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00화 (400/1,021)

#400.

이수봉 상무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CRT 문제는 아니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 악명을 들어봤기에 이번 일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KM 전자와 커닝이 합작회사를 설립하면 오성 커닝이나 오성 전관 쪽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권태성 실장은 오히려 IPS LCD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는 물론 최민혁 실장을 만날 일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다만 이수봉 상무도 요즘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압박을 받았다. 위에서 콜린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물었다. 오성 커닝은 KM 전자와 거래를 하고 있어서 핵심 정보를 얻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단순히 권태성 실장 탓으로 돌리기에는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권 실장님, 아무리 그래도 최민혁 실장이 미국까지 가서 접촉한 커닝을 그냥 이대로만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권태성 실장도 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IPS LCD가 더 급했다.

“이 상무님께서 이렇게 직접 저에게 커닝 내부 사정을 알려준 것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IPS LCD는 자칫하면 우리 오성 그룹에 재앙이 될 수 있어요. 일단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더 급합니다!”

“좋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다만 만약 커닝과의 협상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커닝과 KM 전자라. 전 도저히 공통분모를 찾을 수가 없네요.”

이수봉 상무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도 권태성 실장을 탓하지 않았다. 스트레스와 피로에 절어서 반쯤 시체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잠은 자는 겁니까?”

권태성 기획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상 최근 한 달 내내 최민혁 실장이 일으킨 이슈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걱정해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커닝 부분은 따로 조사를 해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저대로 혹시 정보를 얻으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권태성 기획실장은 이수봉 상무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IPS LCD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최 실장이 LC 전자와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가 최악이야. 그런 일은 절대로 막아야 해. 최소한 LC 전자 행보를 막지 못한다면 우리도 IPS LCD 특허 협상을 벌여야 해.’

* * *

권태성 실장이 최민혁 실장에게 예민한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격화된 LCD 패널 경쟁 때문이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서 내년 상반기에 예정된 추가 투자를 진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뉴스가 나가기가 무섭게 LC 전자 역시 한 가지 사안을 발표했다.

“LC 전자 측에서 추가로 2억 5천만 달러를 더 투자했다고?”

임권수 부장은 권태성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올해 총투자 규모만 해도 무려 6억 5천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하.”

권태성 기획실장은 굳은 안색을 한 채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지금 태도를 봐서는 아주 같이 죽자고 덤벼드는 모양새다.

그는 안 그래도 오성 커닝 연락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추가로 LC 전자 문제를 고민하자 머릿속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일도 찜찜하지만, 이번 일이 더 급해. 진짜 이건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최민혁 실장이 미국 가서 뭔가 진행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미국 체류 기간이 너무 짧았다.

더욱이 이수봉 상무 이야기를 들어보면, 커닝에서 진행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어.’

이보다는 LC 전자의 행보가 심상치가 않았다.

덕분에 HY 전자를 비롯한 LCD 패널 업체의 움직임도 이전과는 달랐다. LC 전자가 오성 전자와 한바탕하자고 달려들자 구경만 하던 이들이 슬쩍 발을 내디뎌 보았다.

비록 PDP 시장에는 뛰어들지 못해도 다른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 때문에 정체된 지금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최민혁 실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면 이런 문제를 경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아니, 정말 최 실장이 우리와 관계가 좋았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최민혁 실장은 오성 전자가 이야기할 때는 겉으로는 잘 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변화는 없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최 실장이 우리와 손을 잡을 것 같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임권수 부장도 그렇지만 황광수 차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과거 KM 그룹 기획조정실에 있었기에 이 자리에 불려 왔는데, 솔직히 둘은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는 최민혁 실장과 지금 최민혁 실장이 같은 사람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권태성 실장은 자신들이 KM 그룹 출신이라고 툭하면 이렇게 불러내서 자문하니, 그게 똑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권태성 기획실장 라인이 된다는 생각에 좋아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권태성 기획실장 입지도 IPS LCD 사태 이후에 요즘은 간당간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는 밑에 직원을 불러놓고 답이 없는 직원을 대상으로 정신적으로 갈구는 것을 깨닫고는 자책했다.

“미안해. 내가 자네들을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임권수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이 KM 그룹을 떠날 때만 해도 미래가 암울한 회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오성 전자조차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문제는 단순히 눈치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오성 그룹 전체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네 생각으로는 우리가 만약 최민혁 실장이 IPS LCD 합작 제안을 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로 뭘 요구할 것 같은가?”

사실 정확히 반대되어야 할 이야기다. 어차피 기술은 KM 전자가 가지고 있지만 자체 LCD 생산 능력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성 전자가 거꾸로 대가를 제공해야 할 상황이었다.

임권수 부장은 힐끗 황광수 차장 눈치를 봤다.

황광수 차장은 당당한 얼굴을 한 채 침묵했다. 솔직히 그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아직은 KM 그룹이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권태성 실장이 혀를 찼다.

“이봐, 황 차장, 이번 일은 자네도 책임에서 피해 갈 수는 없어.”

“네? 하지만 전 LCD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누구는 알아? 그 IPS LCD 기술이 나온 지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 김호동 박사가 가장 잘 알겠지.”

“죄송합니다.”

그도 어지간해서는 군대처럼 임직원을 괴롭히고 싶지 않지만, 수동적인 황광수 차장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런 말을 듣자고 하는 것이 아니야. 대안을 제시하란 말이야. 지금 우리 기획 팀 분위기 몰라? 전략 기획실에서 얼마나 쪼는지 모르지? 자칫하면 우리 기획실 전체가 물갈이될 수도 있어!”

“그게…….”

황광수 차장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한편으로 아차 싶었다. 아무리 권태성 실장이 업무 효율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한 끝에 오히려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차라리 윗선에서 먼저 만나기보다는 아랫선에서 한번 만나 의견을 떠보는 것은 어떨까요?”

새로운 접근법에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었다.

“…계속해 봐.”

“최민혁 실장이 부담스러운 만큼 KM 전자 기획 팀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정 안 되면 KM 그룹 쪽도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흠.”

권태성 기획실장도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부담스러운 것이 최민혁 실장이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무슨 제안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겁이 났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갖춘 KM 전자 기획 팀이라면 상황이 다르지 않을까.

“할 수 있겠나?”

황광수 차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중요한 협상 자리가 아닙니다. 가볍게 이야기하는 식이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번 기회를 통해서 KM 전자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차라리 잘되었어. 임 부장도 황광수 차장을 도와줘.”

“…알겠습니다.”

임권수 부장은 썩 내키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반론을 내세우기 어려웠다.

* * *

황광수 차장은 처음 권태성 실장의 지시를 받고 나서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KM 그룹에 꽤 많은 라인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 내가 어쩌다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건지.’

그는 우선 KM 그룹 기획 조정실 직원 중에 구길모 차장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죄송합니다. 지금 너무 바빠서 틈이 나지 않습니다.]

[긴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20분 정도면 됩니다.]

[출장이 잡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럴 겁니까?!]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요즘 그룹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괜한 일에 휘말렸다가는 저도 제 자리를 보전하기 힘듭니다.]

[아니, 제가 회사 기밀을 알고 싶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나서 커피 한잔하는 것도 안 됩니까.]

[…네.]

냉랭한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는 구길모 차장의 태도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그런데 구길모 차장 태도는 오히려 나쁘게 볼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직원은 더 심했다.

[황 차장님, 다시는 연락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음에 연락하면 기획조정실에 제보하겠습니다!]

심지어 전화 통화 중에 끊어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기가 막히네.’

황광수 차장이 KM 그룹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반응이다.

아니, 한편으로 의아했다. 오성 전자 기획실로 이직한 후에 계속 연락을 해오던 이들조차 연락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뒤늦게야 KM 그룹 내의 구설수에 괜히 휩쓸려서 제재받을까 염려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KM 그룹이 컸다 이런 의미다. 그것도 오성 전자보다 낫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직할 때만 해도 실로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황광수 차장은 결국 차선책으로 KM 전자 기획실 직원에 연락해 보았다. 여기는 KM 그룹보다 더 심했다. 아예 통화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고, 결국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KM 그룹 관련자에게 일일이 다 전화하다가 겨우 한 사람과 약속을 정할 수 있었다.

바로 벨린 투자의 우영민 부장이었다. 그는 과거 황광수 차장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있지만, 오성 전자 내의 연결 때문에 약속 장소인 한정식집에 나왔다.

황광수 차장은 대화를 편하게 하려고 우선 술부터 권했다.

도수가 꽤 높은 고량주(?)였다.

술이 좀 취하면 분위기가 좋아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영민 부장은 정중하게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업무 중에 술을 마시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

황광수 차장은 어지간해서는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버럭 소리쳤다.

“야, 너무한 거 아냐?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너 힘들 때 옆에서 도와준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잊었어?!!!”

우영민 부장은 찔끔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형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회사 분위기 말입니다. 특히 IPS LCD 때문에 시끄럽죠. 괜한 이야기를 했다가 저도 문젯거리가 되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벨린 투자는 KM 전자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잖아?”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황광수 차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황광수 차장도 민망해서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어서 고량주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나마 좀 나았다. 술기운이 오르자 내심 숨기고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아니, 내 말은 좋게 좋게 가자는 거야. 너도 벨린 투자에서 평생 있을 것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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