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최민혁은 김창호 부장의 쓴소리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의 태도 변화 원인은 잘 알고 있었다. 공장에 밀어 넣은 신입 사원 321명을 마음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김창호 부장은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생각보다 많이 상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꼭 최민혁에게 좋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 참, 굳이 바쁜 분은 가서 일 보셔도 됩니다. 김 부장님은 안내만 해주고 다시 안산 공장으로 내려가셔도 됩니다.”
냉랭한 최민혁의 말에 김창호 부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이제는 부담스러웠다. K투스 사태 이후에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공장 임직원들의 시선이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콜린스는 어떻게 보면 최병연 이사의 공이 가장 컸다.
최민혁 실장은 어디까지나 최병연 이사가 해놓은 과실을 최대한 이용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KMP-01, K투스를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공장 임직원도 뉴스만 틀면 나오는 원천 기술 이야기를 지겹게 들었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을 마치 선지자처럼 바라봤다.
하지만 당장 공장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김창호 부장은 답답하기만 했다. 도대체 왜 공장의 신규 채용을 막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마음을 이 자리에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장님을 믿어야 하는데, 김호동 박사가 과거 일도 있고 해서 질문한 겁니다.”
최민혁이 김창호 부장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콜린스 사업부 매각은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말할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에 필요한 기술만 다 확보하고 날 시점일까?’
“최훈열 전무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겁니까?”
“후유, 말도 마십시오. 기술을 강탈하다시피 빼앗은 후에 로열티마저 주지 않았습니다.”
최민혁은 예상 밖의 대답에 소리쳤다.
“설마 특허료마저 주지 않은 겁니까?”
“네. 다행히 최병연 팀장, 아니, 이사님이 회사로 복귀한 후에 로열티 보상을 해줬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생각보다는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골치네요.”
최민혁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LCD 관련 특허를 내려고 해도 구체적인 결과가 있어야 했다. 아이디어만으로 특허를 못 내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뒤통수 맞을 확률도 무시 못 했다.
오성 전자, LCD, 히타치, 소니와 같은 기업이 바보가 아닌 이상 특허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특허 등록도 문제고. 아니 LC 전자와 협상에 더 유리하겠지. 칼자루를 보여준다면 LC 전자도 우리 제안을 거절하기 힘 들 테니까.’
최민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병연 이사에게 바로 전화해 봤다.
[아, 김호동 박사 특허료는 제가 줬습니다. 과거 미처 주지 못한 특허료까지 포함했으니, 금전적으로는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혹시나 뒤끝이 있을까 물어봤는데, 다행히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실장님이 뒤처리를 확실히 한 덕분에 오히려 환대할 겁니다. 네, 최훈열 전무에 대한 조치 말입니다.]
‘다행이군.’
* * *
LCD 관련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업이 적지 않았지만, 딱히 결과를 도출하는 곳은 별로 없었다.
LCD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그중에는 액정 응답 속도 문제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안을 찾은 기업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세계 이곳저곳에서 연구를 많이 하지만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멜코사 액정이 한 대안이지. 기획 팀이 이 결과를 찾아낸 것이 신기해.’
그랬다.
LCD 디스플레이에서 가장 큰 장벽은 역시 느린 액정 응답 특성이다. 그런데 멜코사 액정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웃기는 사실은 아직 멜코사가 그걸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기획 팀 배종대 과장을 보내서 특허를 확보했다.
‘정확히는 모르고 있지. 그렇다고 잘나가는 회사도 아니니까. 다행히 특허 확보는 쉬웠어.’
실제로 인생 1회차에서도 히타치는 이 특허를 쉽게 확보했다. 멜코사는 자신이 가진 기술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그건 김호동 박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다른 문제를 다 배제한 채 오직 액정 특성에만 집중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후유, 돌아버리겠네.”
김호동 박사는 진행하는 연구가 늘 제자리인 것이 아쉽기만 했다.
‘수평 액정 배열 효율이 높지가 않아. 괜히 이중 전극 실험을 했어.’
LCD 액정과 관련된 연구로 딱 이중 전극 진행 과정에서 막혀 더 이상의 실험을 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도 하고 싶었지만, 연구 자금 부족으로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될 것 같았는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포기할까?’
하지만 솔직히 지금까지 들어간 돈과 시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수평으로 누워 있는 액정이 게으른 막내아들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걸로 더 뭘 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LC 전자를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지.’
자신을 후원한 곳은 바로 LC 전자. 그들 역시 다양한 LCD 전극 연구에 흥미를 가졌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자 과감하게 손절매했다.
김호동 박사는 딱히 LC 전자를 나쁜 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도움을 얻어서 꽤 많은 연구 결과를 도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액정 특성과 관련해서 얻은 것이 많았다.
관련 연구 논문은 지난 콘퍼런스에서도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선뜻 자신에게 더 투자하겠다는 후원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차에 갑자기 김창호 부장에게 연락이 받았다.
그와는 과거 최훈열 전무 때문에 앙금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잊었다. 최병연 이사가 충분한 보상을 해준 덕분에 지난 감정은 묻기로 했다.
특히 최훈열 전무가 감방에 들어갔다는 말에 한동안 웃기만 했다.
그 통쾌한 감정은 누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설마 다른 제안이라도 하려는 걸까?’
지난 일을 생각하면 대화도 하기 싫지만, 최병연 이사를 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번 연구가 막히면서 차라리 다른 연구 프로젝트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다른 연구 자금이 수혈되면 그 돈으로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고 싶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푼수기가 좀 있는 박태훈 박사 4년차가 갑자기 연구실로 들어왔다.
그는 몇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바로 김창호 부장이었다.
“김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냉랭한 말에 김창호 부장은 움찔했다. 그 역시 지난 일을 새삼 떠올렸다. 딱히 자신이 한 일이 아니지만 최훈열 전무 일은 자기 때문에 생긴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지난 일은 죄송합니다.”
단순히 그냥 하는 사과가 아니다. 김창호 부장은 최훈열 전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그저 지켜만 봤기 때문이다.
“또 최훈열 전무 핑계입니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콜린스 때문에 아주 재미를 단단히 봤더군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김창호 부장.
그런데 이런 사과는 부족했다. 콜린스 개발에 제일 중요했던 것은 대형 평면 TV에 근본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외각 화면 노이즈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콜린스 외각에는 특수한 물질이 도포되었다.
전자파 간섭과 노이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이 독특한 해법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김호동 박사였다.
콜린스 양산이 어렵고, 불량률이 나오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다.
실제로 소니를 비롯한 글로벌 업체가 콜린스 대안에 실패한 원인이다.
김호동 박사도 문득 지난 일이 떠오르자 울컥했다. 그는 새삼 최훈열 전무에게 받은 일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훈열 전무는 지금 감방에 가 있기 때문이다.
“됐습니다. 이미 당사자도 죗값을 치루는 마당에 지난 이야기를 해서 뭐 하겠습니다. 그런데 같이 온 분은 누굽니까?”
최민혁 실장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KM 전자 기획실을 책임지고 있는 최민혁 실장이라고 합니다.”
“어? 설마 요즘 뉴스에서 유명한 K투스 개발을 주도한 그 최민혁 실장님입니까?”
김호동 박사는 깜짝 놀랐다. 그 역시 최병연 이사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상대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몰랐다. 더욱이 태도도 나쁘지 않았다. 지난 일에 대한 반감도 없어 보였다.
‘이 정도면 괜찮지.’
하지만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김호동 박사는 생각보다 최민혁에 대해서 잘 알았다. 최훈열 전무를 감방에 보낸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최민혁이 관여한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이다.
최병연 이사가 몇 번 가진 술자리에서 관련 이야기를 다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K투스 사태를 통해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최민혁의 나이가 어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쪼르르 달려가서 최민혁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꼭 뵙고 싶었던 분인데,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호동 박사는 지난 일 따위는 잊은 듯 최민혁을 열렬히 환대했다.
“참, 그런데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뒤에서 주도한 것이 정말 최 실장님입니까? 김문호 박사를 통해서 듣기는 했지만 아직도 잘 믿기지 않습니다.”
촉새보다 더 시끄러운 그의 입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연구원이라면 가지고 있는 뭔가 중후한 그런 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전형적인 순수 학자였다.
최민혁은 영문을 몰라서 어색하게 웃었다. 지난 일 때문에 혹시라도 이번 일에 문제가 생길까 싶었는데,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일단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유명세도 나쁘지 않네.’
* * *
김호동 박사는 자기 일 때문이라도 최민혁을 모를 수가 없었다. KM 전자에 대한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최훈열 전무가 감방에 간 이후에는 지난 기억을 털어버렸다.
이보다는 KM 전자를 뒤집어엎어 버리는 최민혁에 대해서 주시했다.
한편으로 KM 전자가 어떻게 될까 싶기도 했다.
그런 최민혁이 지금 이 자리에도 달랑 청바지와 티만 입고 있었다. 너무 단출한 패션이다.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허, 그런데 정말 어립니다. 최 이사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정말 동안입니다. 제가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동안이라는 말이다. 20살 이하로 보인다는 말인데, 비꼬는 말은 아니다.
저 어린 나이에 이룩한 성과에 오히려 감탄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쓰게 웃었다.
“다들 그 말들을 하더군요. 수염을 기를까 지금 고민 중입니다.”
“뭐,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K투스와 같은 혁신적인 성과를 내는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 일 때문에 근거리 통신망 연구하는 제 지인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제 따로 독립적으로 연구할지, 아니면 K투스를 따라가야 할지 정해야 하니까요. 연락이 많이 오지 않았습니까?”
“제법 연락이 왔습니다.”
단순히 연락이 온 정도가 아니었다. 공동 연구를 하자고 전화한 대학 연구소는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놀랍게도 대기업 쪽에서도 계속 연락 왔다.
심지어 해외 여러 연구소에서도 심각하게 K투스 쪽과 손을 잡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이런 이들 중에는 고압적인 KM 전자의 태도 때문에 분노한 이들도 많았다.
배후에서 KM 전자와 최민혁 실장을 공격한 이들이었다.
에릭슨이 크게 당황한 것은 IBM, 인텔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 연구에 같이 협력하기로 했던 많은 연구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물론 K투스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는 김호동 박사의 태도를 보다가 굳이 콜린스와 관련된 지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제가 알기로 교수님이 연구하는 프로젝트 중에 LCD 액정에 대한 것이 있다고 압니다. 혹시 그 자료를 볼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