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73화 (373/1,021)

#373.

“환영할 겁니다.”

“아니, 내 생각은 달라. 차세대 MP3에 ARN610이나 아니면 차세대 ARN을 사용해서 성과가 나오면, ARN 지분 가치는 오를 거야. 과연 이사회에서 그걸 용납할까?”

“그렇다고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지.”

“이사회도 이번 협상을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보다는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ARN610 성능입니다. 다른 모바일 CPU와 비교하면 성능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랬다.

ARN610은 나름 호환성을 비롯한 많은 장점이 있기는 있다. 그런데 다른 경쟁 칩과 비교해서는 성능 차이가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있었다.

저전력 CPU라는 특징 때문에 사용하지 않은 로직을 오프 시키면서 나타난 단점이다. 그리고 이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 성능도 반도체 공정 기술이 발전하면서 좋아질 것이다. 아콘이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 시점이 언제냐 하는 것도 문제다.

아콘이 차세대 ARN를 개발 중이니, 기다려 달라고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에플 컴퓨터 매출은 바닥을 보였다.

매년 20%씩 추락하는 매출은 에플 컴퓨터를 혼란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책임론이 터졌고, 그 동안 에플 내부 이사진끼리 진흙탕 싸움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에플 컴퓨팅을 차라리 다른 기업에 매각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오죽하면 에플 입사 3년 만에 유럽 지사 마케팅부 수석 부사장이 된 토비 스핀들러가 에플 CEO가 되었겠는가.

에플 이사진 사이의 갈등은 도저히 눈뜨고 봐주기가 힘들었다.

마크 듀켄 이사가 답답하게 생각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역시 에플 컴퓨터 혼란 때문에 VLSI 이사회에 찍혀 있었다.

VLSI 미래만을 생각하다가는 당장 쫓겨날 처지였던 것이다.

“젠장맞을.”

브런 스미스 부장 역시 최민혁 실장 제안을 선뜻 좋게 보지 않았다. 여유만 된다면 KMP-01과 같은 바이어는 넘쳐나니까.

문제는 그 바이어들이 지금 당장은 ARN610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턴 메시지 패드처럼 자사 제품이 그렇게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공적인 아이템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다.

“딱히 전량 지분을 매각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고민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도 마냥 틀린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ARN 조인트 벤처도 에플 전 스컬리 사장에 의해서 진행된 일이니까요.”

“알았어. 이사회를 소집해 주게.”

“알겠습니다.”

* * *

VLSI 이사회는 두 사람의 걱정처럼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제일 먼저 그들이 주목한 문제는 마크 듀켄 이사의 처우다.

[마크 이사, 당신이 그렇게 잘될 것이라 주장한 메시지 패드 결과가 뭡니까. 완전히 박살이 나지 않았습니까. 에플 컴퓨터 핑계를 대는데, 그 정도는 사전에 예측해야 하지 않습니까?]

VLSI 이사진은 아예 작정하고 마크 듀켄 이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ARM 610 실패를 모두 마크 듀켄에게 다 떠넘겼다.

마크 듀켄 이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최민혁 제안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쫓겨났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대안이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최민혁 실장의 제안과 KMP-01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흠.]

VLSI 이사진은 KMP-01 샘플과 매출 현황을 돌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 결과 자체만 놓고 본다면 뉴턴 메시지 패드가 가는 방향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전 에플 컴퓨터 CEO 스컬리가 이 뉴턴 메시지 패드를 다 말아먹은 것이다.

[확실히 설탕물만 팔던 친구가 IT 기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습니까? 이건 스컬리를 끌어들인 스티븐의 책임도 피하기 어렵습니다.]

KMP-01의 매출은 VLSI 이사진 처지에서 꽤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들도 이미 뉴턴 메시지 패드가 실패한 마당에 굳이 마크 듀켄 이사 제안을 슬쩍 가로채려는 이는 없었다.

차라리 마크 듀켄 이사가 설거지까지 하는 것이 더 편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지분이군요.]

마크 듀켄 이사도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는 이번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최소한 KMP-01 차세대 모델은 메시지 패드처럼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 안되면 ARN 차기 CPU를 투입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최민혁 실장이 이에 따른 지분을 원하는 겁니다.]

듣기만 하던 이사회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들 역시 KMP-01를 보면서 이번 일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신했다.

[차라리 에플 쪽에 요청하는 것은 어때요? 토비 스핀들러 에플 CEO가 요즘 사업부 구조조정한다고 정신없던데, 지분 매각도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어요. 더욱이 KMP-01 차세대 모델과 에플 컴퓨터는 아무런 관련이 없죠. 지분 매각을 한다면 오히려 에플이 적합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토비 사장이 정신이 없어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한 ARN 지분 매각은 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만.]

[그거야 당신이 설득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하겠다면 ARN610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크 듀켄 이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이번 일은 무조건 성공을 해야 했다.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의 기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이해를 잘 못 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제는 ARN 지분 매각이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켜야 했다.

‘젠장,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닐까?’

* * *

마크 듀켄 이사는 일단 최민혁 실장을 다시 만나서 재협상에 들어갔다.

그는 VLSI 이사회에서 최민혁 제안을 반대한다는 말을 슬쩍 흘려 보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단호했다.

“싫다면 어쩔 수가 없죠.”

바로 협상장에서 일어서는 최민혁.

마크 듀켄 이사는 다급하게 최민혁 팔을 잡은 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이사회 의견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말은 그래서 ARN 지분 전량 매각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적어도 10%의 지분은 남겨야 합니다.”

혹시라도 KMP-01의 차세대 모델이 대박 쳤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그 이상은 최민혁 실장과 계약을 통해서 어느 정도 여유를 뒀다.

하지만 최민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VLSI가 ARN 지분 매각을 순순히 따라줄 거라고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하지. KMP-01 매출 현황만 봐도 답은 나오니까.’

“저는 꼭 VLSI가 보유한 ARN 지분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에플이나 아콘 지분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지분만 있으면 됩니다.”

“…꼭 지분이 필요합니까?”

최민혁은 처음에 만났을 때 그 정중한 태도와는 달리 배를 째라 식으로 계속 툴툴거렸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게 하시는군요. 제가 또 설명해야 합니까?”

‘이 새끼가.’

“후유, 아닙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이번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긴 KMP-01은 기발한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야.’

최민혁은 씩 웃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전 기다려야겠군요. 하지만 너무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정 안되면 인텔 측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니까.”

인텔이란 말은 꼭 인텔이 보유한 새로운 CPU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냥 찔러보는 말이다. 하지만 VLSI와 틀어진 이후에 인텔이 새로운 임베디드 CPU를 개발한다는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 타켓은 VLSI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인텔’이란 말에 마크 듀켄 이사는 이를 악물었다. 자체 상표권 칩을 만들어서 판다고, 인텔이 한 짓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들!’

* * *

토비 스핀들러 에플 컴퓨터 CEO는 요즘 반쯤 맛이 나갔다. 그는 전임자가 싸놓은 똥을 치운다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전임자가 싸놓은 빅똥 중의 하나는 뜻밖에도 윈도우 출시와 관련된 것이다.

스컬리는 과거 10년 전에 윈도우 출시와 관련해서 MS(MacroSoft)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윈도우가 에플 리사에 있는 시각적인 디스플레이가 나온 점을 인정한 것이다.

과거에는 윈도우가 망하면서 이 계약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윈도우95가 대박을 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 계약은 라이센스 해석과 관련된 부분이었는데, 그야말로 아 다르고, 어 다른 것과 비슷했다.

토비 스핀들러 CEO는 망해가는 에플이 더 늪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윈도우95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런데 MS는 10년 전 계약서를 가지고 계속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윈도우95만 어떻게 제약을 걸어도 에플 숨통이 트일 것이라 예상해서 MS를 상대로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설사 소송에 지더라도 윈도우95에 대한 압력만 건다면 나을 것이라 봤다.

그런데 이놈의 계약서 때문에 소송이 예상한 것처럼 흘러갈 것 같지가 않았다.

‘개 같은 스컬리!’

마크 듀켄 이사가 그를 찾아온 것은 이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죠?”

두 사람은 마치 2차 세계 대전의 독일과 미국 병사인 것처럼 살벌하게 쳐다보았다. 둘 다 상대편을 통해서 자신의 입지가 망가진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마크 듀켄 이사는 시작부터 차갑기만 한 토비 때문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귀사에서 구조조정을 한다고 정신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혹시 ARN 지분 매각 쪽도 검토하고 있습니까?”

“아뇨. 그쪽은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

인상을 찌푸린 마크 듀켄은 상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마케팅 쪽뿐만 아니라 영업 쪽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아뇨. 진지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는 딱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메시지 패드와 관련된 ARN 610 공급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 안에는 초도 물량과 앞으로 어느 정도 칩을 공급할지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었다.

VLSI는 이 계약서를 토대로 해서 초도 물량을 찍었는데, 메시지 패드가 망하면서 전부 공장 창고에 쌓여 있었다.

토비 CEO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가 계약 위반에 따른 배상금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는 그래서 더 이상했다.

“계약 위반에 따른 보상금 청구서는 이해가 잘되는데, 굳이 ARN 지분을 원하는 이유는 뭡니까?”

“회사 자체적으로 ARN을 이용한 차세대 제품 개발을 할 생각입니다.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지분을 요구하는 겁니다. 어차피 에플 컴퓨터는 그 사업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토비는 스컬리가 말아먹은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정리하면서 이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프로젝트가 성공한다고 확신하는 겁니까?”

“그건 우리 회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귀사 때문에 우리 회사가 입은 손실이 쾌 큽니다. 거기에 따른 보상을 원하는 겁니다. 귀측에서 가지고 있는 ARN 지분 10%를 200만 달러에 사들이겠습니다.”

토비는 비웃었다.

“고작 200만 달러로 누구 코에 붙이라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마크 듀켄은 토비가 의외로 ARN 지분 매각에 반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요즘 에플 이사회 내부도 밥그릇 싸움한다고 정신이 없지.’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진지하게 협상에 임했고, ARN 지분 10%에 대한 금액은 300만 달러로 정해졌다.

다만 토비 CEO는 이사회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ARN 지분도 이 기회에 정리해 버리는 것이 좋기는 한데, 이사회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 * *

에플 컴퓨터가 잘나갈 때만 해도 에플 이사회는 꽤 강력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에플이 망해가는  시기에 이사회도 과거와 같지는 않았다.

이사회 내부는 서로 권력 투쟁한다고 치열하게 싸우기 바빴다.

토비 스핀들러가 에플 컴퓨터 CEO가 된 것은 이런 내부 갈등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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