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두 사람이 같이 생활한다면 그 비용이 더 올라간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해서 대학 등록금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켈리도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굳이 급여가 좋은 직장을 구하는 이유다.
그런 그녀로서 뉴욕에 있는 미국 대기업의 잡 오퍼는 거절하기 힘든 일이다.
이 제안도 지도교수 도움을 얻어서 가까스로 얻은 것이었다.
켈리는 집에 가기가 무섭게 크레이그와 껴 안고 한동안 즐거워했다.
뜨거운 사랑도 했다.
크레이그 역시 자기 여자친구에게 생긴 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런데 문제는 켈리가 이 일을 하게 되면 뉴욕으로 떠나야 한다는 점이다.
크레이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직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 사이에 장거리 연애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크레이그 급여가 좋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했다.
직장 2년 차인 것도 있지만 NextOS 경영 상황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아니, 장래라도 밝으면 참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회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다.
이유는 워크스테이션 시장 상황도 관련이 있다. 이 사업 특성상 하드웨어와 이에 따른 솔루션을 같이 구매하기 때문이다.
NextOS는 이 시장을 장악한 HT, 선 시스템, 메가 그래픽스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켈리가 선택한 DALL은 NextOS보다는 더 안정적인 회사다. 2년 차 연봉만 해도 20만 달러 가까이 되었다.
크레이그 처지에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가 참으려고 해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켈리는 이런 자신의 속도 모르고 친구에게 자주 전화해서 환호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직장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만약 이 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켈리와 관계가 벼랑 끝으로 추락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까지 다른 회사 스카우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간 이유였다.
‘어쩌지?’
* * *
크레이그는 최민혁 실장 제안을 받은 이후에 회사 일에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만 그런 것은 또한 아니었다.
사장 스티브의 독선적인 성격 문제는 좀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가끔 터져 나왔다.
최근 벨린 투자 측에서 나온 사람의 제안을 받고 나서는 흉포했던 과거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2년 전에 이성을 잃고 미친놈처럼 설치는 스티븐 모습은 덜하지만, 문제는 NextOS 경영 성적이 좋지가 않다는 점이다.
사장 스티븐은 오히려 당면한 회사 문제보다 자신이 투자한 다른 회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애니메이션 쪽 회사에 집착해서 NextOS 경영은 내버려 뒀다.
NextOS에 일하는 임직원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중에 안 좋은 일은 계속 생겼다.
NextOS 개발을 주도한 동료가 하나둘씩 계속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크레이그도 만약 최민혁 실장 제안이 없었다면 이 상황을 무시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그 자신에 놓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
더욱이 켈리와의 갈등도 조금씩 일어났다.
켈리도 뒤늦게 뉴욕에서 직장을 얻게 되면 크레이그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자꾸 왜 그래? 내가 뉴욕에 가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워?”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러면 뭔데, 도대체 왜 자꾸 괜한 시비를 거는 거야?”
“미치겠네.”
“질투 나면 그렇다고 그래. 도대체 난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크레이그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켈리는 그런 크레이그 마음을 알아챘다.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쌓여갔다.
“남자가 도대체 왜 그래?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주말이면 볼 수가 있어. 그렇게 참을성이 없는 거야?”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도대체 왜 이래? NextOS에 대한 미래는 누구보다 더 확신을 했잖아.”
“그게 좀…….”
“NextOS에 안 좋은 소문이 있던데, 정말 그것 때문에 그래?”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
“아니, 그럴 수가 없잖아!”
켈리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대학 다닐 때는 현실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뉴욕커가 된다는 생각을 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아니면 크레이그가 남자답게 적극 나서서 해결책을 내놓으면, 그것을 믿고 따를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크레이그는 매사에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미적거렸다.
켈리는 그 모습이 너무 싫었다.
크레이그는 켈리의 과도한 비난에 쉽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도 울컥하자 결국 숨기고 있던 내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켈리, 나도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어. 벨린 투자가 설립한 벨린 소프트란 회사야. 연봉도 괜찮아.”
켈리도 ‘벨린 투자’란 말에 깜짝 놀랐다. 오늘도 학과 내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교수가 강의 중에 벨린 투자를 언급했다.
“응? 정말이야? 가만 벨린 투자라고? 설마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건물을 매입한 그 벨린 투자를 말하는 거야?”
감정이 상해서 한때 언급한 크레이그가 오히려 놀랐다.
“어? 알아?”
“당연히 모를 수가 없잖아.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빌딩을 매입한 회사인데,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 학과도 난리가 났어.”
“고작 그 정도 일로?”
“아니, 그 회사가 KM 전자로 무려 15억 달러가 넘는 이익을 본 회사야. 교수님도 이 회사의 투자 기법에 혀를 내둘렀을 정도니까.”
그랬다.
벨린 투자 성공 신화는 제법 알려지기는 했지만 광범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켈리의 지도교수가 작정하고 퍼뜨린 덕분에 스탠퍼드 내에서는 제법 알았다.
그런데 쉽게 묻히지 않는 이유는 KM 전자의 콜린스 초대박 신화다. 이 행보 과정은 딱히 과장하지 않아도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이 콜린스 수출이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 내에 찔끔찔끔 풀리면서 다들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크레이그는 예상을 벗어난 켈리의 반응에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혹시 켈리는 DALL과 벨린 투자 두 곳에서 잡 오퍼가 왔다면 어디를 선택할 거야?”
“그거야 벨린 투자잖아. 가능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회사야. 에이, 질문 같은 질문을 해야지. 그런데 이 벨린 투자 회사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 미국에도 지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예 사람을 뽑지 않으니까. 아, 소개로 뽑는다고 하던데, 지원자 수가 너무 많아.”
“그렇게 벨린 투자가 대단해?”
“아니, 대단하기보다는 성장세가 무시무시하잖아. 고작 1년도 채 안 되어서 15억 달러 초대박을 쳤는데, 그걸 무시할 수가 있어? 만약 스톡옵션으로 일부만 받아도 100만, 아니, 200만 달러는 넘을 거야.”
200만 달러 돈이면 솔직히 굳이 DALL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그 돈도 돈이지만 커리어 쌓기가 더 좋아. 현금이 그렇게 많고, 비전이 있는 회사가 실리콘 밸리에 왔잖아. 그렇다면 그 안에서 기회가 얼마나 많을까.”
켈리도 크레이그와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었다. 안정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한 도전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실리콘 밸리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꾸는 꿈을 토하는 켈리는 당장에 지금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떨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크레이그는 전혀 예상과는 다른 켈리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고 말았다. 그는 새삼 조용히 자신에게 말하던 최민혁 실장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정말 무시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하긴 그 어린 나이에 IFA 강연을 했고,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도 지키고 있어. 실리콘 밸리에 대한 투자는 그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아닐까?’
문득 최민혁 기획실장과 스티븐 사장을 비교해 보았다.
스티븐 사장은 한때는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퇴출당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도약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에 비해서 최민혁 기획실장은 막대한 자금과 비전을 가지고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그렇게 본다면 스티븐 사장보다 최민혁 실장이 오히려 가능성이 높았다.
고민과 번민을 거듭한 크레이그는 결국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한동안 피웠다. 그의 심사는 넝마처럼 복잡하기만 했다.
만약 켈리가 DALL의 뉴욕 지사로 간다면 두 사람 사이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아니,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 관계는 끝이 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켈리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크레이그는 이제 최민혁 실장 제안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 * *
크레이그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뉴욕으로 간 켈리와 무섭게 갈등하고, 싸우는 꿈이었다. 악몽은 그의 피를 말렸다.
그는 악몽에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옆에 조용히 자는 켈리 모습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온몸에 흐르는 식은땀은 그 자신의 미래에 얼마나 절망한 것인지 잘 보여주었다.
크레이그가 깨어나면서 움직인 것 때문에 의아한 눈으로 깨어난 켈리는 눈을 비비면서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목을 돌리는 크레이그를 발견했다.
“왜 그래?”
“아, 아냐.”
크레이그는 바로 일어나서는 베란다로 나가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제법 오래갔다.
알고 보니 새벽 3시였다.
아차 싶어서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막 잠에서 깬 최민혁도 짜증 냈다.
[누구세요?]
[저 크레이그입니다.]
[크레이그가 누구? 아니, 새벽 3시에 전화를 거는 인간이 어디……. 아, 크레이그 씨?]
[죄송합니다. 새벽에 이렇게 전화를 걸어서요.]
최민혁도 잠에서 막 깨서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괜찮습니다. 말해보세요. 설마 아무런 일도 없이 전화를 건 것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그 스카우트 제의 아직도 유효한 것 맞습니까?]
[물론이죠.]
[연봉은 25만 달러, 렌트비 무쌍의 집도 공급하는 것 맞습니까?]
[당연하죠. 스톡옵션도 배당될 겁니다.]
[벨린 투자에 아는 지인 추천도 가능하다고 하셨죠?]
[뭐, 어지간히 미달이 아닌 경우라면 가능합니다.]
[스탠포드 졸업생이라면 어떻습니까?]
[그 정도라면 무조건 합격이죠. 대우는 최고로 해줄 겁니다.]
[혹시라도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아니면 포기하는 그런 사업은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이미 프로토타입도 완성되었고, 수정을 가하는 겁니다. 이 프로젝트는 물러나고 말고가 아닙니다.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실장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최민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스티븐 사장도 그렇지만 그 밑에 있는 실력자는 스카우트하기가 쉽지 않았다. 크레이그 역시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다면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됐다. 한고비 넘겼어.’
[아, 좋네요. 혹시 다른 동료도 가능할까 싶네요.]
최민혁이 넌지시 두 사람 이름을 댔다.
크레이그가 아는 이름이었다. 그들 역시 스카우트 제안에 꽤 고민하는 이들이다. 다만 사장 스티븐 때문에 여전히 고민하는 이들이었다.
[장담은 못합니다. 하지만 한번 제안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필요합니까?]
[당연하죠. 새로운 OS를 만드는데, 개발 환경, 애플리케이션 개발자가 다 필요하죠. 다만 맨땅에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리눅스 커널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으니까.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Darwin으로 포팅만 하면 될 겁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NextOS 개발을 통해서 어설픈 프로젝트에 대한 환상을 깬 크레이그는 불안한 벤처 기업 생활을 원치 않았다.
[이제 막 선행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이 된 것을 하는 겁니까?]
[물론이죠. 이미 제품 자체는 확정된 겁니다. 딱 이거 하나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크레이그는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이 꽤 매력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최민혁 실장에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