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이제 반대하는 놈은 없겠지. 너희 앞에 놓인 서류는 보안 계약서다. 지금 하는 연구를 외부에 흘리면,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다. 최하가 5억부터 시작하니, 딴생각은 하지도 마. 어차피 이 기술 자료는 이미 특허까지 출원된 상황이니까.”
영문을 몰라서인지 이상준이 다른 사람을 대리해서 나섰다.
“교수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너희 좋아하는 이동호 교수를 밀어준 KM 전자에서 진행하는 연구다. 그러니 이번 일은 쉽게 생각하지 마라.”
딱 이 한 마디가 분위기를 바꾸었다.
허겁지겁 보안 계약서에 서명한 이들은 다시 한번 자신 앞에 놓인 차세대 액정 기술 자료를 확인했다.
하지만 곧 다들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은 모두 이미 수평 액정 실험에서 상업적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걸로 뭐 하려는 걸까?’
* * *
김호동 박사 연구 팀은 차세대 액정 기술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서 창고 한구석에 처박아놓은 수평 액정 실험 세트를 가져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기본적인 확인을 했다.
다행히 잘 동작했다.
몇 가지 수정 작업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외형적으로 LCD 액정에 선을 붙여놓아서 꼭 다리 100개가 달린 지네와 비슷했다.
이 작업은 쉽지가 않았다.
연구 팀이 반년 동안 삽질한 흔적이었다.
이상준은 조심스럽게 실험 세트 상태를 확인하면서 계속 박태훈 박사에게 질문했다.
“형,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도 몰라.”
박태훈 박사도 실험 세팅에 연결된 컴퓨터로 상태를 모니터링하면서 체크했다.
그 역시 이 일을 하면서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50억’이란 자금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따로 받은 20억까지 합치면 무려 70억을 받은 셈이었다. 그 돈 많은 오성 전자도 이렇게 무식하게 투자하지는 않았다.
‘미친 건가?’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KM 전자가 최근 보인 행보를 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봤다. 당장 MP3 특허가 그 경우다.
100배, 아니 1,000배 이상의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투자이니까.
‘설마 이것도 그런 연구와 비슷한 것일까?’
박태훈 박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채 실험 환경을 확인하면서도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자료를 다시 몇 차례 확인했다.
그런데 이건 그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일을 진행하면서 귓속말로 서로 주고받고 나서는 최민혁 실장이 보낸 자료에 집중했다.
뒤늦게야 과거 최민혁 실장의 행보와 똑같다는 것은 깨달았다.
즉 70억을 이렇게 투자한다는 이야기는 이 연구 가치가 7,000억을 넘긴다는 이야기다.
‘정말인가?’
하지만 숨김없이 그대로 대화를 하는 이는 없었다.
편한 복장을 한 최민혁 실장이 연구실로 바로 출근해서 매의 눈으로 감시했기 때문이다.
김호동 교수는 굳이 최민혁이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했다.
“회사에 가 계시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하지만 오성 전자를 비롯한 이들이 압력을 본격적으로 가하는 상황에서 최민혁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는 이번 연구의 실체적 진실 때문에 옆에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꼭 상업화하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액정 특성이 느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수평 액정 배열 상태로 LCD가 동작만 하면 되는 겁니다.”
“품질과 관계없이 그냥 동작만 시키라는 말이군요.”
“네. 그러니까. 잘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냥 제가 지시한 것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진행하세요. 돈은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최민혁의 지시는 확실히 통했다. 외주를 준 업체에서도 초도 샘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기존 실험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일부 수정되었을 뿐이다.
최민혁의 열정적인 태도는 특이한 점이 많았다.
김호동 박사조차 왜 저렇게까지 할까 의아하기만 했다.
“정말 이대로 하면 괜찮습니까? 나중에 가서 딴소리하시면 안 됩니다.”
“네. 교수님 마음 잘 압니다. 지금은 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 지시만 따라주세요.”
김호동 교수는 반대로 차가운 최민혁의 시선을 보자 개인적으로 걸리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돈이 좋았다.
기존 실험 세트는 몇 차례 더 진행하다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그 대타가 새로 가져온 세트였다.
모두 10가지를 제작했는데, 이 중에 6가지는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4세트도 하나씩 하나씩 시험 중에 타버렸다.
한 세트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장비라서 김호동 교수는 속이 타들어 갔다.
하지만 최민혁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일정을 최대한 당기기 위해서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문제가 있어도 그냥 밀어붙였다.
“추가로 더 주문을 내세요. 업체에 연락해서 주말까지 포함해서 3일 안에 해주면 인센티브를 준다고 하세요.”
“…….”
막무가내로 막 밀어붙인 덕분에 김호동 교수도 가까스로 최민혁이 원한 실험 세트를 만들었다. 기존 세트로 실험하면서 추가로 계속해서 실험 세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20대를 날려먹고서야 그나마 화면이 깨지고, 일그러져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한 세트는 제대로 동작했다.
“바, 박사님, 성공했습니다!”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저 TN LCD처럼 화면이 동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더욱이 느린 응답 특성이 문제였다.
뒤틀린 LCD에서 나오는 화면은 도저히 상업화되었다고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동작은 했다.
기존의 듀얼 전극이 아니라 싱글 전극으로 말이다.
김호동 교수는 이론대로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민혁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걸 원하신 겁니까?”
“네!”
최민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나온 결과물은 도저히 상업적으로 판매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몇 가지 강점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시야각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물결 현상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즉 터치를 활용할 수 있다는 거다.
“수고하셨습니다. 2주가 좀 지나서 아쉽네요. 그래도 이번 연구에 대한 인센티브는 각자 기여도에 따라서 지불될 겁니다.”
“…네.”
김호동 교수도 악귀 같은 최민혁 행동에 질려서 학을 뗐다.
‘쓸데라고 전혀 없는 연구야. 도대체 저걸로 어디에 쓴다는 것일까?’
최민혁은 미리 준비해 둔 몇 가지 자료를 더 내놓았다. 물론 이번 연구는 IPS와는 좀 달랐다. 히타치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몇 년이 더 지나야 나오는 기술이다.
“…SIPS, VA, FFS 기술? 이게 다 뭡니까?”
“이건 일정이 좀 여유가 있어요. 하지만 한 달 드리겠습니다. 남은 투자금으로 바로 진행을 해주세요. 이것 역시 지금과 같은 형태면 됩니다. 특허는 적당히 정리하고, 이 구조를 토대로 내면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상업적인 결과는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도저히 거절하기 힘든 제안에 김호동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이 만든 샘플은 트럭으로 뭉개진 LCD 같아서 가지는 강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피로와 의혹에 찌든 김호동 교수 두 눈을 직시했다.
“궁금한 게 많은 거 압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말이죠.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미래 가치와도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세요.”
정중하게 한마디 한 최민혁은 조용히 연구실을 나가 버렸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이들은 다들 눈만 끔뻑거렸다.
* * *
KM 그룹 비서실 2팀 민상수 부장은 권재홍 비서실장 지시를 받고 나서 최민혁 실장의 동선을 살렸다. 비록 KM 전자 내에 채널은 다 없어졌지만, 여전히 남은 이들이 있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채널을 통해서 최민혁 행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한국대 김호동 박사라…….’
다행히 KM 전자의 콜린스 개발 초기에 참여한 김호동 박사에 대한 자료는 있었다.
민상수 부장은 처음에는 서울 흥신소 박상기 소장에게 의뢰할까 하다가 이번 일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한국대에 도착하자 오기준 과장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김호동 박사 연구소 주변을 한번 조심스럽게 확인해 봐. 단 직접 접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으로 해.”
오기준 과장은 민상수 부장의 지시를 바로 눈치챘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KM 그룹 내에도 한국대 출신이 있고, 이를 통해서 김호동 교수 연구 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 동문 후배인 이상준을 찾아냈다.
스카우트라는 명목으로 이상준에게 슬쩍 전화를 해보았다.
약속 장소를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동문 후배를 스카우트하는 것은 늘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민상수 부장은 조용히 동행만 했고, 모든 일은 오기준 과장에게 맡겼다.
“상준이?”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상준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연구실에 출퇴근하면서도 그 역시 하루도 제대로 쉽지 못했다.
“…야, 괜찮아?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후유, 요즘 정신이 없었습니다.”
“연구실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외주를 받았는데, 그 업체 압박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연구실까지 직접 출퇴근하면서도 일일이 지시를 내리는데…….”
이상준은 뒤늦게야 움찔했다. 지금 자신이 만나는 선배 역시 따지고 보면 KM 전자와 관련이 있었다. 지금 만나는 선배가 바로 KM 그룹 본사 쪽에 있기 때문이다.
민상수 부장은 이제까지 수차례 최민혁에게 당한 바가 있었다. 그는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닫자 팔꿈치로 오기준 과장 옆구리를 밀었다.
오기준 과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내가 제대로 소개도 안 했네. 이분은 민상수 부장님으로 우리 비서실 2팀 팀장님이셔. 스카우트 일정을 줄이기 위해서 직접 동행했어.”
“아, 안녕하세요.”
이상준은 인사를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비서실에서 직접 스카우트하려고 찾아온 것이 이상했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까.
오기준 과장은 이상준 표정이 달라지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KM 그룹이 지금 구조조정이 한창이지만 미래 사업에 대한 투자를 오히려 늘리고 있어. 그래서 유능한 직원을 지금 스카우트하고 있어.”
“아, 네.”
이상준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직접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비서실 팀장이 찾아왔다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간단하게 자신이 석사 과정에서 연구한 경력과 이력을 말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자고 해서 제가 이력서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력서가 굳이 필요하겠니? 내가 상준이를 너를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네.”
이상준은 그제야 고개를 갸웃했다. 동문 모임에서 오기준 과장을 보기는 했지만 그다지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다른 선배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가?’
하지만 그도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오기준 과장은 고등학교 선배로서 살갑게 이상준을 대했다.
하지만 경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지금 진행하는 일에 대한 것도 있었다.
“KM 전자와 같이 차세대 LCD 액정 관련한 연구인데, 저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 그냥 김호동 교수님이 지시한 대로 하는 것뿐이죠.”
옆에서 침묵만 하던 민상수 부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김호동 교수 연구실에서 그런 연구도 합니까?”
“그게 좀 복잡한데, LCD보다는 액정 자체에 관한 연구입니다. 아, 물론 자세한 것은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민상수 부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뭔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상준의 눈치를 봤다. 괜히 이상준을 자극해서 문제를 만들어서는 곤란했다.
“보안 문제인 것 같은데, 최소한 이상준 씨 기여도를 알 수가 없을까요? 이번 스카우트와 관련해서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확인도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