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당장 미국에 사람 보내서 민혁이 그놈이 뭘 하는지 파악해. 만약 미국 회사 인수 대상자가 있다면, 그것도 확인해. 필요하다면 그 회사를 우리가 인수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네.”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번 지시 때문에 두통을 심하게 느꼈다. 최문경 부회장의 지시가 너무 일방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도 마냥 꼴통은 아니었다.
“정 우리 힘으로 부족하면 오성 전자, LC 전자, 대운 전자 쪽에 흘려.”
“그쪽에도 정보를 흘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발 멍청하게 당하지 마!”
“…네.”
* * *
권재홍 비서실장의 행보는 생각보다 신속했다. 그는 오성 전자, LC 전자, 대운 전자, DL 전자처럼 최민혁 실장과 이해관계가 엮여 있는 모든 회사에 최민혁의 미국행을 알렸다.
그들이 최소한 이 정보를 얻고도 그냥 입을 다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MP3 원천 기술만 해도 돈이 되지.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서 관심을 들이는 기술이라면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연락을 받은 이들은 부랴부랴 미국 쪽의 채널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마크 듀켄 이사가 아콘 이사회와 만나서 협상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콘 이사회 역시 뉴턴 메시지 패드 때문에 큰 타격을 받은 에플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ARN 지분 가치는 지하 10층을 뚫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차라리 VLSI 측의 새로운 투자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크 듀켄 이사는 물론 이 지분 매입자가 벨린 투자라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투자가 있다는 정도로 넘어갔다. 실리콘 밸리에서 투자는 일상적인 일이라서 이 부분에 문제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투자를 끌어오는 마당이니, 그게 벨린 투자가 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콘, 에플 컴퓨터 둘 다 관심이 있는 것은 지분 매각 대금이다.
최민혁이 제안한 50% 지분, 1,500만 달러, 10% 지분 기준으로 300만 달러는 딱히 나쁜 금액이 아니었다.
아니, 아콘 이사회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갈등했다. 그들은 RISC 관련 원천 기술이 가지는 가치는 더 크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지금은 결과가 없었다.
지금 나와 있는 ARN610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말이 많았다. 저전력 CPU도 좋은데, 다른 임베디드 CPU에 비해서 그렇게 강점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ARN RISC 원천 기술의 가치를 잘 아는 최민혁은 흥분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그는 계약서 서명 날짜가 오기 전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괜히 나대다가 마크 듀켄 이사의 마음이 변할까 조심했다. 그게 아니면 아콘, 에플 컴퓨터 중에 누구 한 사람이 태클을 걸까 염려했다.
‘다행이다.’
그는 계약 당일 ARN 지분 50% 매입 협상 계약서에 서명하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스티븐이 이 사실을 알고, 중간에 막장극을 벌이지 않을까 장담 못 한 것이었다.
‘뭐 앞으로 2년이 남았다고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스티븐의 강력한 리더쉽이라면 무슨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비록 스티븐은 자기 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해도 에플 이사회 쪽과는 선이 닿아 있었다. 만약 ARN 지분 매각에 대한 정보를 안다면 당장 협상장에 와서 깽판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스티븐이 에플 이사회를 상대로 선동한다면 이 계약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마크 듀켄 이사는 식은땀마저 흘리는 최민혁 실장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몸은 괜찮습니까?”
“아, 별일 아닙니다.”
“그런데 땀을 너무 많이 흘리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미국 적응이 쉽지 않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제가 물을 좀 가리는 편이라서요. 아마 곧 괜찮아질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자신의 구세주인 마크 듀켄 이사를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고작 1,500만 달러에 ARN 지분 50%를 인수하다니. 이번 계약은 마크 듀켄 이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아니, 이 계약은 어려웠겠지. 토비 스핀들러 CEO도 완전한 바보도 아니고, 아콘은 RISC 원천 기술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시간이 더 있었다면 계약이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거야.’
그랬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토비 CEO가 지금 자리에 있는 것도 내년까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에플 이사회는 에플 컴퓨터 매각을 진행하면서 그 희생양으로 토비를 선택했다.
토비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ARN 지분 매각을 좀 더 긴밀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에플 컴퓨터 엔지니어 중에는 이 계약을 반대하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최민혁은 물론 만약 이란 역사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이게 진짜 대박이지.’
* * *
VLSI와 벨린 투자 간의 지분 매각 협상은 당연히 미국 언론에서 다루었다.
[ARN은 벨린 소프트에 지분 50%를 매각하다.]
사실 이 뉴스는 미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뉴턴 메시지 패드가 망하면서 아콘 역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콘은 뉴턴이라는 거대한 똥 때문에 온갖 괴소문에 시달리면서 막대한 손실을 봤다.
그 어떤 이들도 ARN CPU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저전력 CPU는 느린 CPU라는 악성 루머만 양산할 꼴이었다.
이보다는 조롱 글도 많았다.
[에플 같은 쓰레기 기업은 당장 청산하자!]
[정말 창피스럽다. 에플 컴퓨터는 무슨 생각으로 쓰레기 뉴턴을 양산했나.]
에플에 기대를 한 많은 미국인은 에플의 행태를 맹비난했다.
실제로 인수합병설에 시달리고 있는 에플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단순히 주가 하락 문제가 아니었다.
미래의 성장 엔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RN 지분 소유권자 중에 에플 컴퓨터가 있다는 것이 한 곳에서는 이슈가 되었다.
이 뉴스가 한국 언론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벨린 투자가 ARN 지분 50%를 1,500만 달러에 인수하다!]
[벨린 투자는 ARN 지분 인수를 시작으로 실리콘 밸리 기업 사냥에 나서나!]
[벨린 투자는 어떻게 ARN 지분 인수에 성공한 것일까.]
한국 기업이 실리콘 밸리 기업을 인수한 사례는 흔치가 않았다.
이번 ARN 인수는 기존에는 없던 일이라서 한국 언론에서는 줄기차게 이 사건을 부풀렸다.
웃기는 것은 정작 ARN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막 미국에 비서실 직원을 보내서 알아보려는 중에 이 기사를 접했다. 그는 곧바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최문경 부회장으로서 ARN은 정말 뜬금없는 회사였다.
“…미국에 간 이유가 결국 ARN 때문이란 이야기인데, 도대체 ARN이 뭐하는 회사야?”
“그게 저전력 CPU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VLSI 쪽과 손을 잡아서 ARN610을 만듭니다.”
반도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최문경 부회장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는 비록 최민혁 관련 소식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이보다는 오히려 최민혁이 또 뭔가 수작을 부리는 부분에 주목했다.
사실 ARN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내용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ARN 지분 50%를 인수했다면, 거의 경영권을 완전히 잡은 셈이잖아. 나머지 지분을 우리가 인수할 수는 없는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당황해서 멈칫했다. 그 역시 비서실을 총동원해서 이 사태를 분석하고는 있었지만,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뭘 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ARN610이나 KMP-01에 들어간 CPU나 성능 차이는 크지 않았다. 굳이 지분 50%를 인수하면서도 벌일 일은 아니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요구하는 질문은 이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원래 ARN 지분을 보유한 아콘, VLSI, 에플 컴퓨터였는데, 이들이 최대한 지분을 매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지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한 아콘은 나머지 지분을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연락을 받았고, 에플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VLSI 측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최문경 부회장은 마치 수수께끼 퍼즐을 푸는 사람처럼 ARN 관련 자료를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다. 그는 최민혁이 도대체 미국 가서 왜 ARN 지분을 인수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점은 감탄했다.
“정말 기가 막히네. 이들 회사 하나하나가 탄탄한 IT 기업이잖아. 에플 컴퓨터만 제외하면, 굳이 자기 지분을 매각할 이유가 없어. 아니, 에플도 그래. 지금 당장 지분을 매각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민혁이 이놈은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들을 설득한 것일까? 능력도 좋다니까.”
정확히는 VLSI의 마크 듀켄 이사를 이용해서 일어난 일이다. 문제는 마크 듀켄 이사 스스로 이번 문제를 굴욕으로 생각했다. 그와 협상을 한 토비 CEO와 아콘 담당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창피스러워서라도 이 지분 매각에 대해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미국 언론조차 다들 카더라 이야기만 하다가 쉬쉬했다.
한국 언론이 이 내막을 알기는 거의 불가능했으니.
권재홍 비서실장이 설사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더라도 내막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알아보는 중입니다.”
“쯧.”
최문경 부회장은 딱히 권재홍 비서실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도 기술 자료를 일일이 들춰 봐도 최민혁이 뭘 노리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오성 전자는 뭐래?”
“그쪽도 발칵 뒤집히기는 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아쉽네. 일단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봐. 다른 기업은 몰라도 에플 컴퓨터가 쥐고 있는 지분이 남아 있잖아. 그거라도 노려봐.”
“…알겠습니다.”
* * *
KM 그룹 비서실이 최민혁의 행보 때문에 발칵 뒤집힌 상황은 오성 전자에도 알려졌다. 정확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이 자연스럽게 정보를 넘겼다.
권태성 비서실장은 이미 최민혁에게 지긋지긋하게 당해본 터라 이번에는 좀 민감하게 움직였다. 그는 오성 전자 기획실 인력을 총동원해서 이 문제를 샅샅이 살폈다.
다행히 최문경 부회장과는 달리 실무진 분석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긴급으로 호출한 50명의 연구원 얼굴을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RISC 타입의 저전력 CPU를 이용할 생각이란 말인가?”
MP3 플레이어 분석 경험 때문에 이쪽 기술에 눈을 뜬 임권수 부장은 시스템 연구실을 비롯한 관련 연구원을 다 만나서 얻은 결과를 보고했다.
“8051 타입은 아무래도 복잡한 형태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하지만 RISC 타입 CPU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성능이 떨어져도 다음 버전에서는 얼마든지 성능을 올릴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8051 타입은 구조가 복잡해서 응용하기가 쉽지 않은데, RISC 타입은 구조가 간단해서 상대적으로 응용하기가 쉬웠다.
지금 당장은 RISC 타입 ARN610의 성능이 썩 좋지는 않지만 향후 설계 기술과 FAB 능력이 향상된다면 상황이 역전될 수가 있다.
“그 말은 KMP-01 차세대 CPU에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시스템 사업부 최호성 상무님 의견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가만 우리 쪽에서도 그런 연구를 하지 않아?”
“하기는 합니다만 ARN처럼 하드웨어, 개발 환경이 모두 갖춰진 플랫폼과는 좀 다릅니다.”
ARN CPU를 이야기하면 흔히 이 하드웨어만을 언급하는데, 실상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 CPU과 관련된 소프트웨어, 컴파일러와 같은 환경이 더 어렵다.
오성 전자도 얼마든지 CPU를 개발할 수 있지만 이런 제반 환경에는 취약했다.
그리고 굳이 이런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그냥 ARN을 가져와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
“…설마 이것도 원천 기술이 문제인가?”
“…네. 특히 ARN 관련 RISC 기술은 전부 다 특허로 묶여 있습니다. 그 특허를 피해서 개발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