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죄송하지만 히타치 측에서는 관심을 끈 것 아니었습니까? 더욱이 그쪽은 특허 매입으로 계속 질질 끌었지 않습니까?]
특허 매입 금액 협상 때문이었다. 히타치 공작소 내부에서도 이 액정 특허 치환기에 말이 많았다. 그들이 원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다.
멜코사 입장에서는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본인들은 굳이 LCD 쪽에 깊은 관심이 없어서다. 실상 상업적인 가치가 떨어져서라는 것이 정확했다.
시가 박사도 이 부분을 노려서 계약 협상을 이어갔다.
[하, 그게 말이 됩니까. 특허 매입 협상 때문 아닙니까. 아니, 특허 매입을 하면서 경제적인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압니다. 그런데 다른 회사 입장은 달랐습니다. 우리 쪽이 원하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굳이 돈도 안 되는 기술을 붙잡고 있어봐야 의미가 없으니까요.]
멜코사는 LCD 액정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연구 과제 중의 하나가 LCD 액정이었다.
특히 액정과 관련된 화학적인 조성은 다양한 곳에서 사용된다.
LCD 액정은 그 분야 중의 하나일 뿐이다.
멜코사는 이 특허가 세기적인 기술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히타치 공작소에게도 책임이 있다. 처음에는 이 회사가 자사 기술을 가지고 뭔가 매달리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히타치 측에서 슬슬 발 빼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시가 박사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하, 하지만 최소한 우리 히타치 공작소에 통보는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말이 좀 이상하시네요. 아니, 그쪽에서 관심이 없었지 않습니까. 다른 회사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히타치만 보고 있어야 합니까?!]
[…….]
시가 마사아키 박사는 아차 싶었다. 아직은 정확히 차세대 액정 연구가 아직은 확정되지 않았다. 그조차 솔직히 이게 상업적으로 돈이 될까에 대해 의심했다.
[이미 권리는 전부 KM 전자에 넘어갔으니, 그쪽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KM 전자?]
황당한 시가 박사는 기가 막혀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정말 KM 전자 측에서 액정 특허를 사들인 겁니까?]
[네. 그러니 이제 특허 문의는 KM 전자로 해주세요.]
냉정하게 끊어진 전화.
“…….”
시가 박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도대체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 * *
시가 박사는 뒤늦게 KM 전자 관련 자료를 다시 일일이 뒤졌다. 아니,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멜코사 액정을 공급받아서 연구하는 업체를 확인했다.
‘KM 전자는 우연이야. 말이 안 되잖아. 갑자기 멜코사 특허에 관심을 두다니. 틀림없이 운이 좋아서 그래. 맞아. 가만 이, 이것은…….’
다행히 멜코사 액정과 관련된 특허 출원이 아직 되어 있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상황은 달라졌다.
“바, 박사님, 큰일 났습니다. 이거 한번 보십시오!”
바로 TV였다. 그것도 한국 메이저 방송사에서 LCD 관련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뉴스를 내보냈다.
[한국대 김호동 박사 연구 팀이 고안한 IPS 방식의 LCD는 기존 TN LCD의 취약점을 개선했습니다. 가장 크게 꼽을 수 있는 점은 시야각과 색 재현율입니다. 이 기술은 멜코사의 액정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술로 기존의 LCD와는 차별화된 성능을 보여줍니다.]
그저 흔하디흔한 뉴스였다.
흔히 나오는 신기술을 뉴스에 내보낸 것이었다.
실제로 이 뉴스를 접한 한국인조차 그저 새로운 신기술을 개발했네! 라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저 방식은 시가 박사가 연구하는 것과 거의 유사했다.
물론 차이점이 존재했다.
보다 발전되고, 구체적이면서도 이미 실현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뉴스 화면에는 실제로 동작하는 LCD가 나와 있었다.
선을 복잡하게 연결해서 박살이 난 LCD였지만 놀랍게도 TV 화면이 그럭저럭 나왔다.
“……!”
시가 박사는 뒤늦게야 이번 연구를 성공한 연구 팀이 자신이 주목하는 김호동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충격을 크게 받고는 결국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바, 박사님, 박사님!”
뒤늦게 시가 박사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IPS 관련 자료를 발견하자 팀원 역시 충격을 받고 말았다.
* * *
범용구 기자는 갑작스러운 기자회견 요청에 그 어떤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한영 일보가 이미 단단히 쓴맛을 본 터라 마음을 다잡으며 최경진 편집장 지시에 KM 전자 본사 회의실을 찾았다.
회의실은 이미 스무 곳의 언론사에 나온 기자로 가득했다.
심지어 메이저 방송사는 카메라 촬영을 위해서 정신없이 움직였다.
“갑자기 무슨 기자회견일까?”
“K투스 이야기겠지. 솔직히 그 기술을 혼자 다 먹는 것은 그렇잖아.”
“하긴 다른 대기업은 지금 난리가 났던데, 이대로 갈 수는 없겠지.”
회의실에 참석한 기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일방적인 KM 전자를 비난했다. 물론 K투스를 고안한 점은 인정해도 이걸 혼자 다 먹는 것은 아니었다.
범용구 기자는 생각보다 많이 모인 기자들에 혀를 내둘렀다.
“인기 장난 아닙니다.”
한동안 최경진 편집장에게 씹힌 최광수 기자는 질린 안색으로 툴툴거렸다.
“전 모르겠습니다.”
“최 기자님, 힘내세요.”
“제가 힘이 나게 생겼습니까? 지시한 것은 최 편집장인데, 욕은 제가 다 먹지 않습니까. 이번에 감봉 처벌받은 것 아십니까?!”
범용구 기자는 혀를 내둘렀다. 가정을 책임진 최광수 기자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조심스럽다. 기사도 평소에 소극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K투스 사태는 윗선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정작 책임은 고스란히 그가 졌던 것이다.
그나마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범용구 기자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는 지시를 받았다고 해도 이번이 기회라고 해서 달려들던 최광수 기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은 채 힐끗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KM 전자 기획실 직원이 뭔가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제 시작하나 봅니다.”
* * *
KM 전자 기획실에서 가져온 것은 누더기가 된 LCD 디스플레이였다.
놀랍게도 동작은 했다. 다만 액정 응답 특성이 너무 늦어서 뚝뚝 끊겨서 나올 뿐이다. 도저히 TV용으로 보기 힘들었다.
50명 가까운 기자들은 눈만 끔뻑이면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장비를 보여주는 기획실 직원조차 머리를 긁적였다.
도저히 기자회견에서 보여줄 만하지 않았다.
가장 늦게 나타난 최민혁 실장도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액정 응답 특성이 200㎳라서 화면이 아주 느립니다. 그 점은 고려하셔야 합니다. 아마 이른 시일 안에 속도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야, 200㎳ 액정으로 TV에 적용할 수 있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어느 정도 써먹으려면 10㎳ 이하로 줄여야 할 겁니다.’
‘아니, 그러면 200㎳에서 10로 줄이는 것이 쉬운 거야?’
‘제가 저 분야 취재를 한 적이 있는데, 적어도 7~8년은 걸린다는 소리가 있어요.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라도 불가능할 겁니다.’
‘최 실장이 저걸 모르는 거야?’
‘설마요?’
‘아니, 그걸 알면서도 왜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글쎄요.’
아마 평소라면 최민혁 실장을 하이에나처럼 뜯어먹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KMP-01, K투스 사태를 거치면서 쓴맛을 경험한 기자들은 다들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공격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자회견장을 촬영하는 메이저 방송사 PD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쓰레기 액정 패널을 그대로 기사로 내보내야 할지 망설였다.
범용구 기자가 눈치를 보면서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저기 최 실장님, 간단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최민혁은 그제야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뜬금없는 설명을 인정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방식의 LCD 기술입니다. 기존 제품은 듀얼 전극을 사용하는 데 반해서 이 기술은 싱글 전극을 사용합니다.]
특히 140도로 넓은 광시야각은 기존 TN 패널이 보여줄 수 없던 기술이다.
유리 기판과 평행한 전압을 내보내서 시야각을 넓혔는데, 이 기술 자체는 독일 멜코사가 가지고 있는 라이선스였다.
[이 액정 배열 특허는 이미 우리 회사가 확보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소비 전력도 적고, LCD 제조 관련한 노이즈도 적습니다. LCD 생산 비용 자체가 획기적으로 줄어듭니다.]
[…….]
다들 최민혁 이야기를 받아 적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의 이야기는 그럴듯했지만 보이는 물건 자체는 형편이 없었다.
시야각, 색 재현율을 떠나서 저게 과연 신기술인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역시 기자회견장 분위기를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IPS 관련 특허 출원은 했지만 아직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기자회견을 통해서 IPS 신기술을 자신이 확보했다고 발표한 것에 불과했다.
‘공연성 조건이 확보되니까. 안 그러면 히타치 공작소에서 시비를 걸 수도 있지.’
최민혁은 이를 위해서 모여 있는 기자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이번 기사만 제대로 내보내면,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잊겠습니다.]
[…네.]
범용구 기자도 그렇지만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IPS 관련 특허 기사를 내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이 지난 일을 다 잊겠다고 한 최민혁 실장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언론사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범용구 기자는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했다.
[최 실장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술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데,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씩 웃으면서 기자회견을 끝냈다.
[글쎄요. LCD 패널 업체 입장은 좀 다를 겁니다. 그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겁니다. 알다시피 우리 KM 전자는 이 새 LCD를 양산할 생각은 없습니다. 외주를 줘야겠죠.]
[……?]
범용구 기자는 힐끗 10t 트럭으로 밟아버린 LCD 폐기물을 일별한 후에 단호하게 돌아서는 최민혁 실장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면 액정 패널 업체 대기업에서 서로 달려들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 저게 그렇게 가치가 있어?’
* * *
IPS LCD 관련 뉴스가 언론사와 방송사 통해서 나갔지만 관심을 가진 이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언론사 역시 이 기사를 내보낼 때 무조건 일방적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느린 액정 응답 특성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뒤늦게야 최민혁이 뭘 하고 있는지 뉴스로 정보를 접하고서는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빨랐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깝네.”
권재홍 비서실장은 민상수 팀장과 같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아마 평소라면 ‘죄송합니다.’ 말에 버럭 화를 냈을 최문경 부회장도 혀를 찼다.
“괜찮아. 이번에는 정말 가깝게 접근했잖아. 그걸로 만족해야지.”
최문경 부회장이 굳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단순히 한 걸음 느렸기 때문이 아니다. 최민혁의 행보가 황당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K투스에 이어서 차세대 액정이라니.’
하지만 이보다 지금 사태가 더 궁금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200㎳ 응답 특성으로 TV에 써먹을 수가 있어?”
민상수 부장이 이번에는 단호하게 나섰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민혁 저놈이 왜 저런 쇼를 벌인 거야. 이번 기자회견장에서 저놈이 딜을 해서 저 기사를 내보냈다고 하는데, 이유가 뭐야?”
“…그건 아직 확인 중입니다.”
두 사람도 영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LCD 액정을 왜 신경 쓰는지, 언론에 왜 저런 기자회견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민상수 부장은 실무자답게 그럴듯한 추론을 했다.
“혹시 차세대 LCD 기술을 확보했다고 홍보하는 목적이 아닐까요? 얼마 전에 KM 그룹 임원진을 불러 모아서 디지털 TV에 대해 강연을 했는데, 그때 약속한 것을 실현한 것이 아닐까요?”
“아, 그런 적이 있었어? 맞아. 민혁 저놈이 큰소리치기는 했지. 뭐 저게 디지털 TV라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