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뭐? 최 실장이 정말 한국으로 돌아갔습니까?!”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깜짝 놀랐다. 그 역시 데니스 워드 부사장과 대립하기는 하지만 록몬드 오먼 부장에게서 추가로 받은 KM 전자 자료를 검토 중이었다. 뒤늦게야 아차 싶었다. KM 전자는 결코 가볍게 볼 회사는 아니었다. 왠지 최민혁에 대해서 의심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니.
록몬드 오먼 부장 역시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그는 다음 미팅 일정을 잡기 위해서 연락했다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켐코 사업은 딱히 KM 전자에게 중요한 사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CRT와는 조금 다릅니다. 굳이 오성 전자처럼 합작 회사 설립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 쪽과 협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
록몬드 오먼 부장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젠장맞을.”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결국 데니스 워드 부사장실을 직접 찾아갔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떠난 것을 모두 데니스 워드 부사장 책임으로 돌렸다.
“데니스 부사장님은 그 어떤 대안이라도 있는 겁니까? 지금 우리 회사가 광섬유와 디스플레이 패널 쪽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켐코 같은 쓰레기 사업부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까?!”
갑작스러운 막말에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크게 당황했다.
제이크 샌더슨 CTO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밤낮없이 계속 켐코 가치를 알아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정말 최 실장이 아무런 말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간 겁니까?”
“제가 지금 최민혁 실장 한국행 비행기 좌석까지 확인해 줘야 합니까?!”
“으음.”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힐끗 두통 때문에 이마를 잡고 있는 제이크 샌더슨 CTO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제이크 샌더슨 CTO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 역시 도저히 영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최민혁 실장이 집요하게 제프리 하우튼 이사에게 달라붙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다.
그런데 너무 쉽게 최민혁이 켐코 사업부 인수를 포기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혹시 켐코 사업부 매출이 둔화되면, 그 책임을 저에게 돌려서 공격하려고 한 겁니까?”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됩니까. 데니스 부사장님은 사사건건 저를 공격한 것으로 압니다. 켐코 사업부를 비롯한 특수 소재 매출 격감은 절 공격할 좋은 수단입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 특수 소재 매출은 고만고만해서 잘 변화하지 않았다. 꾸준한 실적이 나오기는 하지만 다른 사업부와 비교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장래가 밝은 광섬유와 같은 사업에 비하면 사양산업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특수 소재를 주로 다룬 글라스 사업부 전망이 좋은 것은 아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사님, 그런 억측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글쎄, 과연 그게 억측일까요? 형 모리스 이사 쪽에 선을 댄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더군요. 지난 이사회에서 딱 보이던데요. 부회장님이나 큰 형이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고 아주 절 괄시하더군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르더군요.”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차가운 눈으로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직시한 후에 몸을 돌렸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와의 갈등이 문제였다. 이것 자체보다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요즘 들어서 관계가 과거만 못한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이사회 소식을 들었다면, 오해할 수도 있어.’
* * *
커닝이라고 해서 내부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문 경영인과 상속인 사이에서 미묘한 문제는 꾸준히 있었다.
그중에 가장 심한 경우는 바로 제프리 하우튼 이사였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굳이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밀어주면서도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경고한 것은 무능한 그의 능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황이 좀 다르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멋대로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견제할 수도 있다. 심지어 모리스 하우튼 이사 쪽에 손을 들어주면서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경영권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조용했던 커닝 내부의 갈등이 서서히 표면화된 것이었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직접 이사회를 다시 소집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상속인 사이에서 커지는 경영권 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욕망 때문이다.
[아니, 최민혁 실장이 홀로 성급하게 판단해서 켐코 사업부 인수를 진행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사업부 인수가 무슨 장난입니까. 그걸 최민혁 실장이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한국의 재벌 3세인 것은 모릅니까. 그 혼자 결정할 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심지어 벨린 투자 실소유주란 설도 있어요. 지금까지 투자도 최민혁 실장이 주도한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합시다!]
[이게 어떻게 말이 안 됩니까. 기회가 왔을 때 켐코 사업부를 정리해서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기회를 놓쳤지 않습니까. 이게 모두 데니스 워드 부사장의 독단 때문이지 않습니까!]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참석한 이사회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여러 파벌로 나누어진 이사회는 다들 믿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조용하던 커닝 이사회 분위기가 살얼음처럼 변한 이유다.
자칫 과거에는 그냥 넘어갈 실수라도 아차 하면 임원 자리에서 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켐코 사업부 매각 이슈는 단숨에 커닝 경영권 분쟁의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
최민혁 처지에서는 조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더 웃기는 것은 이 소식을 다름 아닌 제프리 하우튼 이사 입을 통해서 들었다는 것이다.
“황당하군요.”
시차 적응한다고 고생하던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 눈치를 봤다.
“이미 예상하셨지 않습니까?”
“아니, 제가 사람 마음을 다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사업부 인수를 포기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닙니까?”
“아, 아닙니다!”
최민혁은 골치가 아파서 이 안건을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CDMA 판에 숟가락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지금 당장은 너무 늦었어. 설사 내가 끼어든다고 해도 상황이 좋지는 않을 거야.’
퀄컴 역시 커닝처럼 바보는 아니다. 그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투자에 대해서 좋아하면서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복잡한 시선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IPS LCD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장실을 찾은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미국 내에 있었던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부쩍 외압을 느낀 오영근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커닝의 켐코는 또 뭔가?”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경도가 강한 특수 유리입니다. 기스에 강해서 꽤 유용합니다.”
“정말 모르겠어. 아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IPS LCD 기술 때문에 이제 소형 LCD 제작이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호 재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아.”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다만 문형섭 부사장은 곧 고개를 갸웃했다.
“보호 필름이 있지 않나?”
“재질이 다릅니다. 같은 유리 형태가 되어야 오히려 사람들이 더 좋아할 겁니다.”
“그게 그런 가치가 있을까?”
최민혁은 다소 거만한 표정을 한 채 힐끗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도 켐코에 대한 내막을 말해줄까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이번 켐코 사업부 인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돈이 걱정이라면 제 개인 돈으로 켐코 사업부를 인수할 생각이었습니다.”
오영근 사장이 발끈했다.
“이봐 최 실장, 내가 언제 사업부 인수를 반대했나?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러지. 지금 IPS LCD 때문에 난리가 났어. 회장님은 계속 자네 연락처를 알아내라고 독촉을 하지, 아는 지인 통해서 계속 업체 미팅 요청이 들어오지. 내가 뭘 알아야 그들을 만나서 협상할 것 아닌가? 나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야. 그런데 자네는 정작 뜬금없는 켐코 사업부 인수한다고 미국으로 가버렸잖아!”
“하하하, 죄송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오영근 사장도 딱히 최민혁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기획실 통해서 보고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획실 보고안이 모든 것을 다 담은 것은 아니었다.
IPS LCD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기획실은 정작 아직도 이 상황에 대한 영문을 모르는 중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LCD 패널 아닌가. 이 사업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업체를 만나 봐야겠죠.”
“알겠네. 하지만 내 입장이 있어. 나야 이 자리를 언제까지 고집할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장은 사절이네.”
“죄송합니다. 그런 문제가 없도록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회장님에게 연락이나 먼저 하게나.”
“…알았습니다.”
최민혁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오영근 사장이 최용욱 회장에게 거의 스토킹을 당했다는 것을 얼굴만 봐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하긴 할아버지에 대한 압박도 장난이 아니겠어. 그나저나 누구부터 만나야 하나.’
* * *
처음에는 한국 대기업도 IPS LCD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히타치 공작소 소송 이후에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재조사를 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IPS LCD는 다른 신기술과는 달리 당장 상업화가 가능한 기술이었다.
특히 오성 전자는 LC 전자보다 상황이 더욱더 심각했다.
그들은 손실은 문제치고, 신기술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액정 표시 장치에 투자를 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현재 월 생산 능력이 10만 개인 생산설비에 3억 달러를 투자하고, 18만 개까지 늘린 것이 그 하나다.
이들은 LCD 패널에 필요한 컬러필터와 같은 부품 양산에 대해서 재검토했다.
제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이미 들어간 것이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오성 전관을 비롯한 LCD 패널과 관련이 있는 계열사의 압박 때문에 계속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찾았다.
그가 최민혁 실장 동선을 파악한 것은 뜻밖에도 오성 코닝을 통해서였다.
“…최 실장이 미국에 가 있었다고요?”
차분한 성격의 오성 커닝 이수봉 상무도 골치가 아픈 얼굴이었다.
“커닝의 제이크 샌더슨 CTO 통해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커닝? 아니,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최민혁 실장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커닝 본사 측에서 정보를 요청한 사안입니다. 아무래도 국내에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잘 아니, 추가 정보를 원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요?”
“그걸 커닝 본사 측에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지인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커닝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툴툴거렸다.
“그거랑 우리 회사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 연락을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미 최민혁 실장은 한국으로 들어와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좀 빨리 연락을 해야 했는데, 커닝 측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커닝 본사에 압박할 정도는 아니니까.”
권태성 실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번 안건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최민혁의 행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닝에 뭐가 있지? 설마 차세대 CRT를 노리는 건가?’
“혹시 모르니, 커닝 쪽을 한번 살펴보세요. 만약 차세대 CRT를 노리고 커닝과 합작 회사를 설립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