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LCD의 특성 관련 연구를 말하는 겁니까?”
“네, 그 연구요.”
“하지만 크게 의미가 없을 겁니다. 어디까지 액정의 특성에 관한 연구였으니까요.”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진행하는 듀얼 전극이나 단일 전극만 해도 액정 재료에 따라서 응답 속도 자체가 다릅니다.”
김호동 박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실험한 액정 종류에 따른 다양한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다. 액정 특성에 따라서 그 결과의 차이가 심했다.
최민혁은 물론 딱히 이 연구의 결과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지금 실험을 위해서 김호동 박사가 한 삽질 그 자체를 봤다.
‘어차피 IPS나 VA와는 차이가 있어. 이걸 구현할 사람으로 김호동 박사가 딱 제격이니까.’
그렇다.
최민혁이 관심을 두는 것은 김호동 박사의 연구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까지 한 실험은 IPS, VA를 얼마든지 구현할 수가 있다.
특히 액정 특성에 따라서 나타나는 미묘한 부분에 대한 실험까지 다 끝냈다. 굳이 이 부분까지 최민혁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힌트 정도면 알아서 하겠지.’
다만 아직은 정식 계약이 체결된 상황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그림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계약이 진행되고 난 후에 제가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 지 말할 테니까.”
김호동 박사는 곤혹스러웠다. 그의 LCD 액정 연구는 차세대 LCD 연구를 위한 과제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연구는 아직 LCD 액정 그 자체만을 집중했다.
액정 특성 변화에 따른 순수한 연구와 그 결과다.
연구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아직은 응용하기는 어려웠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아직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고백했다.
“사실 LC 전자가 후원한 덕분에 여기까지 진행하기는 했지만 지난달로 계약이 종결되었습니다. 이 연구만 벌써 3년 가까이 진행했는데, 꽤 오래 온 셈입니다. 하지만 연구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LC 전자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 역시 보험으로 차세대 LCD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물론 성과는 꽤 있었다. 결과가 제법 나왔다. 문제는 이게 순수한 연구 성과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LC 전자가 원하는 새로운 LCD 쪽의 과실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다음 단계다.
액정 연구 개발을 진행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LC 전자로서는 비관적이었다. 뭔가 확실한 결과가 있다면 계속 투자가 가능하지만, 이 연구 결과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테스트용 시료를 하나 만드는 것만으로 수억씩 깨져 나간다. 김호동 박사 처지에서는 하나의 성과가 될지 모른다.
즉 50억, 아니 어쩌면 100~200억 이상의 추가 투자가 진행되어야 했다.
LC 전자 이사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실무진 쪽에서 책임질 수 없다는 말에 결국 투자를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 30억이 아깝기는 했지만 확실치 않은 결과에 여기서 접기로 했다.
최민혁은 신기했다. LC 전자가 이 새로운 타입의 LCD를 제조한 회사기 때문이다. 물론 원천 기술은 결국 히타치에서 개발했지만 말이다.
‘왜 여기까지 하고 접었을까.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결국 좋은 결과를 냈을 텐데,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내려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지.’
최민혁이 보기에는 지금 결과물은 히타치와 비교해서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서로 보는 시야가 달라서 미처 그 의미를 간과한 것이었다.
‘흠, 이거 LC 전자가 나중에 사실을 알면 뒤집어지겠는데? 아니지. 지금도 대충 넘어갈 수가 없어. 어쩌면 태클을 걸지도 몰라.’
고민에 빠진 최민혁은 다시 연구 논문을 살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이라면 LC 전자는 듀얼 전극으로 한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단일 전극 결과물은 내버려 뒀다.
김호동 박사는 솔직하게 LC 전자와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꽤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은 하기 좀 그렇지만 이번 연구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액정의 특성에 관한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당장 써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LC 전자의 한병수 부장이 그냥 손절한 것이 아닙니다.”
최민혁은 LC 전자 이야기를 듣자 힐끗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조성돈 팀장은 한병수 부장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LC 전자 기획실 기획 2팀장입니다. 지금 LC 전자 상무 한봉준의 둘째 아들입니다.”
“설마 LC 그룹 직계인가요?”
“네. 성격도 무난해서 크게 튀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 덕분에 LC 그룹 직계 중에서는 가장 무난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최민혁은 김호동 박사가 계속 주는 연구 논문을 살피면서 툴툴거렸다.
“확실히 무난한 것만 좋아하는군요.”
“네?”
“아, 아니에요. 계속해 보세요.”
“곧 있으면, 기획실장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경영 수업을 밟는 단계입니다.”
“그런가요?”
최민혁은 혀를 찼다. 설마 LC 전자가 벌써 김호동 박사에게 침을 발라놓았을지는 몰랐다.
‘아니야. 대기업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지금까지는 확실히 쉽게 왔어. 벌써 하나씩 꼬이기 시작하는 것 같으니.’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LC 전자는 딱 마지막 단계에서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한병수 팀장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LCD 관련해 많은 기업이 다들 비슷했다. 그들 나름 죽어라고 노력했지만, 최종 결과에 도착한 이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히타치가 결국 승자가 되지. 물론 이번 기회에는 내가 이기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물론 확인은 필요했다.
“가만 그러면 이제까지 진행한 특허는 누구 소유입니까?”
“주로 듀얼 전극은 LC 전자 쪽으로 넘겼지만, 대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당장에 써먹을 때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니죠. 특허 라이센스 문제는 명확하게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최민혁은 특허 매입 비용으로 3억을 제시했다.
김호동 박사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다양한 값을 표본을 뽑기는 했지만, 형식적인 결과에 불과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알겠습니다. 대신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뇨. 법적인 문제는 우리 쪽에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안현수 법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안현수 법무팀장은 KM 그룹 법무 팀에 있던 사람답게 한 가지를 지적했다.
[그런데 제가 해도 괜찮겠습니까? 절 조사하면 실장님 이름도 나옵니다. LC 전자가 대충하는 것 같아도 특허 매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김호동 박사와의 관계도 어설프게 해놓은 것 같지만, 특허 권리 일부는 LC 전자에서 여전히 가지고 있을 겁니다.]
[설마 특허 지분 매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안 그래도 K투스 때문에 난리입니다. 아마 실장님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면 태도를 바꿀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허를 가지고 소송을 걸 수도 있습니다. 꼭 관련성이 없어도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면 몇 년은 그냥 갑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까?]
[김호동 박사와 거래하는 변호사가 있을 겁니다. 그쪽 통해서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겁니다. 아마 LC 전자도 지금쯤은 K투스 때문에 정신 줄을 놓고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쪽으로 해도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나요?]
[아뇨. 지금이라면 괜찮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LC 전자 기획 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K투스 라이센스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그쪽은 지금 K투스 때문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MP3 특허와는 달리 K투스는 근거리 정보 통신으로 LC 전자에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것 때문에 LC 전자 기획 팀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 고마워요.]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김호동 박사가 거래하는 변호사를 확인했다.
김호동 박사는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면 특허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괜찮아요. 괜히 LC 전자와 문제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저 돈 많습니다.”
“아, 네.”
* * *
LCD에 대한 대기업 관심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도 식지 않았다.
특히 TFT-LCD에 대해 투자는 해가 더해갈수록 더 늘어갔다.
당장 올해만 해도 오성 전자, LC 전자, HY 전자는 조기 양산 체제를 위해서 4천억 이상을 추가로 더 투자했다.
10.4인치 모델에 대한 투자는 시간이 갈수록 대폭 늘어난 것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 향상을 위해서 그만큼 투자를 한 셈이다.
그리고 원천 기술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연구 개발을 하지만 비록 돈이 안 된다고 해도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을 상대로 돈 지랄을 했다.
김호동 박사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비록 사교성이 떨어져서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낸 연구 성과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3년 가까운 투자에도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은 점이 문제다. 특히 LCD 액정 그 자체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작 LCD 관련 부분은 제자리를 걸음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김호동 박사의 연구 성과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병수 부장은 추가로 투자하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워서 그냥 내버려 둬 버렸다. 골치가 아파서 그의 연구 성과를 창고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김호동 박사요? 그게 누구죠?”
K투스 때문에 요즘 맛이 간 임명진 차장은 말보다는 그냥 보고서를 내밀었다.
“흠.”
한병수 팀장 역시 귀찮기는 매 한 가지다. 그는 자기 책상 앞에 쌓인 K투스 안건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갔다. LC 전자 내의 모바일 관련 사업부에서는 전부 다 K투스를 원했다.
기술 제휴가 아니면, 차라리 기술 자체를 가져오기를 요구다.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 알아봤다가 KM 전자에 관한 조사를 해보고 나서는 깔끔하게 접었다.
KM 전자 내에 쌓인 현금만 해도 벌써 7천억이 넘는다는 소리가 있다.
솔직히 이제 KM 전자와 대판 싸우다가는 LC 전자도 휘청할 수 있는 상대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 일 때문에 한병수 부장은 계속 약을 먹었다. 지금도 두통약 두 알을 삼키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억도 가물가물한 김호동 박사 연구물에 관한 관심은 있을 턱이 없었다.
“아, 대충 뭔 내용인지는 알겠네요. 그런데 이게 어떻다는 말이죠?”
“김호동 박사가 투자를 그만할 것 같으면, 특허 부분에 대해 정리를 하고 싶어 합니다. 듀얼 전극 쪽은 이미 다 정리가 끝났으니, 나머지 특허는 자신이 다 가지겠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듀얼 전극 관련된 특허 지분은 다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한병수 팀장은 그제야 보고서를 살폈다. 몇 가지 특허는 자신 쪽에서 정리했다. 그런데 나머지 안건은 좀 애매했다.
LCD 액정 그 자체에만 집중된 연구 성과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액정 특성에 따른 분자 구조와 이에 반응되는 특성 따위 연구가 돈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단일 전극을 사용한 연구 결과물은 현실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뭐 엔지니어 처지에서는 나름 자기만족이 될 것 같지만 말이다.
“이 부분은 연구소 쪽에서도 별로 의미가 없다고 했죠?”
“네. 안 그래도 할 것이 많은데, 굳이 돈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김호동 박사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죠?”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병수 팀장은 다시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는 어설픈 사람이 아니다. 김호동 박사가 특이한 행동을 보인 것에 의문을 가졌다.
“왜 조용하다가 갑자기 이런답니까?”
“김 박사 이야기로는 우리 회사 간섭 때문에 짜증이 나서 더 우리와 거래하기 싫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어설프게 정리해 놓으면, 투자받기도 애매하다고 확실히 마무리 짓기를 원합니다.”
“쯧.”
한병수 부장은 순간 고민했다. 생각 같아서는 김호동 박사 제안을 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투자한 돈도 있고, 어떻게 보면 이것도 LCD 액정 원천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