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그게 가능합니까?”
“하는 데까지 해봐야죠. 차세대 콜린스 개발 때문에 머리가 아픕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콜린스의 명성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그저 이름 정도만 들었다. 하지만 차세대 IPS LCD에 대한 것은 안다.
그래서 최민혁의 반응이 의아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아, IPS LCD 기술 말입니까. 우리로서는 LCD 패널을 양산하기 어렵습니다. 그쪽은 수천억이 들어가는 분야인데, 작년 매출 4억 달러가 좀 넘는 기업이 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KM 전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이건 록몬드 오먼 부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만남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KM 전자에 관한 이야기는 막연한 정보뿐이다. KM 전자를 얕잡아 본 것이었다.
최민혁은 이 자리에서 켐코 사업을 인수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KM 전자의 어두운 미래에 관한 이야기만 나열했다.
신기술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한계와 제약에 대한 것만 늘어놓았다.
“K투스? 글쎄요. 그게 세계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10년은 족히 걸립니다. IPS LCD는 더 합니다. 양산하기 위해서 투자를 계속 늘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검토하면 역시 10년은 족히 걸릴 일입니다. MP3 역시 아직 시장이 만들어진 상황이 아닙니다.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5~6년은 족히 걸립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대부분 기업이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이 흐름에 올라타면, 그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KM 전자에서 계속 매달리는 것뿐이다.
지금 KM 전자에 있어서 가장 큰 수익원은 역시 콜린스였다. 따라서 새로운 CRT 개발이 KM 전자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너무 독선적입니다. 우리 생각을 말해도 아예 듣지를 않으니까요. 차세대 CRT가 무슨 대단한 기술 혁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양반이 원래 보수적인 인물입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최민혁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확실히 고민이 많겠어. 그리고 왜 나에게 연락을 했는지도 이해가 되네. 데니스 부사장을 경험해 보면 다들 치를 떠니까.’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록몬드 오먼 부장이 멍청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최 실장님의 제안을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최민혁은 미래가 불투명한 기업가 퍼포먼스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
조성돈 팀장이나 김명준 과장은 그 연기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리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KM 전자를 저렇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일부 믿는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둘은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에 대한 증오 때문에 최 실장님 말을 믿는 것이겠지.’
* * *
1851년에 설립된 커닝은 특수 유리 시장을 선택했다. TV 유리를 생산하면서 빠른 성장을 이끌었고, 세계 최초로 광섬유를 상용화했다.
90년에 들어와서는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는데, 디스플레이, 광통신, 환경 기술, 특수 소재, 생명 과학이 핵심이다.
특히 유리 기판 시장 매출이 전체 매출의 과반수에 차지할 정도로 이 분야는 독보적이다. 이 중에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도 포함한다.
PDP 패널에 대한 커닝의 관심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굳이 오성 전자와 손을 잡고, 오성 커닝에 투자를 늘리는 이유다.
이들 처지에서 본다면 켐코와 같은 특수 소재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실제로 매출이 큰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커닝은 최근 쓸데없이 늘어난 사업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이사회에서 문제로 삼은 것은 이 부분이다.
“우리 회사가 언제부터 문어발 확장식으로 사업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광통신에 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으니, 차라리 이 사업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광통신 사업은 광케이블 가입자망 증가 수나 데이터 센터 확충과 같은 변화 때문에 시장 수요는 무섭게 성장했다.
특히 통신사업에 따른 광섬유의 수요 급증은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일이다.
디스플레이 사업을 책임진 데니스 워드 부사장으로서는 무시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의 형인 모리스 하우튼 이사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는 막내가 자신을 띄워 주는 상황이 어색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매사에 시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가 바로 제프리 하우튼 이사였기 때문이다.
‘저놈이 왜 저래?’
데니스 워드 부사장 역시 의아하기는 매한가지다. 이사진 대부분이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따라서 전 불필요하게 늘어난 특수 소재나 생활용품 중에서 쓸데없는 사업부는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리스 하우튼 이사가 툴툴거렸다.
“제프리 이사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쪽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제값 주고 인수하겠다고 하면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건 모리스 하우튼 이사 의견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다들 비슷했다. 그들 처지에서 아쉬울 것이 없었다.
특수 소재는 비록 돈이 안 된다고 해도 독점적인 시장 영향력이 있었다. 굳이 서둘러서 사업부를 매각할 이유는 없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자신의 입맛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슬쩍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사업부 인수자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모리스 하우튼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사회 자리만 아니었다면 한 소리 했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혹시 KM 전자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콜린스를 개발해서 우리와도 무관한 업체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켐코 사업부 인수를 제안해 왔습니다.”
“KM 전자?”
이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KM 전자를 아는 이들도 있지만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상황이 너무 생뚱맞아서 제각기 제프리 하우튼 이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흠.”
모리스 하우튼 이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다른 이사회 임원의 반응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크게 소리쳤다.
“이건 데니스 부사장님께서도 아시는 사실입니다!”
회사 내에서 괜한 문제를 만들기 싫었던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에 결국 나섰다.
“사실입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다시 슬쩍 나섰다.
“지금 우리 커닝의 주된 관심사는 디스플레이, 광섬유가 핵심입니다.”
실제로 커닝의 매출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 디스플레이, 광섬유다. 특히 광섬유에 대한 관심은 그 무엇보다 뜨겁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슬쩍 KM 전자와 최민혁 실장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이사회에 흘렸다.
“아마 콜린스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 최근 MP3 원천 기술을 소유한 KM 전자는 귀에 익을 겁니다. 그 KM 전자의 기획실장이 바로 최민혁 실장입니다.”
마치 최민혁 실장 찬양가와도 같은 이야기에 이사회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거짓말 아니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갑자기 한국의 KM 전자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다.
하지만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한 가지를 걸고 넘어갔다.
“아마 ARN 지분 헐값 인수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일을 배후에서 총 책임진 사람이 바로 최민혁 실장입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커닝 임원 대다수는 깜짝 놀랐다. 그들 역시 뒤늦게 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K투스 사태 이후에 더 말이 많았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차가운 눈으로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이 우리에게 켐코 사업부 인수를 제안한 것은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켐코 사업부가 매출이 적다고 해서 매각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프리 하우튼 이사도 마냥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데니스 우드 부사장님은 도대체 켐코 사업부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제가 따로 알아본 바로는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사업부가 바로 켐코입니다!”
사실 특수 소재라면 차라리 제약이나 실험실 제품이 더 매출 규모가 컸다. 레이싱 유리에 집중하는 켐코 사업부가 시선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의 의견이 마냥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데니스 우드 부사장을 미는 파벌과 그 반대 파벌의 대립이다.
데니스 우드 부사장을 싫어하는 이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 의견을 내밀었다.
반대로 데니스 우드 부사장 측근인 이들은 원천 기술 가치를 주장하면서 대립했다.
그 조용한 커닝 이사회는 마치 조선의 당파 싸움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분위기가 격화되었다.
하지만 이들 대립에 중도파 임원이 나서지 않은 것은 상황을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모리스 하우튼 이사는 중도 성향답게 일단 데니스 우드 부사장 편을 들어주었다.
“아직은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일단 좀 더 검토한 후에 이번 안건을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업부 구조조정 측면에서 말입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힐끗 이사회 분위기를 살폈다. 예상대로 데니스 워드 부사장 반대 세력의 반발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데니스 우드 부사장을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그 역시 단번에 이번 일이 결정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두고 보자!’
데니스 워드 부사장 안색은 좋지 않았다. 다행히 모리스 하우튼 이사가 자기에게 손을 들어줬지만, 자신에게 앙금이 있는 이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에이모리 부회장님이 이걸 걱정하고 있었는데…….’
* * *
최민혁은 커닝 이사회 내의 이야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통해서 들었다. 입이 가벼운 제프리 하우튼 이사에게 달콤한 이야기를 해준 대가였다.
하지만 그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커닝 이사회가 대립한 것은 좋았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멱살 잡고 싸우는 것까지는 무리였을까? 아. 역시 그건 힘들겠지.’
“내 시간이 아깝네요.”
조성돈 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업부 매각이 단기에 결정 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 진행된 것만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할 일이 많아요. 언제까지 켐코 하나 붙잡고 시간 낭비할 수는 없어요.”
최민혁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인생 1회차에서 에플이 켐코 사업부를 인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뒤늦게야 그 이유가 커닝의 보수적인 기업 성향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 사업부에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니, 아쉬운 것이 없겠지. 비록 커닝 내부의 갈등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결국 대안은 차라리 에플처럼 그냥 켐코를 공급받는 일이다.
최민혁은 결국 고심한 끝에 이번 켐코 사업부 인수는 보류하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네? 이대로 말입니까?”
최민혁은 입맛을 다셨다. IPS LCD로 시작된 자신의 평판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뭐, 어쩔 수 없겠지. 우연도 한 번 두 번이지. 계속 반복되면 상황이 달라져. 이제는 숨긴다고 될 문제가 아니니까.’
“정확히는 상황이 이래서 그래요. 괜히 미국에 남아서 켐코 사업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설사 인수가 가능해도 문제가 될 겁니다. 커닝에서 사업부 매각 대금을 마구잡이로 올릴 테니까.”
“하지만 켐코 사업부 인수는 실장님이 계획한 일 중에 중요한 부분 아닙니까. 조금은 지켜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뇨. 지금 한국 분위기를 봐서는 너무 성급한 것 같아요. 가끔은 이렇게 삽질하는 맛도 있어야죠. 뭐 뻥카라고 합시다.”
“…알겠습니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최민혁의 표정과는 달리 내심 다른 꿍꿍이도 있다. 사냥 팀의 갈등이 커지는 것은 언제나 사냥감을 놓친 이후다.
커닝 내부에 갈등의 씨앗을 심어놓은 상황으로 충분하다고 봤다.
‘뭐,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이 싫은 것도 한 이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