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77화 (377/1,021)

#377.

“…그게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칩 안정성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선택일 텐데?”

“최 실장님이 언제 남들 다 생각하는 것은 진행하겠습니까? 이번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 실장님은 대안이 있을 겁니다.”

“흠.”

장승일 실장은 구길모 차장의 의견을 반박하지 않았다.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다. 그는 결국 기획조정실에서 검토한 몇 가지 안을 정리해서 최용욱 회장에게 보고했다.

‘최 실장님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도 결국 회장님을 못 믿어서겠지. 하지만 내가 나선다고 해도 두 분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는 힘들어. 결국, 관건은 회장님이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될 것 같지가 않아.’

최용욱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집안의 화목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최민혁을 굳이 KM 전자 기획실장으로 끌어들여서 기회를 준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 최민혁 실장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만 갔다.

최용욱 회장이 이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게 쉽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갈등 자체가 견제와 균형이 목적이기도 했으니.

KM 그룹 전체로 놓고 본다면 딱히 나쁜 것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실제로 KM 그룹 구조조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KM 산업 경영을 보수적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를 중재하는 장승일 실장만 양쪽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후유, 골치야.’

* * *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에게서 보고서를 받기가 무섭게 최민혁을 호출했다.

그는 물론 딱히 최민혁을 심문하자는 의도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최민혁이 ARN 지분을 얻어서 뭘 하는지 그게 궁금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설사 그라고 해도 기반 지식이 없으면 최민혁의 입을 열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할아버지라는 신분을 최대한 이용해서 최민혁을 살살 달랬다.

“미국에서 ARN 지분을 인수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막 한국에 돌아와서 시차 적응을 못 한 최민혁은 하품하면서 툴툴거렸다.

“할아버지가 그런 일에 관심을 둘지는 몰랐습니다.”

역시나 말투가 곱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예상한 반응이라서 크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심 손자 최민혁의 행동에 울컥했지만, 오히려 인자한 할아버지 코스프레를 계속했다.

“ARN 지분 인수 때문에 꽤 많은 언론사에서 관심을 두고 있더라.”

“뉴스에 났습니까?”

“그래. 아주 난리가 났다.”

“한국 언론사가 시끄러운 게 어제오늘 일입니까. 한 며칠 지나면 조용해질 겁니다.”

“그렇지 않은 거다. 벌써 일주일 내내 계속되고 있어. KMP-01과 관련된 MP3 원천 기술 때문에 더 말이 많아.”

실제로 MP3 원천 기술에 대해서 뒤늦게 안 방송국은 이 사건을 패널까지 초청해서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원천 기술이 뭔지 모르는 일반인조차 혀를 내두른 채 이 소식을 접했다.

MP3 불법 다운과 관련된 소송 문제가 얽히면서 이 사건은 점점 규모를 키워갔다.

최민혁은 이미 예상한 일이라서 심드렁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계속 그러겠습니까? 며칠만 반응을 안 하면 그냥 입을 다물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이제까지 나온 ‘ARN 지분 인수’와 관련된 기사의 신문 더미를 최민혁 앞에 던졌다. 수십 개의 언론사 일면을 장식한 것이 바로 KM 전자의 원천 기술에 대한 언급이다.

대문짝만 하게 나온 사진은 과거 최민혁이 IFA 강연할 때 모습이었다.

최민혁이 어떤 식으로 MP3 원천 기술을 얻었고, 그 이후 행적이 어땠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KM 전자 본격적으로 실리콘 밸리 공략을 시작하는가.]

[ARN 지분 인수는 KM 전자의 새로운 사업 MP3를 위한 새로운 기술의 확보인가.]

[ARN은 과연 어떤 회사인가.]

[영국에 본사를 둔 ARN은 일종의 조인트 벤처이다. 기술 집약적인 이 기업은 VLSI, 에플 컴퓨터의 도움을 얻어서 일약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완전히 흑역사로 끝났고, 이 일을 진행한 전 에플 CEO 스컬리 사장은 결국 에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ARN 대주주인 조인트 벤처 모회사에 대한 루머는 실로 다양했다.

한국 언론 입장에서는 이런 기회가 워낙에 특이해서 주야장천 빨았다.

덕분에 KM 전자 주가는 다시 20만 원선을 탈환했다.

이런 KM 전자 주가 흐름은 한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코스피가 1,000선을 다시 탈환한 이후로 조정 국면을 거치는 동안에도 여전히 18만 원선을 유지하다가 다시 20만 원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코스피 전체가 붉게 물든 장세에서도 일어난 일이었으니.

언론이 KM 전자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최민혁은 혀를 차면서 신문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KMP-01 이후 유명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했지만 기대한 것보다 더한 반응이었다.

그는 조용히 신문을 덮고 말았다.

“…다들 제 일에 관심이 많네요.”

“언론사만이 아냐. 한국에 있는 전자 회사를 가진 대기업은 전부 다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오성 전자의 안건민 회장도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까.”

그는 의외의 인물이 나오자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네? 안 회장님이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민혁이, 네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것도 이제는 부담스럽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에게도 말해줬으면 한다.”

최민혁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솔직히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신뢰가 잘 가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 일은 꽤 중요합니다.”

“그래서 할아비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소리야?”

최민혁은 슬쩍 최용욱 회장 눈치를 봤다. 괜히 분란을 만들 수도 있었다. 최용욱 회장의 입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KM 그룹 전체에 소문이 돌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KM 그룹의 경영 승계가 끝난 것도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첫째 큰아버지를 지원할 생각인 것으로 압니다만?”

최용욱 회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실제로 계속 최민혁에게 밀리고 있는 최문경 부회장을 도와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렇다고 중요한 정보를 다 떠벌릴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비비 꼬아서 길을 만들어 줄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최민혁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냉정했다.

“제가 할아버지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큰아버지 압박에 휘둘리는 저를 밀어준 분도 할아버님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솔직히 중요한 일만큼은 말하기 그렇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역시 예상한 손자 반응에 고집을 꺾었다. 그는 차라리 이야기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추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일이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에도 도움이 되는 일 아니냐. 네 녀석이 문경이와 사이가 나쁘지만, 영란이와는 좋은 것으로 안다만?”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일부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제가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여유가 없다고?”

최민혁은 다시 잠깐 고민했다. 이미 일전에 꺼낸 이야기라서 번민은 길지 않았다.

“아직 비자금 문제는 정리가 안 된 것으로 압니다. 만약 첫째 큰아버지에게 그 자금이 넘어가는 경우까지 대비해야 하니까요. 이런 미묘한 시기에 괜한 정보마저 넘어간다면 제 입장이 곤란합니다.”

“…….”

최용욱 회장도 ‘비자금’ 문제란 말에 최민혁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이 비자금을 최문경 부회장에게 넘길까 고민하는 중이다.

그게 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네가 가진 자본이 이미 조 단위를 넘어선 것으로 안다. 그런데 굳이 비자금이 필요하겠냐?”

“그건 제 돈이 아니라 회삿 돈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첫째 큰아버지가 그 비자금을 가지고 빚을 내서 KM 그룹 전체를 빚더미 수렁으로 만들지 않을까 염려하는 겁니다.”

“허허허, 민혁아, 설마 문경이 그 녀석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뇨. 첫째 큰아버지는 반드시 그러고도 남습니다. 도박 중독자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탐욕은 결국 자신을 망가뜨리고, 집안을 거덜낼 테니까.”

최용욱 회장은 복잡한 눈으로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역시 너무 앞선 생각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최문경 부회장의 실책이 생각보다는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가 할아버지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집안을 송두리째 말아먹고 나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삼자로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게 사실은 할아버지를 진정으로 도와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마지막 말이었다.

최민혁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서재를 나가 버렸다.

“…….”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손자 최민혁이 한 일을 떠올리자 그럴 수가 없었다.

극단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손자 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실제로 최문경 부회장이 천문학적인 차입금을 끌어들여서 사업 규모를 키우려고 한 것은 밑이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비슷하다는 것이 기획조정실의 최종 의견이었다.

정작 수익성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계열사는 거품이 커질 것이고, 만약 그 거품이 터졌다면 최근 도산한 다른 몇몇 중견 기업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다른 대기업 회장에게 계속 놀림만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최소한 최민혁이 기획하는 새로운 사업을 통해서 KM 그룹이 이익을 볼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영란이를 불러봐.”

* * *

최영란은 KM 산업 기획 팀 과장으로 있다가 최근 이 자리를 사임하고, 디자인 하우스 기획 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출 규모만 놓고 본다면 차라리 KM 산업에 꾸준히 있는 것이 나은 선택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이런 그녀가 마음을 바꾼 것은 바로 동생 최민혁의 행보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최민혁의 ARN 지분 인수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직서를 집어던졌다.

“아빠, 인생 그렇게 살지 마세요!”

물론 최문경 부회장은 사직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너 미쳤냐?”

“아뇨. 저 제정신입니다. 아빠 밑에 있을 바에는 차라리 독립하겠어요.”

최영란은 단호했다. 그녀는 최민혁의 행보를 보자 더 이상 KM 산업에 자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보다는 아시안 디자인 하우스(AD 설계) 연구소장 김희수를 찾아서 ARN 인수와 관련해서 질문해 보았다.

KM 그룹 장학생으로 MIT에서 박사 학위를 딴 김희수 연구소장은 최민혁의 선택에 대해서 정확한 핵심을 찍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칩이 전력 소자에 특화되어 있는데, 특히 안정성에 집중합니다. 이와는 달리 전력 소모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서 모바일 칩에 전용된 것이 바로 ARN IP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면 ARN은 결국 모바일에 특화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는 자신이 구입한 KMP-01을 직접 보여주면서 말했다.

“네. 이 KMP-01 특성을 보면 됩니다. 다들 MP3 원천 기술에만 집중해서 정작 이 제품의 전력 소모 자체를 과소평가합니다. 그런데 사용해 보면 느끼겠지만, 이틀 정도는 사용해도 무난합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전력 소모를 최대한 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네요.”

“칩 자체에 저전력 설계 기술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파워 관리에 집중한 것으로 압니다. 물론 이 전원 칩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능도 들어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ARN 지분까지 인수했으니, 이제는 CPU 쪽에서도 저전력 관리를 할 수가 있게 된 셈입니다.”

“하면 배터리 완충 후에 사용 시간이 길어진다는 말인가요?”

“네. 아마 획기적으로 더 길어질 겁니다. 이건 다른 쪽으로 응용이 얼마든지 더 가능합니다.”

최영란은 깜짝 놀랐다.

“그게 가능해요?”

“이론적으로 가능은 합니다만 아직은 넘어야 할 장벽이 꽤 있을 겁니다. 에플 컴퓨터도 이 부분을 보고 투자를 진행했다가 쫄딱 말아먹었으니,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어렵다면 민혁이라도 쉽게 대안을 찾을 수 없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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