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86화 (386/1,021)

#386.

“그냥 내버려 두세요.”

임명진 차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김호동 박사가 소송을 건다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 정리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한병수 부장은 어이가 없었다. 소송 이야기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갑자기 웬 소송입니까?”

“김호동 박사가 아는 지인 변호사 통해서 항의를 해왔습니다. 이렇게 어설프게 정리해 놓으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고 깔끔한 마무리를 원했습니다. 본인 주장으로 얼마든지 가치가 있는 연구 결과물로 다른 대안을 찾겠다고 합니다.”

한병수 부장도 며달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김호동 박사 대리인을 떠올렸다. 3류 변호사다. 아니 2류 변호사 정도는 될 것 같지만, 실력은 거지였다.

“아, 그 멍청한 변호사 말인가요? 가만 이 연구 결과가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사전 검토는 다 끝났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은 밝혀진 상황입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에게 쌓인 감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투자를 접은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거야 본인이 결과를 이따위로 해놓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 쪽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지 않습니까. 듀얼 전극이 기본 방향이니, 거기에 집중해 달라고! 그런데 본인이 고집을 피워서 잡탕물을 만든 것 아닙니까?!”

지금 LCD 패널은 기본적으로 듀얼 전극을 사용한다. 이 기준으로 액정 응답 특성을 연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바뀌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양산이다.

기존 생산 설비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수백억, 아니 수천억이 소요된다.

LC 전자는 그런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임명진 차장도 어깨를 으쓱했다.

“김호동 박사는 이 길이 제대로 가는 길이 맞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하, 정말 웃기지도 않네요.”

한병수 팀장은 어이가 없어서 다시 임명진 차장을 쳐다보았다.

“확인은 해보셨죠?”

“네. 혹시 몰라 2팀을 다 동원해서 다시 검토를 해봤는데, 큰 의미는 없습니다. 김호동 박사가 능력은 좋은데, 자기 고집이 강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 쪽으로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제가 실장님에게 한번 보고해 보죠.”

“네.”

* * *

한병수 부장은 늘 날이 서 있는 김영광 기획실장을 찾아갔다.

그가 의도해서 김호동 박사 투자를 정리하기는 했는데, 고민이었다.

매사에 소심해서 명확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한편으로 이런 단점이 장점으로 빛을 발하기는 한다.

괜히 뒤통수 맞는 경우는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광 기획실장은 한병수 부장과는 좀 달랐다. 그는 의사 결정이 빠르고, 한번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김호동 박사에 대해서만큼은 한병수 부장과는 의견이 달랐다. 그는 한병수 부장이 LC 그룹 직계라는 점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호동 박사와 완전히 손을 끊자는 말입니까?”

“네. 솔직히 김호동 박사가 무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정리했으면 합니다.”

김영광 기획실장은 매사에 자신감을 보이는 한병수 부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대기업 재벌 3세보다는 나았다. 나름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지고 꾸준한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지금 기획 2팀 부장 자리도 10년 만에 올라갔다. 다른 일반인에게 비하면 빠른 진급이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성과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호동 박사 일만큼은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물론 한 부장이 문제 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김호동 박사는 능력이 출중합니다. 지금까지 결과는 없어도 앞으로 얼마든지 대박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아뇨. 제 생각은 다릅니다. 김호동 박사 같은 이들에게 쓸데없이 투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내 연구소에서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김호동 박사 성과가 있다고 하지만…….”

김영광 기획실장이 일축했다.

“KM 전자의 콜린스 개발에도 관여한 분입니다.”

“콜린스 대박? 그걸 모를 수는 없죠. 하지만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달라요. 콜린스 개발할 때도 의견 대립 때문에 계속 싸우다가 잘린 것으로 압니다. 실력이 있으면 뭐 합니까. 제대로 팀 화합을 하지도 못해서 분란만 일으키는 사람인데요.”

최훈열 전무와 관련된 부분은 설이 많았다. 김영광 기획실장은 그 부분을 제법 알았다.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한병수 부장은 그 이야기를 무시한 채 은근히 김호동 박사에게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의 의견은 이제까지 김호동 박사에 대해서 쌓인 감정 때문이다.

김영광 기획실장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병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지적이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3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 과정에 김호동 박사의 담당자 불만은 많았다. 이건 기획 팀 내부에서도 계속 말이 나왔다.

“하지만 KM 전자 지인 이야기로는…….”

한병수 부장도 보통 때라면 이렇게 단호하게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K투스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았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이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서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두 사람의 능력 비교 때문이다.

한병수 부장과 최민혁 실장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독보적으로 드러나면서 한병수 부장은 이런저런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질투.

안 그래도 최민혁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저도 어지간해서는 그냥 넘어가고 싶었는데, 아니, 소송까지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랑 더 손을 잡기 싫습니다. 어차피 핵심 연구 결과물은 우리 쪽으로 넘어온 상황 아닙니까. 그러니 차라리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김영광 기획실장도 한병수 부장 이야기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금 LC 전자 기획실 이슈는 다름 아닌 K투스였다.

“아, K투스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KM 전자 쪽에 계속 연락은 하고 있는데, 연락 자체가 안 되네요. 그리고 우리 쪽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라서 좀 더 시간을 두고 봐야할 듯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를 내야 합니다. KM 전자와 무조건 손을 잡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한병수 부장은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김영광 기획실장의 시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조용히 경영 수업을 받았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비교 대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물며 상대는 이제 고작 20살이다.

그는 지난주에 갔던 감옥에 있는 김현탁 사장의 면회를 떠올렸다.

김현탁 사장은 면회 내내 최민혁 실장 이야기만 했다. ‘그놈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로 시작해서 ‘반드시 매장해 버리겠다’로 결론 내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최민혁 실장에 관해서 조사를 해봤는데, 최민혁 음모론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볼 수가 있었다.

다행이라면 자신은 최민혁 실장과 엮여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거다.

‘아, 그냥 잊자. 괜히 쓸데없는 고민을 해서 스트레스받을 이유는 없잖아.’

* * *

LC 전자와 김호동 박사의 라이센스 문제는 우려한 것과는 달리 빠르게 정리되었다. 어차피 이미 내부 검토를 거쳐서 꼭 필요한 특허는 다 확보를 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호동 박사는 그 특허 지분도 포기하겠다고 하는데, 굳이 일을 질질 끌 필요가 없었다.

최민혁은 안현수 팀장이 배후에서 계약 문제를 완전히 정리한 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김호동 박사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김창호 부장도 나와 있었다.

“아니 김 부장님은 웬일입니까?”

“흠, 뭐 제가 중간에 소개한 것도 있고 해서 나왔습니다. 김호동 박사 성격이 워낙에 까다로워서 제가 중재를 할 수 있으니까요.”

최민혁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김창호 부장이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사전에 부탁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조성돈 팀장이 굳이 김창호 부장에게 정보를 흘린 것은 이유가 있다.

이번 기회에 최민혁 실장이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보라는 뜻이다.

최민혁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선행 개발 팀장인 김창호 부장은 꽤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 조상도 연구소 소장 압력을 막아서 콜린스 개발이 진행되도록 만든 사람이다.

‘더욱이 공장 쪽에도 영향력이 꽤 크지.’

지금까지는 공장 인력을 내버려 두다 시피 했지만, 앞으로 그럴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호 부장은 쾌재를 부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최민혁의 뒤를 따랐다.

김창호 부장의 태도 때문인지 다들 최민혁에 대한 시선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최민혁이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유심히 쳐다보았다.

김호동 박사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기존 연구를 저렇게 깔끔하게 정리할지는 몰랐다.

다만 그는 어차피 이미 구두 계약을 끝낸 상황이라서 최민혁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한 연구 성과물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첫 만남에서 보여준 보고서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험한 세트도 시현해 주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싱글 전극을 이용한 실험입니다. 기존 듀얼과는 좀 다른데…….”

최민혁은 묵묵히 시연을 보면서 그 실험 환경 자체가 IPS 액정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정말 놀랍네.’

딱 한 걸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할 발자국만 나가면 된다. 싱글 전극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살짝만 비틀기만 해도 답은 나온다.

기존 IPS 원천 기술과도 정확히 겹친다. 완전히 같지 않다고 해도 특허를 낸다면 먼저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여러 가지 추론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각 실험에 들어가는 자금 부족 때문이다.

지금 실험 환경에 대한 자금만 해도 3년 동안 30억이 훌쩍 넘어갔다.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니었다. 더욱이 단순 액정 이론만으로 밀어붙이기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사장되는 연구 결과가 수도 없이 많을 거야.’

뭐 최민혁으로서는 감사할 일이었다.

“이미 정리가 다 끝났다고 알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질문인데, LC 전자에서 이 연구 결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습니까?”

“듀얼 전극과 싱글 전극은 전혀 다른 실험입니다. 듀얼 전극에 대한 특허는 LC 전자에서 다 가져갔고, 이 실험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좋군요. 그렇다면 이제 투자 이야기로 들어가면 되겠군요. 일단 김 박사님이 하고 싶은 연구가 있을 텐데, 그 부분도 밀어드리죠. 얼마면 되겠습니까?”

김호동 박사는 이미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역시 KM 전자에 쌓여 있는 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다.

하지만 딱히 돈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옆에 나타난 박태훈 박사 4년차가 교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눈총을 줬다. 심지어 조폭처럼 눈을 부라렸다.

‘교수님, 이 제안 절대로 파투 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저 교수님 죽일 겁니다!’

죽어라 노예처럼 부려먹고, 돈은 쥐꼬리만큼도 안 준 김호동 교수도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정도를 예상하시는 겁니까?”

“5억, 아니 10억이면 될까요. 아니네요. 20억이면 괜찮겠습니까?”

“…20억이면 충분합니다.”

“좋군요. 그러면 더 할 제안은 없으시죠?”

“…네.”

김호동 박사는 뒤늦게 후회했다. 더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최민혁 실장은 50억을 불러도 자기 제안을 들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솔직히 1억만 더 투자받아도 할 수 있는 것을 다할 수기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추가 연구로 들어가는 2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김호동 박사가 원하는 것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까짓 거 20억 푼돈은 이 기술에 비하면 비교조차하기 힘들었다.

그는 옆에 동행한 조성돈 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성돈 팀장은 이미 가져온 계약 서류를 내밀었다.

김호동 박사는 서류를 간단하게 읽어보고 난 후에 바로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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