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
김희수 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저도 최민혁 실장님의 행보를 몰랐다면 그렇게 판단했을 겁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님의 지난 행보를 본다면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그 복잡한 위성 사업에도 한 손을 거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최영란 이사는 새삼 최민혁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겉보기와는 달리 최민혁이 딱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부분은 그녀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 집을 왔을 때 최민혁은 결코 의지견정한 이는 아니었다.
“할아버지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민혁이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도 너희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민혁이가 하는 것은 KM 그룹 차원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네가 하는 일은 이와 유사한 면이 있으니, 좀 더 신경을 쓰거라.”
“감사합니다.”
그녀는 물론 최용욱 회장의 호출 자리에 가서는 김희수 소장이 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믿기는 하지만 자기 아버지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 괜히 끼어들어서 민혁이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최용욱 회장의 제안처럼 차라리 최민혁을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가서 최민혁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다. 순수한 사업 파트너가 되고 싶었다.
‘민혁이에게 한번 제안해 봐야겠어.’
* * *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에게 시달린 후에 집에 가서 이틀 내내 푹 잤다. 그는 솔직히 시차 적응 때문에 꽤 지쳐 있었다.
휴식을 취한 최민혁은 맑은 정신으로 본사에 출근했다.
하지만 그는 본사 입구에 몰려와 있는 삼십 명의 기자 때문에 바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최 실장님, ARN 인수와 관련해서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별별 질문이 다 나왔다.
[ARN이 가진 저전력 CPU는 말로만 저전력이지 성능은 형편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회사 지분 50%를 굳이 1,500만 달러라는 많은 돈을 들여서 사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솔직히 낭비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ARN CPU는 아직 제대로 된 검증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회사 지분을 굳이 매입할 필요가 있습니까? 콜린스 성공에 취해서 사기라도 당한 것 아닙니까?!]
[…….]
최민혁도 몰려온 기자 반응을 무시하려다가 황당한 질문을 한 기자를 째려봤다.
뜻밖에도 안면이 있는 기자였다. 한영 일보의 경제 파트를 담당한 최광수 기자였다. 그 뒤에 있는 범용구 기자가 기겁해서 최광수 기자를 다급하게 말리다가 차가운 최민혁 시선에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30명이 넘는 기자가 한마디씩 던지니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웠다.
대다수는 최민혁 용비어천가를 불렀지만 뜻밖에 부정적인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이번 최민혁의 행보를 돈지랄이라고 격렬하게 지적했다.
결국 KM 전자 본사 경비원이 몰려 나와서 기자를 밀어냈다.
최민혁은 당연히 기자들의 질문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본사 입구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조성돈 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 실장님, 죄, 죄송합니다.”
“도대체 저 치들 뭡니까?”
KM 전자 본사 입구는 경비원과 기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을 보자 악으로 깡으로 질문을 계속 던졌다.
[최 실장님, 자신이 없으니, 인터뷰를 피하는 것 아닙니까. 에플 컴퓨터도 말아먹은 기술이 바로 ARN CPU입니다. 고작 그런 기술로 뭘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번 인수는 대실패입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결코 한 마디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냥 하는 한 마디도 충분한 정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성돈 팀장은 좀 달랐다. 벨린 투자의 ARN 인수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벨린 투자 실소유자인 KM 전자가 ARN 지분을 인수했다고 언론이 노골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ARN 지분을 인수한 것 때문에 언론이 예민한 것 같습니다.”
“그건 벨린 투자가 인수한 것 아닙니까?”
“그걸 믿는 언론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최민혁도 그 부분은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언론사가 죄다 바보가 아니다. 이제는 핵심에 접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뻔히 기술도 있는데, 그걸 다 감출 수는 없다. 당장 브라운 호퍼 연구소에 연락해도 알 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이보다 왜 이렇게 자기 일에 관심이 많은지 혀를 내둘렀다. 특히 KMP-01과 관련된 대기업의 수작질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현재로는 심증뿐입니다. 그런데 노골적으로 오리발을 내밀고 있어서 따지기도 불편합니다.”
최민혁도 기가 차서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이를 보고는 흠칫했다.
“영란 누나?”
최영란은 오른손을 흔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성격상 남의 비위 맞춰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할 말이 있어.”
“ARN 때문이야?”
“…어.”
“알았어.”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KMP-01 이후에 견제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좀 심했다.
그렇다고 최영란과 굳이 싸울 이유는 없었다. 얼마든지 하청을 줄 수도 있었다. 차라리 오성 전자와 손을 잡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었다.
* * *
최영란 이사는 기획실장실에 들어와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최민혁 성격을 잘 아는 터라 최용욱 회장 일도 꺼내지 않았다.
“미안해.”
“뭐가?”
“아빠 말이야.”
“아, 우리 첫째 큰아버지, 이번 시위 배후에 있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 일도 있고.”
“다른 일도 있어?”
“…….”
최영란 이사는 슬쩍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는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지독한 그의 탐욕을 그녀가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 김이경 여사도 문제였다.
부부가 쌍으로 최민혁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김이경 여사는 특히 외가 쪽 라인까지 총동원해서 최민혁의 행보를 조사 중이었다.
최민혁은 얼굴을 들지 못하는 최영란 이사를 미워하지 않았다. 인생 1회차 시기에 가장 큰 도움을 사람 중의 하나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물론 병 주고, 약 주고식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최문경 부회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IMF를 거치면서 부녀 관계는 완전히 끝나고 만다.
최문경 부회장은 미국 법인을 세워서 도미 행각을 일삼았고, 최영란 이사는 AD 설계를 키우고 키워서 독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독립 시기는 인생 1회차 시기보다 빨랐다. AD 설계 매출 증가도 인생 1회차 시기와 비교하면 200% 빠른 성장 속도를 보였다.
최민혁은 묘한 눈으로 최영란 이사를 쳐다보다가 툴툴거렸다.
“그래서 한번 말해봐.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KMP-01 차세대 CPU 말인데, 그걸 우리 쪽에서도 물량을 일부 받을 수가 없을까?”
“그건 어려울 거야. VLSI 측에서 그 물량을 전담하기로 계약했으니까.”
“아.”
최영란 이사는 그제야 ARN 지분 인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금방 깨달았다. VLSI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냥 자기 지분을 넘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최영란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툴툴거렸다.
“지금 당장은 누나를 도와주기 곤란해. 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
“저, 정말?”
“어.”
물론 그 시기는 아마 최문경 부회장이 도미를 선택한 이후다.
그때라면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특히 할아버지 선택이 달라질 수도 있어. 비자금 일부 영란 누나에게 가는 것만으로도 큰아버지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보다 지금 계속되는 ARN 지분 인수를 둘러싸고 집중되는 관심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는 차라리 ARN 지분 인수가 무슨 의미인지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대안은 역시 블루투스였다. 정확히는 KM투스였다.
이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은 역시 최병연 이사의 승진이었다.
‘재벌 3세로 정말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 * *
블루투스는 쉽게 말해서 근거리 통신망이다. 작년에 에릭슨이 이 연구를 시작했는데, 정식 발표는 5년이 지난 후에야 된다.
지금 진행되는 블루투스 1.0은 간섭을 비롯한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1Mbps도 안 되는 느린 속도는 도저히 쓸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지금 블루투스 개발 단계는 삽질하는 중이다.
인텔, IBM, 노키아, 도시바가 이 통신망에 관심을 뒀다.
하지만 최민혁이 염두에 둔 것은 모든 사양을 포함하는 블루투스가 아니었다. 그는 딱 이어잭, PC와 통신할 수 있는 두 가지에만 집중했다.
이렇게 범위를 좁히면 개발이 생각보다는 쉬워진다.
프로토콜 스택은 역시 실제 전송 속도가 2.1Mbps, 저전력 소비가 가능한 블루투스 2.0이다.
따라서 구현 자체는 생각보다는 어렵지가 않았다.
여기에 ARN 코어를 기준으로 잡았다. ARN610처럼 복잡한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저전력으로 동작하도록 제한했다.
이 방식이 적용되면 블루투스 칩 자체의 전력 소모를 최대한 줄일 수가 있다.
최민혁은 이 기획안을 주먹구구식으로 정리했다. 그는 인생 1회차 기억에서 복잡하고, 불필요한 논리를 전부 다 정리하고, 핵심만 추렸다.
이렇게 정리한 KM투스 기획안은 꽤 그럴듯했다. 구현 가능한 프로토콜 스택부터 시작해서 펌웨어 구조도 어느 정도 정리했다.
인생 1회차에서 이지수에게 갈린 덕분에 얻은 내공과 인생 2회차를 통해서 얻은 노하우가 절묘하게 녹아든 기획안이었다.
그는 이 기획안을 정리한 후에 최병연 팀장에게 먼저 보내 검토를 시켰다.
“이 기획안 좀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최병연 팀장은 미국 방문을 마친 최민혁에게 뜬금없이 보고서를 받을 때만 해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최민혁이 미국을 갔다 왔으니 중역 회의를 먼저 해야 하는데,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민혁은 여기서 끝낸 것이 아니라 임시 주주 총회를 개최했다.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도 이 조치에 황당했지만 ARN 지분 인수와 관련해서 할 말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임시 주주 총회에서도 ARN 지분 인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주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ARN 지분 인수 문제보다 오히려 열화와도 같은 기립 박수로 최민혁을 환영했다.
바로 주가 때문이다.
이제 18만 원선을 행보하는 KM 전자 주가는 과거 1,600원이었던 시절과는 격이 달라졌다.
계속 주식을 들고 있었던 KM 주주라면 누구라도 로또 대박을 터뜨렸다.
그 갈채였다.
물론 이 임시 주주 총회에서 상정된 가장 중요한 안건은 바로 최병연 이사 선임이었다.
이 안건은 KM 주주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콜린스 대박, KMP-01 성공 신화를 진두지휘한 실무진의 승진을 반대한 주주는 없었다.
빠르게 최병연 이사 승진 문제를 매듭지은 최민혁은 다음 날 중역 회의에 나온 최병연 이사에게 넌지시 KM투스 기획안을 흔들었다.
“어떻습니까?”
“아, 그게…….”
팀장에서 이제 이사가 된 최병연 이사는 크게 당황한 채로 기획안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는 임원 회의에 나온 것도 적응하지 못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오영근 사장이 혀를 찼다.
“이봐, 최 실장, 사람 피 그만 말려. 승진 축하 정도는 해야지!”
“아, 맞아. 최 이사님, 승진 축하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최병연 이사는 멋쩍은 얼굴을 한 채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임시 주주 총회에서 갑자기 나온 최병연 이사 승진 안건은 특별한 이슈가 아니었다.
오히려 KM 주가를 폭등시킨 최민혁에게 주주 총회 시선이 다 갔다.
임시 주주 총회 시작과 동시에 이루어진 박수갈채가 그 증거였다.
KM 전자 주주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번 주주 총회에 새로 끼어든 외국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에 대한 영향력이 워낙에 커서인지 최병연 이사 선임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주주는 콜린스 초대박, KMP-01 성공을 지휘한 핵심 인재가 최병연 이사라는 것을 주주 총회에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