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93화 (393/1,021)

#393.

“하지만 KM 전자에서 발표한 IPS 기술은 액정 응답 특성이 월등히 빠릅니다.”

“흥, 그게 중요한 것이 아냐. 이미 우리가 낸 특허가 있잖아. 그것을 토대로 해서 KM 전자가 우리 기술을 훔쳤을 수도 있잖아. 멜코사의 대응을 문제 삼으란 말이야!”

히타치 공작소와 멜코사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문서로 남아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진행한 연구 실적도 남아 있다.

그 문서는 충분한 증거 가치가 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지금 KM 전자가 내놓은 IPS LCD 특허는 멜코사가 KM 전자와 짜고 뒤통수를 쳤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인생 1회차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개연성은 차고도 넘쳤다.

다만 이미 KM 전자가 한국 언론을 통해서 IPS 기술을 발표해 버렸다.

히타치 공작소가 아무리 이 문제를 걸고넘어져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가 박사가 회복되면 바로 소송을 진행해. 이대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KM 전자가 강하게 반발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한국 대법원이 아니라 미국 지방 법원에 소송을 걸면 되잖아. 어차피 KM 전자 미국 지사가 있을 것 아냐. 그쪽을 통해서 공격해.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우리가 3년 넘게 걸려서 고생해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어. 그런데 어떻게 우리보다 빨라. 멜코사 통해서 얻은 정보로 우리 히타치 공작소 기술을 빼돌린 것이 틀림없어.”

즉 일단 소송을 걸어서 시간을 끌고, 외부적으로 따로 히타치 공작소 내부를 조사하란 뜻이다. 그리고 이 계획은 가능성이 높았다.

“…알겠습니다.”

* * *

IPS LCD 관련 내막을 잘 모르는 국내 기업은 혼란스러웠다.

KM 그룹 내에서도 말들이 나올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최민혁은 이걸 오히려 방조해서 노이즈 마케팅으로 삼았다.

KM 전자, KM 그룹, 관련 대기업을 둘러싼 잡음은 끝도 없었다.

심지어 김호동 교수는 이 혼란극의 주인공이 되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하루에 한 번꼴로 방송사, 언론사가 찾아와서 그를 괴롭혔다.

[IPS LCD 기술은 기존의 LCD 장점을 뛰어넘은 새로운 기술입니다.]

[하지만 늦은 응답 특성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5㎳ 응답 특성 패널을 개발했다고 했습니다만?]

[직접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언론사는 처음에는 김호동 교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도 시현을 보고서야 25㎳ 기사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김호동 교수 처지에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기자들 등쌀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LC 전자 기획실 전체 회의에서 안 한병수 부장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저, 정말 응답 속도가 25㎳로 줄었어?!”

임명진 차장은 자신이 대답하기보다는 LC 전자 중앙 연구소 권기식 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피로에 절어 있던 권기식 부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김호동 교수를 직접 만나서 응답 특성을 확인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소리야?!”

이성을 반쯤 잃은 한병수 부장은 혼자 날뛰었지만, 딱히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이들 역시 심증은 다르지 않았다.

권기식 부장은 의혹이 가득한 말에도 푸념을 털어놓았다.

“제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이번 연구에 최민혁 실장은 생각보다 자금을 많이 퍼부었습니다. 1억 가까이 들어가는 실험용 세트가 동작하지 않으면 그냥 버리는 식으로 처리했습니다. 치환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몇 개의 치환기를 사용한 패널 중에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것은 연구실 창고에 버려져 있었다.

권기식 부장이 아무리 LC라는 대기업의 연구소에 있다고 하지만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김호동 교수의 실력이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문제가 된다고 해도 실력은 괜찮은 분이니까요. 그런 분에게 막대한 자금을 퍼붓는다면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봐요, 권 부장, 지금 우리가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겁니까?!”

평소와는 전혀 다른 한병수 부장 행동에 권기식 부장도 움찔했다. 그 역시 한병수 부장이 크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만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푸념을 털어놓고 싶었다.

김호동 교수에게서 손을 뗀 것은 큰 실수라고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 자리에서 그 부분은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잠깐 눈동자를 굴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떠나서 김호동 교수 연구를 중지시킨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제가 몇 번이나 항의한 사실입니다.”

“권 부장, 설마 우리가 중단시킨 연구가 차세대 LCD 액정이라고 지금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한 투자를 계속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올…….”

쾅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난 한병수 부장.

그의 두 눈은 뱀파이어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권기식 부장은 아차 싶었다. 그는 경악한 회의실 분위기를 뒤늦게 살피고는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권 부장, 지금 뭘 하자는 거야? 그래서 지금 이 모든 일은 다 내 책임이란 거야? 김호동 교수 연구 중단에 당신도 찬성했잖아!!!”

권기식 부장은 그제야 슬쩍 한병수 부장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대다수는 다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은 뒤늦게야 김호동 교수 결과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들이 김호동 교수 연구 중단에 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LC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권기식 부장을 쳐다보았다.

‘하,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구나.’

권기식 부장은 충분한 보험을 만들었다고 확신하자 슬쩍 대안을 내놓았다.

“이미 우리 팀 내부에서 검토한 바로는 김호동 교수가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연구 샘플에 불과합니다. 우리 실무 팀이 손을 쓴다면, 당장 6㎳는 줄일 수가 있고, 치환기와 같이 검토한다면 추가로 3㎳가 가능합니다.”

결국 LCD 응답 속도를 16㎳까지는 무리하지 않더라도 줄이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분노로 미쳐 있던 한병수 부장도 깜짝 놀랐다.

“그, 그게 정, 정말입니까?”

다시 존대도 돌아온 말. 한병수 부장도 이제 정신을 차렸다.

권기식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지금 김호동 교수 연구실에 가서 확인한 사안입니다. 김호동 교수도 이미 인정했고, 아직까지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맙소사!”

한병수 부장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 역시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차세대 패널에서 LCD가 PDP에 밀린 것은 느린 응답 특성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LCD 패널은 싱글 전극이라서 양산성도 좋았다. 심지어 기본적으로 수명 제한이 있는 PDP보다는 월등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 대기업만이 아니라 일본 대기업이 PDP에 집착한 것은 LCD의 단점을 극복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이만 끝냅시다.”

단호한 한병수 부장의 말에도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권기식 부장은 한병수 부장이 따로 호출하자 씩 웃기만 했다.

한병수가 진지하게 나오자 김영광 실장도 입을 다물었다.

김영광 기획실장 역시 내심 크게 당황했다. 자칫하면 이 문제 때문에 기획실 역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설마 잘리지는 않겠지.’

* * *

한병수 부장은 따로 핵심 인물만 추려서 우선 김호동 교수와 있었던 일부터 따로 정리했다. 연구 중단에 대한 것도 바꾸었다.

그들은 당장 사람을 보내어 김호동 교수와 연구를 다시 진행했다. 정확히는 스토커처럼 계속 매달려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물론 일방적으로 투자금을 늘렸고, 거기에 관한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김호동 교수는 황당한 LC 전자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미 중요한 연구는 다 끝났고, 남은 것은 추가 특허이기 때문이다.

한병수 부장은 다음 순서로 KM 전자에 정식 미팅을 요청했다.

조성돈 팀장은 이 연락을 받자 바로 최민혁 실장에게 보고했다.

“어떻게 할까요?”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으니, 일단 시간을 계속 끌어보세요.”

“LC 전자를 파트너로 삼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물론 그런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나리오대로 LC 전자가 움직여야 합니다. LC 전자는 지금은 우리 말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네?”

최민혁은 이미 페이즈 3단계에 대해서 슬쩍 힌트를 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4인치 이하의 소형 LCD입니다. 그런데 LC 전자는 상황이 좀 달라요. 그들은 중대형 LCD를 먼저 연구하려 할 겁니다.”

“콜린스 때문이군요.”

“아무래도 그 시장을 확인했으니까요.”

“확실히 대형 LCD 시장이 먼저 열리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건 좀 심각하게 한번 검토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IPS LCD는 양산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어요. 응답 특성을 설사 10㎳까지 줄인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하지만 소형 LCD는 좀 달라요.”

정확히는 빛샘과 같은 현상이다. IPS LCD의 고질적인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았다. 인생 1회차 지식으로 그 문제를 잘 아는 최민혁 실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소형 LCD 개발이 더 쉽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크기가 작으니까요. 소형 LCD 통해서 기반 기술을 쌓고, 중대형 LCD로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LC 전자에게 좋은데, 그쪽 생각은 좀 다를 겁니다.”

“LC 전자와 협상이 쉽지 않겠군요.”

“그런 셈이죠. LCD 패널 마케팅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새로운 산업이 열리는 셈이니까요. 굳이 그렇다고 LC 전자한테 공짜로 퍼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대기업의 시선을 이쪽으로 모으는 것도 좋지. 이미 IPS LCD는 끝난 일이니, 그 기회에 다음 기술을 확보하는 것도 좋아.’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

조성돈 팀장은 음흉하게 웃고 있는 최민혁 얼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예측 가능한 문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LC 전자가 저렇게 적극 나서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사업 자체가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우리 쪽에서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 기술을 발표한 것만으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랬다.

LCD 사업은 사업 자체에 들어가는 비용이 일이백억이 아니라 천억이 기본 단위로 들어가는 장치 산업이다. LC 전자가 대화를 하자고 나오는 것만으로 이미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굳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LCD 패널은 당장 남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만.”

“터치 때문입니다. 지금 LCD 패널로는 터치 기능을 넣기 어려워요. 단일 전극의 IPS LCD는 위에서 밀어도 액정이 밀리는 현상이 없죠.”

액정이 밀리는 현상은 듀얼 전극의 고질적인 문제다. 싱글 채널이 되면 그런 문제가 사라진다.

실제로 최민혁은 샘플을 가지고 조성돈 팀장에게 보여주었다.

“……?”

조성돈 팀장은 영문을 몰라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게 장점이라는 것을 알아도 어디에 적용되는 지까지는 몰랐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 기억을 떠올리면서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곧 이 의미를 알게 될 겁니다. 이 LCD 패널이 있어야 제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기술을 우선 확보한 겁니다.”

조성돈 팀장이 곧 이 부분에 관해서 질문하려는 순간에 박상기 차장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실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히타치 공작소에서 정식으로 우리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최민혁은 황당해서 웃고 말았다.

“그게 말이 됩니까? 히타치 공작소에서는 아직 LCD 패널 관련 특허를 내지도 않았는데?”

그는 히타치 공작소의 소송 기사를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IPS LCD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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