 실장은 전혀 상상도 못한 대답에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그는 IPS LCD 기술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치 주머니 속에 든 동전을 꺼내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긴 IPS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기술은 알기 어렵겠죠.”
최민혁이 조성돈 팀장을 호출해서 내놓은 자료는 IPS와는 좀 달랐다.
“VA 기술…….”
“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가서 보여 드리죠.”
* * *
김호동 교수 연구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웠다. 연구실 입구에는 30명이 넘는 수트맨이 대기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김호동 교수를 만나려고 한 이들이다.
하지만 연구실 경비원이 나와서 잡상인 대하듯이 그들을 견제했다.
불만이 많은 이들은 한마디씩 했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IPS 기술 패널 이슈 이후에 김호동 교수 연구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 막 나오는 이들은 뜻밖에도 정보통신부에서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디지털 정부 과제 때문에 김호동 교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김호동 교수는 크게 난감한 얼굴로 일단 그들을 배웅했다.
최민혁이 그 광경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김호동 교수 역시 최민혁을 보자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 실장님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김호동 교수의 말수가 줄어든 것은 그만큼 외부에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 일행을 소개하면서 간단하게 용건부터 밝혔다.
“VA 패널을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가능은 합니다만 아직 문제가 좀 많습니다.”
“괜찮습니다.”
최민혁은 김호동 교수 안내를 받아서 VA 패널이 제작되는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반도체 클린룸처럼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최민혁 실장의 풍부한 자금 지원을 받아서 급조한 연구실이었다.
김호동 교수는 이미 신기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 방문을 받아보아서인지 장승일 실장 일행도 똑같이 바라보았다.
“…최민혁 실장님은 잘 아시겠지만, VA 패널은 광시야각의 단점을 해소하는 강점이 있습니다. 특히 명암비가 좋고, 검은색을 더 좋게 표현한다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진 같은 이미지에 한해서는 IPS보다 훨씬 낫다.
색재현력 역시 따라가기 힘든 기술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응답 속도가 IPS 패널에서 많이 떨어집니다.”
다만 이 VA 패널은 전원 오픈 상태에서 액정 분가 수직으로 서 있어서 액정이 눌려진 후에 복원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즉 터치가 필수적인 모바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TV, 노트북과 같은 아이템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상태에서 한창 테스트 중인 VA 패널을 살폈다.
실제 패널을 직접 만질 수는 없었다.
유리창을 통해서 다양한 실험이 진행 중인 VA 패널을 살폈다.
물론 최민혁 지시를 받은 김호동 교수가 내놓은 자료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역시 특허는 이미 출원이 된 상태였다.
‘그렇지. 최 실장님이 대충하는 일은 없으니까. 도대체 언제 출원을 한 거야? 역시 김호동 교수인가.’
김호동 교수가 차례대로 특허 출원을 진행했는데, 가장 먼저 진행한 일이 바로 VA 패널과 관련 기술 특허였다.
히타치 공작소 소송으로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최민혁은 물밑에서 신기술을 계속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액정 사업에 관심이 있는 한국이나 해외 대기업은 한국 언론에 의해서 과하게 조명을 받은 IPS 기술에 대한 탐욕 때문에 정작 IPS 기술에서 출발한 다양한 액정 패널 기술을 간과했다.
그런데 IPS 기술과는 달리 IPS 사촌격인 기술은 아이디어를 잘만 활용하면 특허출원하기가 쉽다.
IPS 패널로 명성을 떨치는 김호동 교수라면 이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힐끗 최민혁 실장 얼굴을 일별한 후에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