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그는 때문에 ARN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 이사회를 소집했을 때도 난잡한 이사회의 의견을 확인만 했다.
서로 의견이 갈리기는 했지만 ARN 지분에 관심을 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뉴턴 메시지 패드 사업부도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쓰레기 같은 뉴턴 사업부는 도대체 언제까지 끌고 갈 겁니까?]
실제로 뉴턴 사업부 책임자는 이미 구조조정 과정에서 줄줄이 다 그만뒀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이들은 엔지니어가 대다수다.
이사회는 이들마저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비 스핀들러는 스컬리가 남겨놓은 유산을 모두 정리해야 하는지 선뜻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이사들도 반 이상은 에플 컴퓨터 매각을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들은 심지어 에플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다양한 기업과 만나서 따로 협상 중이었다.
그러니 이사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모이기만 하면 자신의 배후에 있는 기업 편을 들었으니.
이사회는 열리기만 하면, 꼭 조선 말기 당파 싸움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했다.
‘씁쓸하네.’
토비 스핀들러 CEO는 결국 마크 듀켄 이사를 만나서 지분 협상을 다시 진행했다. 그는 생각 같아서 지분을 다 넘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의 가능성을 고려해서 10%를 제외한 나머지 지분을 다 넘기는 것으로 결정했다.
“좋습니다.”
마크 듀켄 이사는 이 제안을 쿨하게 받았다. 그는 마치 VLSI에 돈이 넘쳐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최민혁이 원했던 지분을 충분히 확보하자 그제야 안도했다.
최민혁의 제안을 쉽게 생각해서 VLSI 이사회에 안건을 던졌다가 정작 자신마저 회사에서 당장 쫓겨날 뻔했기 때문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 * *
최민혁은 마크 듀켄과 협상한 후에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VLSI가 아니라 에플 컴퓨터와 아콘 반응이다. 이들은 당장 ARN 지분을 매각할 이유가 없었다.
에플 컴퓨터가 비록 뉴턴 메시지 패드 때문에 손실을 보았다고 해도 과연 RISC 저전력 기술을 포기할지는 확실치 않았고, 아콘 역시 이 기술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최민혁은 혹시라도 자신이 이들을 만나서 지분 협상을 진행하다가 자기 속내를 알까 한 걸음을 물러났다. VLSI는 최민혁 자신과는 달리 두 회사 때문에 큰 손실을 보았으니, 협상이 잘될 것으로 생각했다.
거기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지분을 다 긁어모으는 것은 좀 그래. 어차피 이 김에 이쪽 분야와 인맥을 쌓는 것이 좋아. 너무 일방적이어서는 곤란해.’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VLSI가 앞으로 NXP에 인수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VLSI 인력이 돌고 돌아서 다른 미국 IT 기업에도 영향을 준다. 굳이 자신이 견제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마크 듀켄 이사가 보여준 결과는 최민혁 자신의 기대치와는 달랐다.
그는 생각보다 쉽게 에플 컴퓨터를 설득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특히 처음 협상과는 달리 마크 듀켄 이사가 절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초췌한 표정만 봐도 이번 일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콘 쪽 지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상하군요. 우리 쪽과 에플 컴퓨터 지분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최민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두 회사만 지분을 매각한다면 너무 많은 지분을 털어내야 할 겁니다. 그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왕이면 세 회사가 적절하게 지분을 내놓았으면 합니다.”
“…….”
마크 듀켄 이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첫 만남 때였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VLSI 이사회에는 최민혁의 제안을 적극 수용 중이었다.
“아콘 쪽은 에플과 이야기가 많이 다릅니다. 그건 장담 못 합니다.”
“다르다면 어떤 점이 다른 겁니까?”
“RISC 특허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확신합니다. 비록 에플 컴퓨터 삽질 때문에 박살이 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꿈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딱히 아콘 행동에 대해서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우려한 딱 그림대로였다. 그는 그래서 더 걱정했다.
“아콘이 괜히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에플 이사회에서 설사 ARN 지분 매각을 허락했다고 해도 최종 계약서를 서명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장담을 못 합니다. 일방적인 계약은 결국 분란을 일으킬 뿐입니다.”
“…결국 아콘 지분까지 포함해서 적절하게 나누란 말입니까?”
“그게 모양이 좋지 않을까요? 우리 벨린 투자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이익을 독점하기보다는 네 회사가 서로 이익을 공유한 방식이니까요. 에플도 가능하면 많은 지분은 챙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신에 VLSI 쪽에는 칩 공급 과정에서 그만한 배당을 해드리겠습니다.”
마크 듀켄 이사는 왠지 자신이 계속 최민혁 실장에게 끌려간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딱히 최민혁의 제안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ARN 조인트 벤처 설립 이유 때문이다.
아콘이 원천 기술을 내놓고, VLSI가 칩을 제작하며, 에플 컴퓨터가 그 칩을 장착한 제품을 내놓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뉴턴 메시지 패드가 대박을 쳤다면 최민혁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런 바람은 실패로 끝났다.
만약 벨린 투자가 에플이 가진 ARN 지분을 다 사들인 후에 대박을 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토비나 자신 역시 경력에 치명적이다.
어떻게 보면 최민혁은 그런 최악의 경우까지 챙겨줬다.
마크 듀켄 이사는 신기한 눈으로 최민혁을 요리조리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최 실장 당신은 제가 보기와는 많이 다르군요.”
“계약은 윈윈이 가장 좋으니까요. 전 이번 협상이 굳이 문제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최민혁은 양손을 펼치면서 방긋 웃었다. 그가 굳이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이 협상 때문이 아니다. 지금 이미지가 결국은 마크 듀켄 이사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계약이 끝이 아니니까. 앞으로 검토할 기술은 넘쳐나. 마크 듀켄 이사가 언제까지 VLSI에 있지는 않아. 인생 1회차 기억으로는 몇 년 후에 다른 기업 CEO가 되니까.’
“하면 인수대금은 어느 정도로?”
“목표 자체는 가능하면 많은 지분이면 됩니다. 현재 50% 지분이 목표고, 인수 대금은 천오백만 달러 정도로 생각합니다.”
“천오백만 달러라……. 하면 그 수치만 맞추면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꼭 10% 지분만 남기지도 않아도 된다는 소리도 들립니다만?”
“각 회사 지분은 세 회사가 알아서 설정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지분은 50% 기준이니까요. 아, 지분 매입 대금은 어느 정도 더 올릴 의향은 있습니다.”
50% 지분이면 만만한 양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ARN 상황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도 아니다.
“…꽤 많군요.”
“대신에 경영 자체에 대해 간섭을 할 생각은 없지만, 기술 자문은 언제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저도 저전력 CPU에 대해서 제법 아니까요.”
“…….”
마크 듀켄 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이 제법 충격이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에 대한 프로필을 몰랐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해놓은 실적 중에는 MP3, 위성 사업부를 비롯한 굵직굵직한 기술이 많았다.
그런 성과를 고려한다면 최민혁 실장이 하는 말은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ARN 지분을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 제안은 제가 이 자리에서 답변 드리기 힘든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아콘 상황이 생각보다는 많이 복잡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최민혁은 악수를 청했고, 망설이던 마크 듀켄은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마크 듀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기 때문이다.
최민혁 역시 지금 협상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두른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니까. 아콘은 에플 컴퓨터에게 미안할 거고, 에플 컴퓨터 역시 VLSI 손실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을 거야. 마크 이사라면 이 관계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거야. 다행이라면 그나마 미국에서 진행하는 계약이라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없어 방해가 없다는 점이야. 그래도 모르니, 한번 확인할 필요는 있겠어.’
* * *
최민혁이 미국에서 한창 VLSI와 협상을 하는 동안에도 국내는 MP3 이슈 때문에 시끄러웠다.
정작 음반 대리점은 MP3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한국 언론이 난리였다.
그들은 음반 대리점을 앞세워서 계속 이 MP3 불법 파일에 관한 이야기와 소송 문제를 거론했다.
심지어 KM 전자 본사 입구에 몰려가서 시위하는 이들도 있었다.
웃기는 것은 이 시위자가 음반 대리점주가 아니라 전문 시위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기사화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소란이 계속되자 노이즈 마케팅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단숨에 40만 대를 넘어서서 결국 50만 대까지 팔린 것이었다.
KMP-01의 인기는 그 누구도 예상을 못 한 일이었다.
다만 이후 물량은 오성 전자에서 낸드 메모리 공급 부족 때문에 주춤했다.
오성 전자가 너무 서두른 덕분에 낸드 메모리 수율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런 소동의 배후에는 겉으로 화해한 오성 전자, 잘 지내자고 했던 LC 전자, 심지어 못 먹는 감 찔러보자는 다른 한국 대기업, 거기에 최민혁에 이를 갈고 있는 DL 전자가 힘을 합쳤다. 이들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KM 전자를 압박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당연히 이 소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전문 시위꾼까지 동원해서 끝장을 보려고 했다. 아니, 최소한 최민혁 실장이 화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뒤늦게야 한 가지 소식을 듣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민혁 그놈이 한국에 없다니? 아니, 이렇게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아예 신경도 안 쓴다는 소리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전 최민혁 실장이 최소한 이번 일에 집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영근 사장이 주도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다.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 부탁대로 얼굴마담 역할을 제대로 했다. 그는 음반 대리점주와 소통이라는 사건을 내세워서 오히려 사건을 더 키웠다.
정작 웃기는 것은 음반 대리점주는 이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하기는 하지만 KMP-01 판매를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당장 매출에도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면 그놈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이야?”
“…그게 확실치는 않습니다. 아마 미국 쪽이 아닐까 의심 중입니다.”
“미국? 가만 그리고 보니, 미국에 회사를 설립했다고 했지?”
“네. 얼마 전에 벨린 소프트를 설립하고, 건물을 사들였습니다.”
“설마 민혁, 그놈이 또 몰래 미국에서 뭔가 다른 기획을 진행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벨린 소프트는 KM 전자 쪽과 공동으로 일을 진행 중입니다. KMP-01에 들어간 OS는 그쪽에서 개발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하면 그 프로젝트 확인 때문에 미국으로 간 건가? 아니면 다른 프로젝트 때문인 건가?”
“…죄송합니다. 아직 그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권재홍 실장은 최민혁이 미국으로 갔는지도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니 최민혁이 그곳에서 도대체 뭘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안색을 굳혔다. 그는 이미 콜린스 핑계로 유럽으로 갔던 최민혁이 MP3 원천 기술을 사들였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미국 IT 기술을 인수하려고 간 거 아니야?”
“…그게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놈의 확인, 도대체 언제까지 확인만 하는 거야?!!”
“죄…….”
권재홍 비서실장이 ‘죄송합니다!’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최문경 부회장 안색이 변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 때문에 미칠 것 같았지만, 이전처럼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