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65화 (365/1,021)

#365.

한병수 부장은 이어 입을 열었다.

“제 말은 그 이야기를 지금 KM 그룹 비서실장 본인에게서 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신네가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권재홍 비서실장은 오히려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의심하자 혀를 찼다. 그는 솔직한 내심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거야 우리 회사 입장을 잘 아는 한병수 부장님이라면 모를 수가 없죠. 서로 처지가 비슷비슷하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저희 부회장님 입장을 안다면, 왜 이러는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어요. 뻔히 보이는 속내까지 털어놓아야 합니까?”

“부회장님하고 최민혁 실장이 관계가 나쁜 것을 말하는 겁니까?”

“네.”

“그건 더 이해를 못 하겠네요. 최민혁 실장 나이가 고작 20살에 불과한데, 최문경 부회장이 눈치를 본다는 말입니까?”

“하.”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마를 잡았다. KM 그룹 내 치부를 말하려니, 그도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대로 대충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과 최문경 부회장 사이에 있었던 하나씩 털어놓았다. 대체로 자신이 당했던 일이었다.

굳이 이런 내막까지 말하는 것은 한병수 부장도 똑같이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란 말입니까?”

“정말 답답하시네요. 제가 오죽 답답하면 LC 전자를 찾아와서 이렇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최민혁 실장을 찍어 누르는 것은 LC 전자나 우리 부회장님 둘 다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하지만 한병수 부장도 바보는 아니다. 그 역시 KM 그룹 내의 경영권 분쟁에 대해서 알았다. 최문경 부회장 최측근인 권재홍 비서실장의 의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그는 최문경 부회장처럼 집요한 사람은 아니다. 비록 콜린스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해서 KM 전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KM 전자도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만 권 실장님 지금 의도가 자꾸 우리와 KM 전자 싸움을 부추기는 것 아닙니까.”

“아쉽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더 어떤 할 말이 없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생각처럼 되지 않는 협상에 혀를 내둘렀지만, 굳이 집착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만 해도 LC 전자는 최문경 부회장이 KM 전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LC 전자 처지에서는 이대로 KM 전자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는 거야.’

* * *

한병수는 먼저 자리를 일어난 권재홍 비서실장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LC 전자 본사로 돌아와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했다.

“최 실장 성깔이 보통 넘는다고 했지?”

한병수 부장 최측근으로 있는 기획 2팀 임명진 부장은 이미 사전에 조사한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네. 오성 전자 사태도 따지고 보면 전부 최민혁 실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보기 힘듭니다.”

“그러면 권 실장 말이 다 사실이란 소리야?”

“일부 과장이 있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하.”

한병수 부장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 자신은 20살 때 한창 여자랑 논다고 정신이 없었다.

소위 말하면 재벌 3세. 그것도 LC 전자의 직계다. 손만 벌리면 여자는 주변에 넘쳐났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살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그런 자신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것도 서자 주제에.’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다. 그 역시 최민혁 관련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하긴 KM 전자 주식을 1,600원대에 다 먹었으니. 참, KM 주가는 얼마나 올랐어?”

“23만 원을 돌파한 주가는 최근 조정을 거치면서 20만 원대까지 내려갔습니다.”

“좋아, 그러면 임명진 부장이 이번 일을 다시 한번 검토해 봐.”

“알겠습니다.”

* * *

임명진 부장은 굳이 KMP-01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없었다.

KMP-01이 비록 부품 수급 때문에 20만 대 판매에서 멈추었지만, 예약 물량이 추가로 20만 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KM 전자의 주가다.

KMP-01 판매가 대박을 친 것과는 달리 주가는 계속 하락폭을 이어가서 결국 18만 원 이하로 다시 떨어지고 말았다.

KMP-01 출시 이후로 제품은 대박을 쳤지만, 오히려 시장에 정보가 드러나면서 KM 전자 주가는 오히려 하락폭을 키웠다.

지금까지 KM 전자 주가가 바로 이 MP3 플레이어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였다.

한병수 부장은 그런 내용이 담긴 보고서에 어이가 없었다.

“하면 외국인이 KM 전자 주식을 산 것도 이 제품 때문이었어?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임명진 부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사전에 MP3에 대해 조사했다. MP3란 물건이 있어서 조사는 연속성을 띠었다.

덕분에 KM 전자가 가지고 있는 원천 기술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한병수 부장은 그 보고서를 다 읽고 내려놓았다.

“…….”

한병수 부장은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그저 이름만 들어봤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고 일어나니, MP3 관련 특허가 생긴 것을 느꼈다.

아니, 그 정보는 알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최민혁 실장이란 점이다.

“이게 진짜 사실이야? 정말 최 실장이 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MP3 원천 기술까지 다 확보할 수 있어?!”

“톰슨 멀티미디어, 브라운 호퍼 연구소, 시즈벨에서 특허를 다 사들였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바로 그쪽에서도 시인했습니다.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밝힌 것도 계약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입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이 거래를 주도한 것도 어제 확인했습니다.”

“…….”

한병수 부장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뒤늦게야 권재홍 비서실장이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깨달았다.

모든 일에 늘 냉정한 임명진 부장은 자기 의견을 밝혔다.

“KM 그룹 최문경 부회장 측도 KM 전자의 성장세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KM 전자 내부 정보를 우리 쪽에 흘린 것입니다.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을 견제할 목적 같습니다.”

하지만 한병수 부장은 오히려 화가 났다. 이미 게임은 다 끝났는데, 인제 와서 게임에 끼어들라고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 와서 이딴 정보를 흘리면 어떻게 하자는 소리야.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서 목적지에 다 와가잖아?!”

“그건…….”

임명진 부장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한병수 부장은 처음에는 크게 분노했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차렸다.

“KMP-01 반응은 어때?”

“MP3 플레이어 시장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우리도 빨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쯧.”

한병수 부장은 환장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골프채를 잡은 채 몇 번 휘둘렀다. 그제야 속이 좀 가라앉았다.

그는 뒤늦게야 KM 전자 주식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이해했다.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지금까지 KM 전자 주식을 들고 있었는지도 말이다.

‘주식을 파는 사람은 없고, 사는 사람만 있었지. 이 때문이었어. 그러니 주식으로 초대박을 쳤지. 그렇다고 주가 조작이라고 말하기도 모호하네.’

외국계 증권 회사가 KM 전자를 유독 빨아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KM 전자 주가가 그냥 위로 쭉쭉 올라가는 일은 한국 주식 시장에서도 전례가 없었잖아. 이게 다 MP3 원천 기술 때문이었어.”

임명진 과장은 한병수 부장 표정이 심각해지자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KM 전자를 견제할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정 안 되면 검찰 쪽도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한병수 부장은 굳이 KM 전자를 굳이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검찰이 신제품 개발해서 미래 가치가 오른 회사를 무슨 명분으로 조사하겠어. 그리고 미국 콜린스 반응도 나쁘지 않다면서?”

“뉴욕 판매 이후에 반응이 워낙에 좋아서 지금 난리입니다. 물건이 없어서 못 산다는 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으니까요.”

“소비자 반응이 그렇게 좋아?”

“네. 특히 미국 부유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 신축 아파트나 주택에도 많이 들어갑니다.”

“그거 좀 이상하네. 콜린스는 미국 판매망도 없는 회사인데, 그런 일이 가능해.”

“이제까지 콜린스 판매에 압력을 넣던 월마트도 이미 손을 든 상황입니다. 월마트에서 2만 대 정도 수입한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입소문이 돌았는데, 현지 업체 쪽에서 적극적이라서 어떻게 일이 좋게 풀려가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미국 정부 쪽에서 의도적으로 콜린스를 밀어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설마 소니를 견제해서 일본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거야?”

“네.”

소심해서 늘 안정적인 전략만 계획하는 한병수 부장 처지에서는 도저히 KM 전자를 건드릴 생각도 없었고, 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 최민혁 실장이 CRT 공급 가지고 태클 걸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비록 살기 위해서는 줄타기하지만 임명진 부장은 편법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최민혁 실장이라면 당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저희 쪽 CRT 공급을 아예 끊어버리겠죠. 그걸 소니나 아니면 필립스 쪽에 돌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CRT 거래 업체가 4~5곳이 되니까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최근 DL 화재가 휘청한 것도 최민혁 실장이 손을 쓴 것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게 진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부 관여했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볼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권재홍 비서실장이 와서 한 이야기가 반만 맞아도 최민혁 실장이 관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기가 막히네.”

임명진 차장은 소심한 한병수가 괜한 사고를 치지 않도록 다소 과장한 어조로 계속 이야기했다.

“최훈열 전무 구속이나 김현우 상무 축출에도 최민혁 실장이 관여했다는 것이 이제는 공공연한 소문입니다.”

“…놀랍군.”

한병수 부장도 최민혁을 얕잡아 보던 마음을 바꾸고 말았다. 그는 권재홍 비서실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최민혁 실장과 자신이 대거리하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둘이 싸워서 누가 이겨도 최문경 부회장은 손해를 볼 것이 없었다.

임명진 부장은 그런 한병수 부장 마음을 안 것처럼 자신이 조사한 것을 털어놓았다.

“심지어 최민혁 실장이 콜린스 개발을 이끌어낸 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콜린스 같은 제품 개발에는 몇 년이 족히 걸려. 그때는 최민혁 실장은 고작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이었잖아. 그게 가능해?”

“사실 그 부분은 아직도 설왕설래합니다. 오성 전자로 이직한 최병연 팀장이 마무리했다고 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실제로 최병연 팀장은 KM 전자로 복귀했고, 곧 연구소장이 된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

한병수 부장은 최민혁 실장 스토리를 들으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명진 부장은 자신이 조사한 이야기를 계속 말했다.

오성 전자와 최문경 부회장과는 달리 최민혁 관련 행보는 뒤늦게 많이 밝혀진 터라 그 내용이 생각보다는 구체적이었다.

한병수 부장은 고민한 끝에 적당한 타협안을 결정했다.

“차라리 이렇게 하지. 최문경 부회장 쪽에서 한 일을 KM 전자 측에 흘려. 권재홍 비서실장이 다른 대기업도 만나서 장난질할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가자고, 그리고 우리는 당신하고 싸울 생각이 없다는 점도 밝혀. 필요하다면 MP3 특허료 관련해서 협상도 하고 싶다는 점도 제안해.”

“…합리적인 결정입니다.”

임명진 부장은 뜻밖의 의견에 한병수 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록 결단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도 눈치가 빠르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점을 높이 봤다. 이번 결정은 한병수 부장이 한 판단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줄은 잘 잡은 것 같아.’

* * *

임명진 부장은 LC 전자 CRT 담당 임직원을 통해서 넌지시 KM 전자에 권재홍 비서실장의 제안을 슬쩍 흘렸다.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이 소식을 접한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어차피 최문경 부회장 수법은 잘 알아서 이런 짓을 꾸며도 그냥 그런가 싶었다. 이보다는 생각보다 저자세인 LC 전자의 행보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LC 전자는 다른 대기업과는 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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