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이상준은 별생각 없이 입을 열려다가 뒤늦게 보안 계약서에 사인한 것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냥 하라고 하니, 지시에 따르기는 했지만, 도대체 이 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LCD 듀얼 전극, 싱글 전극이 왜 필요한 것인지조차 몰랐다.
“지금 진행하는 연구는 기존 액정 응답 특성을 수치화해서 물리적으로……. 아, 죄송합니다. 이게 연구실 내부 보안이 걸려 있어서 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기준 과장이 넌지시 타박했다.
“상준아, 동문 선후배끼리 숨기고 말 것이 뭐가 있어. 대충 뭔지만 말해줘도 되잖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상준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집요한 행동을 뒤늦게 눈치챘다. 솔직히 KM 그룹이 나쁜 직장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대기업도 많고 많았다.
굳이 괜한 짓을 해서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다. 만약 이 정보를 외부에 흘리면 무지막지한 소송으로 보답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의 말 때문에 연구실 내에서는 한동안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자 두 사람 표정을 다시 살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어? 사, 상준아, 자, 잠깐만…….”
오기준 과장이 뒤늦게 이상준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상준은 이미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민상수 부장은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이 괜히 나섰다고 자책했다. 좀 더 시간을 두면서 신뢰를 얻어야 했는데, 그만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최 실장이 뭔가 하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은 했잖아.’
* * *
민상수 부장은 바로 권재홍 비서실장을 찾아가서 지금 최민혁이 진행하는 일을 알렸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한국대에 아는 교수 통해서 김호동 교수의 연구에 대한 것을 확인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 정보는 김호동 교수조차 내막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민혁이 그놈 지시를 받아서 김호동 교수가 새로운 연구를 하고 있다고?”
“이상한 점은 그 연구가 LCD 액정에 대한 것이라는 겁니다. KM 전자는 LCD 쪽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그 부분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김호동 교수 통해서 확인은 안 돼?”
“의외로 이번 연구에 한해서만큼은 김호동 교수도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입이 가벼워서 평소에 쉽게 정보를 흘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습니다.”
그랬다.
김호동 교수는 괴짜인 만큼 입이 무거운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사교성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아는 지인에게는 자기 연구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번 연구만큼은 김호동 교수가 사람이 바뀐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쾌재를 불렀다.
“연구 시작한 지 고작 한 달이 채 안 되었다면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소리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지금 진행하는 연구에 대한 파악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 능력이 있어도 LCD 사업과 같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신사업은 무리입니다. 더욱이 LCD 사업은 비관적인 전망이 있습니다.”
“아니, 내 생각은 달라. 민혁이 그놈도 이제까지 성공만 했잖아. 그러니 이번 LCD 사업도 자만에 넘쳐서 시작했을지도 몰라.”
“제 생각은 다릅니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한 일을 본다면 뭔가 확신이 없고서야 일을 진행할 리가 없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LCD 사업은 이야기가 달라. 오성 전자만 봐도 알 수가 있잖아. 지금은 PDP TV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어. 흑백 TN LCD로는 답이 없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적어도 2~3년은 족히 걸려.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수백억은 족히 넘어.”
확신에 찬 최문경 부회장의 말은 사실 딱히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이라면 바보같이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최문경 부회장은 차세대 LCD에 관한 관심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이보다 이번 일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만 했다.
“K투스 사태 때문에 내가 괜히 흥분한 것 같아. 차라리 잘되었어. 일단 김호동 교수에 대한 것부터 차근차근 조사해 봐. 그 오기준 과장의 후배를 공략해 보란 소리야.”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제야 최민혁 실장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다는 기회를 잡았다고 흥분한 최문경 부회장을 타박하지는 못했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긴 이제 막 연구를 시작했으니, 파고들 틈은 많을 거야. 하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어. 최 실장이 눈치채면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쉽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봐, 권 실장, 이번이 진짜 기회야. 그러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해. 잘만 이 기회를 활용하면, 민혁 그놈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어!”
“네.”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문경 부회장 요구가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차세대 LCD와 관련된 쪽은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호동 교수에게만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아냐. KM 전자 내부적으로도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을 테니, 그것만 다 날려 버려도 나쁘지 않을 거야.’
* * *
최문경 부회장의 의도는 나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LCD 사업 쪽은 상식적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이상준이 박태훈 박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박태훈 박사는 깜짝 놀라서 김호동 박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민혁은 김호동 박사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자세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실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같이 간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특허 출원은 이미 끝났죠?”
“네. 이미 국내만이 아니라 일본, 미국, 유럽에도 특허 출원을 완료했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좋네요.”
최민혁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김호동 교수 연구실까지 파고들지는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K투스를 이용해서 그렇게 주의를 끌었는데도 포기하지 않다니.’
하지만 한편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문경 부회장이 바보도 아니고 늘 당하지만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요한 최문경 부회장의 성정은 최민혁이 더 잘 알았다.
그는 인생 1회차에서도 최민혁의 동선을 지속해서 감시했다.
당시만 해도 최민혁은 그렇게 튀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보다는 조성돈 팀장이 더 놀랐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늘 최문경 부회장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몰래 김호동 교수 연구실로 와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연구까지 추적한 최문경 부회장의 집요한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뭐, 회사 규모만 놓고 본다면 KM 산업도 상대는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첫째 큰아버지 권모술수는 그것과는 달라요. 더욱이 필요하다면 자본은 더 확충할 방법도 있으니까.”
“차입금 말입니까? 하지만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까?”
“물론 끝났죠. 하지만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마음먹으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무려 수천억 자본을 끌어오는 것인데, 인맥이 없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해외 투기 자본을 말하는 겁니다. 그쪽에서도 우리 첫째 큰아버지에게서 얻고 싶은 것이 있으니, 손을 잡았을 겁니다. 그들이 우리 큰아버지가 러브 콜을 보낸다면 모른 척할까요? 아닐 겁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KM 그룹 구조조정이 끝난 상황에서는 더하죠.”
“하지만 KM 그룹 계열사가 그렇게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그건 국내 기업으로서의 한계죠. 하지만 기업 체질을 바꾸면 상황이 또 달라요.”
“…….”
조성돈 팀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민혁이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 배후에 있는 투기 자금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다만 IMF 이후에 KM 그룹이 공중 분해된 것이 그 투기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 상황이 말이 안 되니까. 설마 KM 그룹을 희생양 삼은 것일까?’
고심에 빠진 최민혁은 이 문제만큼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상황을 손꼽아서 기다렸다.
‘어차피 계속 숨어 있을 수는 없을 거야. IMF를 이용하려면 지금이 사전 정지 작업을 할 최적의 순간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신중할 필요가 있어. 만약 히타치에서 이번 연구를 알았다면, 문제가 복잡해졌을 테니까.’
* * *
IPS 특허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 중의 하나가 액정과 전극이다. 특히 액정이 빠른 응답 속도를 보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치가 필요했다.
히타치 제작소 시가 마사아키 박사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액정과 전극 그 자체에만 집중한 나머지 액정을 과소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액정과 전압 연관성에 관한 연구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액정 조성물을 이루는 구조는 다양한 치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치환기 변화가 너무 복잡했다.
각각의 조성물 특성을 찾아서 검토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다른 히타치 계열사 통해서 검토를 진행해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아 소요되었다.
각 화합물이 이루는 조성에 따라서 차이가 천차만별로 나뉘는데, 이것을 다 실험하게 되면 연구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은 시가 박사를 믿기에 이 연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히타치 공작소의 분위기는 차세대 CRT로 기울었다.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시가 박사, 여기까지만 합시다.”
“소장님, 이제 정상입니다.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성공입니다.”
“당신 마음은 잘 알아요. 그런데 요즘 연구소 분위기는 잘 알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콜린스가 만든 대형 평면 TV 시장이다.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콜린스 물건만 내놓으면 사겠다는 사람은 넘쳐났다.
히타치가 뒤늦게 그 수요를 파악하고 나서는 경악했다.
그들이 막연하게 추측한 수요와는 차이가 너무 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히타치 그룹도 CRT에 대해서는 태도를 바꾸었다.
차라리 KM 전자가 이 시장을 제대로 독점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미련을 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다.
특히 최민혁 실장은 월마트와 계약을 계속 질질 끌었다. 이제는 솔직히 미국 다른 유통 업체와 손을 잡아도 되는데도 그랬다.
니시무라 소장 역시 지금 상황에 혀를 찼다.
“제가 시가 박사 마음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래요. 그놈의 KM 전자가 문제란 말입니다. 한국 시장에서 소니조차 쓴맛을 봤습니다. 이런 상황을 계속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번에 편성한 연구원은 이미 CRT 쪽에 경험이 풍부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
시가 박사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계속 니시무라 소장을 설득하려고 해도 반응이 신통치가 않았다.
그 역시 니시무라 소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놈의 콜린스가 지겨웠다. 콜린스 들어간 몇 가지 기술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히타치 역시 그 부분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었다.
문제는 콜린스가 출시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 것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시가 박사는 차세대 LCD 일정이 계속 늘어지는 것이 콜린스 때랑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물론 그렇다 해도 LCD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그는 차세대 액정과 관련해서 연구하는 이들 현황을 다시 조사했다.
혹시라도 이들 중에 문제가 되는 이들을 찾는다면 니시무라 소장도 태도를 바꿀 것이라 생각했다.
그중에 하나는 멜코사도 포함했다.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입니까? 액정 특허를 매각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