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72화 (372/1,021)

#372.

단순히 물량이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VLSI에서 판매되는 그 어떤 칩과 비교해도 놀라운 물량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지적했다.

“달러로 대략 2억 달러가 좀 넘습니다. 제법 많은 정도가 아니라, 꽤 많은 셈이죠. ARN 610이 들어간 뉴턴 메시지 패드와 비교할 바가 아니죠.”

“…….”

마크 뉴켄 이사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뉴턴’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화가 났다. 그는 그제야 KMP-01 물건의 가치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

MP3 관련 원천 기술을 보유한 곳이 바로 KM 전자였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다른 업체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크 듀켄은 뒤늦게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은 가볍게 볼 친구가 아니었다. 좀 더 KM 전자에 대해서 알아봐야 했다.

그는 솔직히 자기 실수를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저자세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자기 실수와는 별개로 협상에 임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KM 전자에 대해서 미처 간과한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시간을 좀 더 주셨으면 합니다.”

최민혁은 당당하게 나오는 마크 듀켄 이사의 행동에 혀를 찼다. 마치 자신이 한 실수는 이미 지난 일인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미팅 일정을 다시 잡자는 이야기입니까?”

“네. 대신 그쪽과 사업 협상 문제는 좀 더 진지하게 살피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이사회를 통해서 정식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이번 미팅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솔직히 KM 전자가 어떤 회사인지도 몰랐습니다. 콜린스 소문은 듣기는 했지만 이런 모바일 기기와는 다릅니다. KM 전자 쪽에서 갑자기 일방적인 제안을 해왔고, 일상적인 대응을 했던 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순순히 물러났다. 이 정도면 첫 만남에서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VLSI 입장에서 과거 KM 전자는 듣보잡 회사인 것도 사실이다.

‘시작은 나쁘지 않아.’

* * *

마크 듀켄 이사는 우선 KM 전자, 최민혁 실장, KMP-01에 대한 조사부터 진행했다.

브런 스미스 부장은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서 KMP-01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내부 칩부터 시작해서 들어간 기술을 다 포함해서 분석했다.

그는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오자 안 그래도 요즘 인텔과의 갈등 때문에 혼란한 이사회를 소집하기보다는 핵심 실무진만을 호출했다.

그들 역시 마크 듀켄 이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중엔 한국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 이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마크 이사가 정리한 보고서를 보자 표정이 점점 바뀌었다. 아니, 그들은 KMP-01에 흥미를 드러냈다.

“이렇게 보니, 좀 아쉽네요. KMP-01의 성공 요인은 MP3 아닙니까? 그러면 메시지 패드에도 적용이 가능한 것 아닙니까?”

늘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브런 스미스 부장이 슬쩍 나섰다.

“뉴턴으로도 MP3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다만 MP3 로열티를 제공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제품을 비교하기는 힘듭니다.”

배터리 4개가 들어가는 뉴턴 메시지 패드는 나름 괜찮은 모바일 기기이다. 하지만 KMP-01과 비교하면 흉기나 마찬가지다.

과연 일반 사용자가 뉴턴 메시지 패드를 들고 다니면서 음악을 들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많이 아쉽습니다. 업무용으로 사용하다가 얼마든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 MP3 부분은 초창기에 검토를 해야 했습니다.”

“아니, 그걸 왜 우리가 고민하는 겁니까? 이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전 스컬리 사장이 충분히 검토했어야 할 문제 아닙니까?”

브런 스미스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당시엔 이 뉴턴 메시지 패드를 출시하는 것만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MP3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메모리 용량도 문제입니다. 이건 64MB를 사용하니까.”

물론 옆에 PCMCIA 인터페이스가 있어서 메모리 확장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MP3 플레이어 용도로만 놓고 본다면 두 가지 제품은 도저히 비교조차 하기 어려웠다.

뉴턴 메시지 패드를 들고 운동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마크 듀켄 이사는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스컬리’ 이름이 나오자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스컬리!”

스컬리 이름이 나오자 회의실 분위기는 서늘하게 변했다. 그가 한 짓 때문에 이번 일에 엮인 VLSI 임직원도 큰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견만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KMP-01은 VLSI와 같이 동업할 요인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에플 컴퓨터와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에플 컴퓨터와 동업은 쫄딱 말아먹었는데, KM 전자는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최소한 어느 정도 이익이 나올 것 같았다.

“KMP-01을 이용하면 ARN610 매출을 늘릴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면 사업적인 협력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굳이 정식 이사회를 열어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의견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마크 듀켄 이사는 실무진의 의견을 취합한 후에 몇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다시 연락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기다리면서 브런 스미스 부장이 만든 자료를 다시 꼼꼼하게 살폈다.

이번 만남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잘만 협상이 진행되면, ARN610이 KMP-01을 이용해서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민혁을 보자마자 가장 핵심적인 질문부터 했다.

“차세대 MP3 생산 수량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정해진 바 없습니다. 일단 성능 확인을 해봐야 아니까. 필요하다면 KMP-01에 적용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오성 전자와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 수량이 300만 개 정도 됩니다. 도시바 측과도 제법 물량 계약이 있으니, 그 이상이죠.”

도시바 측과 같은 물량 계약이라면 무려 600만 개다.

즉 칩 600만 개 계약이다.

예상 판매 수량이 600만 대란 이야기다.

아마 이 수치는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마크 듀켄 이사도 최민혁 실장이 좀 과장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지금 판매 상황을 보면 2~3년 정도 길게 본다면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었다.

‘거기에 글로벌 시장에서 차세대 모델이 중박만 쳐도 1,000만 대 판매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아.’

마크 듀켄 이사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VLSI가 어떤 기업인지 모를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즉 주문형 반도체 칩 계약이니, 추가적인 작업도 필요했다.

그것만 해도 뉴턴 메시지 패드의 흑역사를 덮고도 남았다.

다만 그 역시 바보는 아니다. 최민혁이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최민혁이 저렇게 수동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혹시 원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최민혁은 씩 웃었다.

“아, 마침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여전히 겉으로는 당당한 마크 듀켄 이사의 표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600만 개 칩 공급에 VLSI 칩이 어느 정도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VLSI 매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거기다 이게 어느 정도 성공만 한다면 다른 업체의 관심도 많이 늘어날 겁니다.”

실제로 뉴턴 메시지 패드가 망하고 나서 ARN610 역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른 회사들도 괜히 본인들 제품을 말아먹을까 싶어서 ARN610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차세대 MP3에 ARN610이 채택된 후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결과는 다르다.

단순히 차세대 MP3만이 아니라 다른 제품에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그 수치를 다 고려하면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최민혁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따라서 저도 그 수혜를 받고 싶습니다.”

자기 속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최민혁 실장 말에 마크 듀켄 이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좀 쉽게 말씀해 주세요.”

“VLSI가 가진 ARN 지분 일부를 원합니다.”

“ARN 지분이라…….”

딱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ARN 매출은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이 모든 사태가 바로 전 스컬리 CEO 때문이다. 아마 VLSI 이사회에서도 딱히 거부권을 행사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크 듀켄 이사는 오히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민혁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봤다.

“무슨 뜻으로 한 말입니까?”

“간단합니다. 어차피 ARN610 매출이 어느 정도 나오면 ARN 가치는 더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저도 그 이익을 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에플하고 조인트 벤처를 설립한 것도 그 때문 아닙니까.”

“그건…….”

최민혁은 자신이 구매한 뉴턴 메시지 패드를 보여주면서 툴툴거렸다.

“이것 때문에 ARN 조인트 벤처를 만든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제품이 망하면서 에플 컴퓨터도 상태가 안 좋은 것으로 알아요. 에플 주가가 1달러가 안 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죠. 아마 손해를 많이 본 것으로 압니다만? 하지만 차세대 MP3가 대박을 친다면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그 이익은 우리 회사 때문이고, 전 당신과 한배를 타고 그 이익을 나누고 싶은 겁니다.”

“흠.”

마크 듀켄 이사는 골치가 아픈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ARN 가치가 도저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지분을 매각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그건 내부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최민혁은 밝게 웃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VLSI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왕이면 아콘, 에플에도 영향을 주기를 바랐다. 마크 듀켄 이사의 표정을 봐서는 성공한 듯 보였다.

‘에플 사장과 만나서 여러 가지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어. 이왕이면 아콘도 흔들어서 ARN 원천 기술에 의심을 하는 것도 좋지. 그렇게만 된다면 두 회사 지분도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그가 확신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에플 컴퓨터의 사정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기억하는 인생 1회차에 따르면, 에플 컴퓨터 매각 부분은 이미 에플 이사회에서 어느 정도 공감을 하는 단계였다.

심지어 에플 컴퓨터 매각에 관한 결정도 내려졌다.

그런데 그 매각이 결국 중단되고 만다.

‘그 이후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스티븐의 귀환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지금 타이밍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봐야 해.’

“그러면 기다리죠. 아, 그리고 저는 가능하면 많은 지분을 원합니다. 그러니 진지하게 제 제안을 검토해 주기 바랍니다.”

“…그러죠.”

마크 듀켄 이사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최민혁이 하는 말을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에플 전 CEO 스컬리가 한 제안이 최민혁 실장이 한 말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이 KMP-01 판매 물량을 보더라도 망하지는 않을 거야.’

* * *

마크 듀켄 이사는 최민혁 실장과의 만남 이후에 KMP-01에 관한 자료를 다시 원점에서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브런 스미스 부장이 만들어온 자료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했다.

계약 조건은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더욱이 ARN 지분을 요구한 것도 충분한 이유가 존재했다.

그냥 돈으로 ARN 지분을 사겠다는 개소리를 했다면 걷어차 버렸을 테지만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정말 괜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최민혁 실장 프로필을 확인했다.

“…믿기지 않는군.”

특히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KM 전자의 주가였다. 고작 1,600원하던 주가를 현재 18만 원대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 최민혁 실장이다.

주가 폭등을 이용해서 15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이익을 본 것은 더 황당했다.

거기에 벨린 소프트까지 설립했다. 심지어 그 비싼 실리콘 밸리 건물과 땅까지 매입하면서 말이다.

냉정한 브런 스미스 부장은 최민혁의 제안을 선뜻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최민혁이 설사 다른 꿍꿍이가 있어도 그의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게 문제야. 하아, 지분 매각은 하고 싶지 않은데, 이사회에서는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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