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다만 그는 인생 1회차 기억에서 LC 전자가 앞으로 하는 일을 쭉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오성 전자만큼은 아니지만, LC 전자도 중소 기업에게 딱히 좋은 회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
아니, KM 전자를 상대로 LC 전자가 공격적인 반응을 보일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특허 때문이겠지.’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LC 전자도 겁을 먹었나 보네요.”
조성돈 팀장 역시 한층 달라진 대기업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 욕심 많은 LC 전자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무래도 콜린스 CRT 물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부담스러웠겠죠.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계약이 취소되면 손실이 크지 않습니까?”
“…설마 LC 전자와의 계약도 엎어버릴 생각이었습니까?”
최민혁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점을 피하려고 CRT 공급업체 숫자를 늘렸지 않습니까. 중국 중화연관도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조성돈 팀장은 중국 업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중화연관은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배후에 중국 공산당이 있는데,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가 납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애초에 중국 업체를 끌어들인 것은 다른 업체에 대한 경고일 뿐이다. 특히 LC 전자의 경우에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압니다. 제가 설마 중화연관을 믿고 그 일을 내버려 두겠습니까. 하지만 LC 전자나 오성 전자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어요.”
최민혁은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이 문제를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애초에 오성 전자, LC 전자와 같은 한국 대기업을 믿지 않았다. 중국 업체는 더 못 믿어서 물량이 아주 적다. 굳이 보험을 들어든 이유다.
‘LC 전자라…….’
지금이야 KM 전자 상승세가 워낙에 무서워서 몸을 사렸다.
과연 앞으로도 LC 전자가 저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약해지면 그때는 물어뜯겠지.’
“참, KMP-01 추가 생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만 대는 이미 예약 물량이 걸려 있는 대리점 쪽에 공급이 되었고, 나머지 13만 대는 계속 양산 중입니다. 공장을 최대한 돌리고 있으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KMP-01 반응이 여전히 좋은가 보군요.”
“말도 마십시오.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예약 물량이 계속 늘어나서 누적 물량만 40만 대를 넘었습니다. 이 흐름만 쭉 이어간다면 다음 달까지 100만 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최민혁이 아는 인생 1회차 기억과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생각보다는 반응이 더 좋네요.”
“아무래도 MP3 소송 효과가 큰 것 같습니다. 9시 뉴스 통해서도 소송 뉴스가 나가면서 뒤늦게야 MP3 파일에 대해서 안 사람이 많습니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다. MP3를 전혀 몰랐던 사람조차 이 MP3 플레이어에 대해서 소송 때문에 처음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이 정보를 얻은 이들은 PC 통신에 들어가서 실망했다가 다시 아는 지인 통해서 냅스트를 구해서 파일을 내려받았다.
굳이 국내 음악이 아니라 팝송도 그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음악 파일이 공짜란 점이다.
“냅스트가 진짜 대박입니다. 불법 MP3 파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근원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이 정도 인기몰이는 어려웠을 겁니다. 냅스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최민혁은 ‘냅스트’란 말에 움찔 몸을 떨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해외 메이저 업체 국내 지사에서 이 문제를 우려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국내 법무법인 통해서 소송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한국 음반 저작권 협회 쪽에서 해외 메이저 음반 업체 지사와 손을 잡고, 소송을 더 키울 목적인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았지만, 이 부분은 더 파지 않았다.
그는 슬쩍 주제를 바꾸었다.
“ARN 조사 결과는 어때요?”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최민혁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과연 기획 팀이 콜린스 기획을 통해서 성장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이번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해. 기획 팀이 늘 생각 없이 움직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좋아요. 다만 이 문제는 좀 더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지분 인수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중이니까.”
“알겠습니다.”
* * *
바람 잘 날이 없는 KM 전자 기획 팀은 KMP-01 출시 이후에 오히려 휴지기를 가졌다. MP3 출시 이후에는 제법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다만 차세대 MP3 플레이어 이야기가 나오자 기획 팀은 다시 바빠졌다.
기술적인 검토가 꽤 필요했다.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 대표적인 아이템 중의 하나는 바로 에플 컴퓨터의 뉴턴 메시지 패드다.
기획 팀이 굳이 이 제품을 특정해서라기보다는 이 제품이 PDA로 나온 제품 중에는 세계 최초이기 때문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기획 팀이 검토하는 자료 중에 집중해야 할 부분만을 선택해서 지시 내렸다.
“ARN에 대해서 특히 중점적으로 확인해 볼 것.”
ARN에 대한 조사는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다. 다만 이 ARN에 투자한 회사의 내부적인 이야기에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
당장 에플 컴퓨터만 해도 매출이 매년 격감했는데, 올해는 고작 11억 달러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주가는 1달러 밑을 기면서 낮을 때는 38센트까지 추락해 버렸다.
기획 팀 처지에서는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무난한 이영란 대리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왜 ARN에 대해서 조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정원 과장 역시 이영란 대리와 비슷하기는 했지만, 과장답게 그저 지시만을 보지는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RISC 타입 CPU 원천 기술을 가진 회사잖아. 이 정도 CPU라면 KMP-01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어.”
그리고 이 말에 배턴을 이어받은 사람은 뜻밖에도 배종대 과장이었다.
“나도 이 과장 의견에 찬성. ARN이 가진 기술은 단순히 CPU만이 아니라 개발 환경도 같이 포함하니까. 만약 기존 ARN 성능만 계속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굳이 8051에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
바로 성능.
기획 팀도 처음에는 웬 뜬금없는 ARN인가 싶었다.
그런데 성능이 좋아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8051은 딱 정형화된 CPU라서 그다지 발전이 없다.
이에 비해서 ARN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얼마든지 성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초기 ARN1에서 시작해서 지금 뉴턴에 적용된 ARN 610은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ARN이 가지는 특성 자체가 다양한 설계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KMP-01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기는 하지만 근거리 통신에 대한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런데 8051을 사용하면 이 작업이 생각보다는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
조성돈 팀장은 기획 팀원의 날카로운 판단에 살짝 놀랐다. 그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답을 찾아가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우리 실장님이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을 진행하지 않잖아. ARN에 관심이 있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강점이 있지.”
박상기 차장은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ARN의 주주 회사에 대한 분석 결과를 보여주었다. 주로 에플 컴퓨터였다.
“비록 뉴턴 프로젝트를 말아먹으면서 전 스컬리 사장이 쫓겨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배울 것이 많습니다.”
왜 뉴턴 메시지 패드가 실패했고, 이를 어떻게 하면 KM 전자가 우려먹을 수 있을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다.
각 팀원이 조사한 내용과 같이 섞어보면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나왔다.
KMP-01과 ARN를 잘만 합치면 시너지가 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다만 ARN 칩을 사용하기 전에 지분 투자는 필수입니다. 남 좋은 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에플도 그런 목적으로 지분 투자를 한 것이니까.”
“…좋네요.”
박상기 차장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KMP-01과 ARN 궁합이 워낙에 좋으니, 조사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이 투자가 성공하려면 여러 가지 기술적인 난관을 넘어야 합니다.”
“그건 실장님도 아마 사전에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지 않고야 이런 조사를 진행하게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게요.”
박상기 차장은 씩 웃으면서 발표를 끝냈다. 다른 팀원들 역시 눈동자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차세대 MP3가 어떤 형태가 될지 추론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 회의를 끝냈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이 지시를 내릴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내리지 않는 것을 확신했다.
‘이제 실장님의 의도를 좀 알겠어.’
* * *
최민혁은 일단 MP3 관련 소송의 반응을 살피면서도 지켜만 봤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KMP-01 관련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제는 국내 모든 전자 관련 잡지에서 KMP-01에 대해서 조명했다.
딱히 별다른 광고 지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심지어 PC 통신에서 'KMP-01'으로 검색하면 뜨는 수천 건의 게시물도 한 역할을 했다.
굳이 KM 전자가 나서서 아무런 영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영업 팀은 오히려 전화를 받으면 물량이 떨어진 대리점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그는 LC 전자 건도 있고 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가능하면 이쪽에 시선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조성돈 팀장이 그런 차에 ARN에 관한 보고서를 가져왔다.
최민혁은 보고서를 읽으면서 꽤 만족했다. 그는 인생 1회차에서 이들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보고서는 뜻밖에 그 부분을 잘 파악했다.
심지어 최민혁 자신이 미처 간과한 부분도 지적했다.
이제는 움직이어야 할 시기.
다만 이대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곰곰이 인생 1회차 기억을 살펴보다가 관련 아이템 하나를 골라냈다.
이 정도면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완전히 집중시키고도 남았다.
잘만 엮으면 이쪽에 한국 대기업, 최문경 부회장 시선을 묶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보고서대로 움직이려면 미국에 제가 직접 가야 하는데, MP3 관련 소송 건은 이대로 그냥 둬서는 안 될 것 같네요. 마스터 카드 한국 지사 쪽에 미팅을 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마스터 카드란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이 의도한 바는 잘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MP3 소송 때문에 말이 나와도 우리 KM 전자와 엮을 수는 없어. 그렇다면 노이즈 마케팅일까.’
* * *
마스터 카드 한국 지사와 미팅은 어렵게 않게 성사되었다.
그들 역시 KM 전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왜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 역시 대충 추측만 할 뿐이다. 그는 최민혁이 굳이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이제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뜻밖에도 폴 콘프레이 부사장이 자리했다. 그는 이미 소문이 자자한 KM 전자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기에 굳이 지사장 대신에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이미 폴 콘프레이 부사장 기자 회견 날짜를 인생 1회차에서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스터 카드가 진행하고 있는 한 가지 정보를 찔러보았다.
“내년에 마스터 카드에서 인터넷 전자 상거래 서비스를 시작하는 것으로 압니다.”
폴 콘프레이 부사장은 최근 인터넷 전자 상거래 서비스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최민혁이 이 정보를 알자 깜짝 놀랐다.
“어? 그, 그걸 어떻게 안 겁니까?”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기자 회견 통해서 이 서비스에 대한 것을 공개하려고 한 것으로 압니다만?”
“설마 한국 언론 통해서 정보를 얻은 겁니까?”
“대충 그렇다고 해두죠. 지금은 보안 문제 때문에 좀 늦어지는 것으로 압니다. 제 말이 맞나요?”
“…맞습니다.”
폴 부사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인터넷 전자 상거래에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보안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IBM, 넷스케이프, 사이버 캐쉬, 퀄컴과 같은 업체와 공동 대응책을 강구 중이었다.
여기서 PC 윈도우 자체는 이 보안 문제가 아주 취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