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79화 (379/1,021)

#379.

최병연 이사는 생각도 못 한 주주총회의 안건에 아직도 흥분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단순한 이사 선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연봉이 3배 가까이 올랐다. 심지어 KM 전자 주식도 받았다. 성과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은 셈이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가볍게 손뼉을 쳤다.

“최 이사, 이제까지 정말 고생이 많았어. 자네가 이제 제자리를 잡아간 것 같네.”

“감사합니다.”

최병연 이사는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최민혁 실장을 통해서 진급 이야기는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진급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이렇게 갑자기 올지는 몰랐다.

이미 어제만 해도 다른 이의 진급 축하 회식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종상 전무도 눈치를 보면서 최병연 이사 승진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 최병연 이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힐끗 최민혁 실장 표정을 살폈다. 이사 승진과 더불어서 상상을 초월한 보상을 해준 최민혁 실장의 마음 씀씀이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최병연 이사의 승진 놀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기획안에 대한 최 이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게…….”

최병연 이사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검토한 결과로는 이 근거리통신망은 크게 문젯거리가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사실 최민혁이 내놓은 기획안은 정말 생뚱맞은 안건이었다.

이미 이와 유사한 일을 몇 번 경험했기에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묻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이 기획안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니면 차라리 최민혁 실장이 관리하는 비밀 연구소가 있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다.

최민혁은 물론 변명거리를 충분히 준비해 뒀다.

“VLSI 연구진들도 이 근거리통신망에 관심이 많더군요. 그 자료를 받아서 제가 한번 정리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복잡다단한 원천기술이 아니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입니다.”

최병연 이사는 슬그머니 한 가지를 지적했다.

“임기석 부장도 근거리통신망에 관심을 둬서 에릭스 측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쪽하고 부딪치지 않을까요?”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쪽에서 진행하는 것은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넣다 보니, 당장에 써먹기 어려운 것뿐이죠. 특히 간섭 문제 때문에 많은 한계가 존재해요. 이에 비해서 기획안에 언급된 K투스 방식은 간섭과 저전력 문제를 깔끔하게 극복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속도를 2.1Mbps로 올렸습니다. 용도는 차세대 MP3 무선 이어폰에 적용할 겁니다.”

K투스는 엄밀히 말하면 블루투스 2.1 방식이다. 블루트스 1.0과 호환이 되어야 하지만 최민혁이 그 부분을 다 빼버렸다.

따라서 두 가지 방식은 특허로 서로 겹치지 않았다.

일부 특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특허를 먼저 내는 놈이 임자다. 불행히도 에릭스는 아직 특허를 낼 수준까지 되지 않았다.

최민혁은 음모를 꾸미는 주재자처럼 차갑게 웃었다.

‘이 정도라면 오히려 우리가 블루투스를 주도할 수 있지. 블루투스 기술은 인텔, IBM, 그리고 퀄컴을 압박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니까. 우리 한국 대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아, 이 부장이 이걸 보면 좋아할 겁니다. 특허는 바로 출원하는 것으로 하죠. 그러면 더 문제될 만한 것은 없겠죠?”

오영근 사장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 역시 보고를 받았지만, 아직도 이 기술이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최 실장, 자네 의도는 잘 알겠어. 물론 나는 근거리 무선통신망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들어보니, 에릭스를 비롯해서 인텔, IBM같은 기업이 손을 잡은 것 같은데. 그런 이들 일에 끼어들면 견제를 받지 않을까. 더욱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하면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최민혁은 여전히 자기 기획안을 보면서 충격에 빠진 최병연 이사를 쳐다보았다.

“최 이사님 생각은 어때요?”

“아, 그게……. 솔직히 좀 더 검토를 해봐야 알겠지만, 무선통신망은 기술 자체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완성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보다는 이런 기술을 어떻게 구현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중앙 연구소 내부적으로 검토한 바로는 다들 아직도 믿지 않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최병연 이사는 중앙 연구소 핵심 인력을 통해서 이미 검토를 마쳤다. 그는 솔직히 이런 기술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그게 더 의아했다. 거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간 이 기획안까지 최병연 이사는 최민혁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최민혁은 물론 어깨를 으쓱한 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영근 사장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최 이사, 그게 가능한 답인가? 근거리통신망을 그냥 이렇게 간단히 처리해서 될 문제야? 그냥 기획안대로만 진행하면 된다고?”

최병연 이사는 이 기획안을 본 후에 자신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증거가 있는데,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건 해봐야 압니다.”

“허.”

오영근 사장은 힐끗 문형섭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문형섭 부사장 역시 딱히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 역시 오디오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근거리통신망은 잘 몰랐다. 간혹 선행 기술 조사 과정에서 일부 검토는 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이지 않았다.

때문에 오디오 쪽 엔지니어를 다 불러 모아서 검토를 해봤는데, 충분히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바로 이어잭에 말이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정도 기획안이라면 일단 직접 해보고 나서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끙,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최민혁은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는 특히 사람들이 그렇게 궁금해하는 ARN 지분 인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 사장님 근심이 뭔지 잘 압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전에 나올 문제는 어느 정도 검토가 끝나 있으니까. 기획안을 잘 보면 알겠지만 KM투스에 사용되는 칩이 바로 ARN 코어입니다. 제가 굳이 ARN 지분을 인수한 증거입니다. 이 정도면 ARN 지분을 인수한 답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흠.”

최민혁을 뺀 나머지 KM 전자 임원은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 경험했다. 최민혁 실장이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보다 이런 일이 또 생긴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오영근 사장조차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최민혁이 이 정보 출처를 어느 정도 틀어놓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역시나 최민혁은 단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기획안을 누가 만든 것일까? 정말 최 실장이 만든 것일까?’

* * *

KM 전자 임원진의 많은 우려에도, KM투스는 바로 진행이 되었다.

K투스 설계 책임을 진 조창호 차장은 다행히 오성 전자에 있을 때 ARN 관련 업무를 해본 적이 있었다.

ARN 구조는 인출, 해독, 실행, 메모리, 되쓰기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형적인 RISC 타입 형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설계 자체는 어렵지가 않다.

ARN 플랫폼을 사용해서 설계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이 작업만 끝내고 난 후에 그 설계값을 FAB 쪽에 넘기면 된다.

VLSI 마크 듀켄 이사는 당연히 이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민혁과 계약을 진행하면서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될지 지켜봤다.

그런데 불과 이주일 만에 브런 스미스 부장에게서 K투스 관련 자료를 받았다.

“허, 이게 뭐야?”

“최민혁 실장이 우선하여 진행할 K투스 근거리 칩이라고 합니다.”

“K투스? 그게 뭔가?”

“근거리통신망 칩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거 혹시 에릭스에서 검토 중이라고 하는 새로운 근거리통신망을 말하는 거야?”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이 칩과 관련해서 자세한 정보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ARN 측 통해서 가능하면 문제가 없도록 부탁한다는 통지만 받았습니다.”

“그것참.”

그는 ARN 지분 인수와 동시에 진행된 이 일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미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았다.

그러니 문제가 없도록 해줄 필요가 있었다.

마크 듀켄 이사는 다른 일과는 달리 이번 일에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ARN 측 엔지니어 답변은 뭐래?”

“그쪽에서도 최대한 검토를 끝냈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모르니, 다시 한번 연락해서 검토해 봐. 그 칩 설계한 엔지니어 쪽과도 다시 확인해 보고.”

“…알겠습니다.”

* * *

마크 듀켄 이사가 나서준 덕분에 ARN 측 엔지니어도 다른 일처럼 수동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다. 그들 나름 자신의 노하우를 최대한 이용해서 K투스 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피드백은 조창호 부장에게도 전해졌다.

조창호 부장은 이 친절한 ARN, VLSI 엔지니어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오성 전자에 있을 때 이들이 보인 반응과는 달랐다.

그 덕분에 설계 과정에 미처 간과한 몇 가지 문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조창호 부장이 밑에 인력을 총동원해서 재검토했다.

이들 세 회사 엔지니어가 서로 손을 잡은 덕분에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칩 제조를 하다가 생각도 못 한 문제가 생길 수가 있는데, 이런 문제를 사전에 다 걸러낸 것이다. 그러니 개발 기간 자체가 극도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시간에 결국 결과를 받아 볼 수가 있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창호 차장은 이렇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하, ARN, VLSI 측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최병연 이사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렇게 도움이 되나?”

“당연히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딱 필요한 기술만 지원해 주고, 나머지 지원은 잘 안 해줍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나서서 도와주었다.

ARN IP를 사용할 때 생기는 미세한 부분까지 검사해 주었다.

ARN은 주로 IP만 팔았다. 물론, 기술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태였다.

VLSI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고객의 요청을 받아서 칩을 제작만 할 뿐이다.

조창호 차장은 그 덕분에 ARN 설계 특성과 관련해서 생각도 못 한 것을 배웠다.

이들이 이번 일은 KM 전자와 한배를 탔다고 생각해서 적극 나선 덕분에 일은 생각보다는 더 수월하게 풀렸다.

심지어 일정도 대폭 줄었다.

덕분에 VLSI 측이 꽤 손실을 봤다.

마크 듀켄 이사는 굳이 그런 부분을 솔직하게 다 알렸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일정이 압축된 가장 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조창호 차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설계도가 고정된 상황에서 시간이 오래 걸릴 리가 없습니다. 전 이 설계보다 KM 투스 설계도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테나 설계를 맡은 것은 바로 윤선기 과장이었다. 그 역시 최민혁이 준 기획안을 토대로 안테나를 만들기는 했다.

1cm 정도 크기 안테나는 기존의 안테나와는 구조가 많이 달랐다.

그는 자신이 설계하면서도 이게 정상적으로 동작하는지 장담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기능 검토는 했지만 실제로 구현된 결과가 예측한 대로 나올지는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블루투스 개발 샘플을 보면서도 두 사람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테스트 결과는 어때요?”

“아, 그게 되기는 합니다만…….”

조창호 차장과 윤선기 과장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당황했다.

이들을 지켜보는 다른 엔지니어는 황당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성능은 어때요?”

조창호 차장은 혀를 내둘렀다.

“예상한 2Mbps까지 나오지는 않지만, 평균 1.5Mbps까지는 나옵니다.”

최민혁 실장은 윤성기 과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안테나 때문인가요?”

윤성기 과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이 제안한 기획안을 토대로 안테나를 만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안테나 재질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안테나를 좀 더 보완한다면 충분히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군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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