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뉴턴은 바로 KMP-01과 묘하게 겹치는 제품이다.
KMP-01은 물론 이 뉴턴의 모든 단점을 극복했다. 심지어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KMP-01의 미래는 자연스럽게 뉴턴과도 겹친다.
최민혁으로서는 ARN을 그냥 간과할 수가 없다. 아니, 최소한 지금 시점에서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 ARN 지분을 가진 세 회사가 과연 지분을 내놓겠느냐 하는 점이다.
‘돈을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을거야. 오히려 더 의심할 테니까. 절대로 지분을 포기할 친구는 아냐. 결국은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KMP-01 모델에 관심이 있을 테니, 파트너 상대로 인정해 줄 거야.’
쓰게 웃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이 문제를 간과하고 넘어갔을 테니까.
최민혁은 차세대 LCD를 포함해 차세대 MP3에 들어간 기술을 하나씩 머리에 떠올렸다. 아무래도 일정 조율이 필요했다.
그는 빡빡한 일정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KMP-01 개발 후에 좀 쉬어가나 싶었지만,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는 결국 조성돈 팀장을 불러서 ARN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분을 얻는 것도 좋습니다. 아직 상장도 하지 않은 회사이고, 뉴턴 실패 때문에 타격이 클 테니까. 아마 쉽지는 않겠지만 에플 컴퓨터는 망해가는 회사라서 혹시라도 지분 매각 제안을 받을지도 모르죠.”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에게 저전력 CPU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최민혁의 방대한 지식에 오히려 감탄했다.
최민혁은 MP3 원천 기술 때문에 독이 잔뜩 올라있는 최문경 부회장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앞으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오성 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의 엄청난 견제가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다만 우리 첫째 큰아버지,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이 이 정보를 알면, 별로 재미없겠죠. 의미도 모르고 그냥 투자를 지를 수가 있어요.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솔직히 조성돈 팀장도 저전력 CPU의 필요성은 알았지만 아직은 진정한 의미를 잘 몰라서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실장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 * *
최문경 부회장은 가족 식사 시간을 가진 후에 최민혁과의 대화를 다시 한번 돌이켜 봤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최민혁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한 놈.’
최소한 가족끼리 모인 자리에서 자기 내심을 털어놓을 줄 알았다.
아니, 그런 모습이 보였다.
‘아니야.’
오히려 최용욱 회장이 자신의 제안에 관심을 뒀다.
하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은 휴대폰 사업에 뛰어들어서 생존할 자신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도 그런 사실을 짐작하자 최민혁에게 더 집착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자신이 만든 계획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권재홍 비서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나선 것을 지켜봤기에 위로만 해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따위 소리는 하지도 마. 오성 전자도 최민혁, 그 새끼가 부담스러워서 타협하는 마당인데, 권 실장 자네라고 무슨 수가 있겠어?!”
“…네.”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문경 부회장 타박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제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충분히 절감했다.
인간을 넘어선 최민혁의 통찰력은 그 누구도 따르기 힘든 수준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상황이 너무 짜증 나고, 화가 나서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아니, 오성 전자가 그렇다고 해도 다른 대기업은 이대로 KM 전자를 그냥 두고만 보고 있어? LC 전자도 있고, 대운 전자도 있잖아. 걔들은 생각도 못 하는 병신이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KM 그룹 입장을 예를 들면서 그들 입장을 설명했다.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달리 심각성을 잘 이해를 못 한 눈치입니다. 최민혁 실장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아무리 설명해도 상황을 이해 못 합니다. 고작 20살짜리 애송이가 알아봐야 얼마나 아냐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KMP-01 판매 수량을 보면서 움직일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KMP-01 판매 대박은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초기 반응이 좋다고 해도 이 열기가 계속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20만 대를 구매한 이들은 MP3 매니아 층이 대다수였다.
다른 일반 시민이 그들과 같이 움직인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니 다른 대기업들은 지금은 KMP-01 반응을 지켜봐야 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 말에 뒤늦게 다시 자신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성이 돌아오자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자책했다.
그는 가족 모임에서 최민혁이 보인 태도를 떠올리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니, 이대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어. 권 실장 자네라도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이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담당자를 만나서 이야기해 줘. 오성 전자가 지금 어떤 반응인지도 말하고, 그러면 태도가 좀 달라질 거야!!”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내심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최문경 부회장 지시를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오성 전자와 달리 다른 대기업은 얼마든지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LC 전자 쪽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 * *
LC 전자는 장기 경영 전략 목표 중의 하나로 디스플레이를 꼽았다. 이들은 매년 디스플레이 분야에 수천억을 투자해 왔다.
대형 TV 시장은 이들의 장기 플랜 중에 큰 포지션을 차지했다.
그중에 핵심은 바로 완전 평면 모니터다.
이들도 콜린스가 나오기 전에는 KM 전자 신모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콜린스가 시장에 등장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 역시 다른 전자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완전 평면 모니터를 개발하면서 수백억을 깨 먹었다.
따라서 KM 전자의 콜린스 출시는 그들에게는 꽤 큰 쇼크였다.
LC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콜린스 관련 문제를 직접 다루었다.
LC 전자 직계 한봉준 상무의 장남 한병수 부장도 자기 자리 보전을 못 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막상 부랴부랴 기획 2팀을 총 동원해서 KM 전자를 파보았지만 얻는 것은 많지가 않았다.
일단 콜린스 덕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한 충성도가 대폭 오른 KM 전자 임직원에게서 그 어떤 정보를 얻지 못했다.
더욱이 보안이 너무 강화되어서 공장 쪽을 팔 수도 없었다.
심지어 LC 전자 협력 업체로 돈에 집착이 심한 대림 전자의 손동권 사장조차 입을 열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네. 손동권 사장이라면 추석에 매일 선물을 보내던 그 작자잖아.”
한병수 부장을 손동권 사장을 극도로 싫어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던 임명진 부장은 손동권 사장 처지를 이해하기에 조심스럽기만 했다.
“아무래도 KM 전자에서 주문 물량이 쏟아진 것 때문일 겁니다. 특히 편향 코일과 고압 변성기 물량이 예상 물량보다 수십만 대가 늘어나면서 매출이 대폭 늘어났습니다.”
대림 전자는 KM 전자만 아니라 다른 업체에도 편향 코일과 고압 변성기를 공급한다. 다만 이건 자체 생산한 것에 한했다.
KM 전자에 공급하는 편향 코일이나 고압 변성기는 라이센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병수 부장은 손동권 시장을 압박하면 관련 기술을 일부라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을 텐데?”
“그게 또 콜린스 입소문이 나면서 다른 업체 바이어의 방문이 줄을 있는 것 같습니다.”
KM 고압 변성기는 굳이 TV에만 사용할 이유가 없다. 소형화가 된 덕분에 프린트를 비롯한 다양한 기기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고압 변성기는 오성 프린트 사업부 쪽에도 납품된다.
권태성 실장이 고압 변성기 샘플을 얻었던 통로이기도 했다.
지금은 또 상황이 달라졌다.
콜린스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기술력 중의 하나가 이 KM 고압 변성기를 제조하는 회사가 대림 전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거처럼 LC 전자의 갑질에 대림 전자가 고개 숙일 이유는 없었다.
눈치 빠른 손동권 사장의 판단 덕분에 초대박을 터뜨린 것이었다. 비록 과거 KM 전자를 상대로 회사 허리가 휘청할 정도로 보상했지만, 그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콜린스가 가파르게 시장을 잠식하면서 대림전자는 LC 전자의 황당한 요구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 회사 기술에 대해서 쓸데없는 요구를 자꾸 하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고, 거래를 끊겠습니다!”
덕분에 LC 디스플레이 국내 매출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감했고, 지난달은 바닥을 뚫어버렸다. 무려 50% 가까운 매출 하락폭을 보인 것이었다.
한병수 부장은 LC 전자 기획실 인원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 부서를 쥐 잡듯이 잡았다. 그나마 매출이 좀 나아졌다. 다른 관련 제품과 같이 엮은 마케팅이 성공한 것이었다.
“손 사장, 그 새끼가 왜 저러는 거야?”
“아무래도 KM 전자 쪽에 몰빵 한 것 같습니다.”
“협박이 아니면 차라리 당근을 제시하면 되잖아?”
“그것도 안 먹힙니다.”
정확히는 대림전자가 지금 얻는 이익을 감안할 때 LC 전자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록 LC 전자와 거래를 끊더라도 대림전자는 이미 다양한 납품처를 만들어 뒀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KM 전자는 마치 강철 바위라도 된 것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차에 나온 것이 바로 KMP-01이었다.
“어, 이게 뭐야?”
“그게 좀…….”
“당장 분석해봐!”
LC 전자 연구소는 부랴부랴 MP3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다.
오성 전자보다는 한 단계 느린 반응이었다.
LC 전자는 최민혁 실장과 직접 부딪친 적이 없었고, 크게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KM 전자의 움직임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조사 결과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충격적인 정보를 드러냈다.
“맙소사.”
그들이 받은 충격은 권태성 실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걸어가다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받은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 * *
LC 전자는 뒤늦게야 MP3 관련 원천 기술, MP3 플레이어에 대한 사실을 알고는 가능한 인력풀을 총동원해서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이 받은 충격은 더 커졌다.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부분은 오성 전자조차 KM 전자와 특허료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병수 부장이 권재홍 비서실장 연락을 받은 것은 마침 이 시기였다.
이미 KM 그룹 내부에서 경영권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병수 부장은 서울의 한 한정식집에서 그를 만났다.
한병수 부장은 이미 오성 전자와의 특허권 협상과 같은 문제 때문에 잔뜩 달아올랐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MP3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상대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관련 정보를 다 풀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슬그머니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KM 전자에 CRT 공급을 하지 말란 말이군요.”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KM 전자 TV 매출이 커지면 LC 전자에도 좋은 것이 있습니까.”
‘이미 늦었어요.’
한병수 부장은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왜 이런 제안을 내놓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같은 계열사를 죽이려고 경쟁업체에 그런 제안을 하다니.”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미 한병수 부장의 처지를 잘 알았다. LC 전자 내에서 위로 올라가기를 포기한 한병수 부장의 처지를 말이다.
“만약 KM 전자 상승세가 이대로 계속 간다면 당장 LC 전자 대형 TV 사업부가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 거기에 후속작인 중소형 모델이 시장에 출시되면 LC 전자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중소형도 개발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어느 정도 정보를 파악한 권재홍 비서실장은 넌지시 말했다.
“대형이 성공하면 중대형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당연한 것 아닐까요?”
콜린스의 뛰어난 모델에 대한 벤치마킹은 이미 LC 전자 내에서도 진행되었다. 평가 항목 하나하나가 기존 TV를 뛰어넘었다.
디지털 TV와 경쟁해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한병수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솔직히 권재홍 비서실장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