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47화 (347/1,021)

#347.

그는 피식 웃었다. 몇 년이 지난 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크레이그 스카우트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만만한 사람은 아닐 거야. NextOS 이후에도 모바일 OS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니까. 다행이라면 스티븐이 아직 이 친구의 잠재력을 확신하지는 않다는 점이야.’

* * *

최민혁이 크레이그 행크스를 만난 장소는 NextOS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티에 위치한 한 커피숍이었다.

레드우드 시티와는 제법 떨어져 있는 터라 크레이그도 크게 부담을 가지지 않았다. 이제 26살로 뭔가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그럴 듯 2년 차에 가장 갈등을 많이 한다. 3년 차에 접어들면 이 직장에 있어야 하나 고민한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스카우트 제의를 이미 상당히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제안을 다 거절한 것은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 자리와 비교해서 확연하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미국의 대기업이라고 해도 지금 그 자리로 옮기면 밑에서 시다바리 일만 해야 한다.

크레이그 행크스 얼굴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다.

최민혁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면서 조용히 웃고 말았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알 수가 없는 내용도 워낙에 인생 1회차에서 쓴맛을 자주 본 덕분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 우 부장이 얼마나 잘하나 볼까?’

우영민 부장이 나서서 간단한 소개와 더블어서 KM 전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벨린 투자는 이번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매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투자를 진행할 겁니다. KM 전자 최민혁 기획실장님이 지금 기획한 차세대 제품 개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이번 소개는 애매한 부분은 없었다.

이보다는 KM 전자와 벨린 투자가 실제로 진행한 일을 근거로 해서 설명했다.

설명도 간결했다.

실제로 한국 대학생은 이런 설명이 없어도 KM 전자에 열광했다.

특히 벨린 투자는 들어가도 싶어도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런저런 높은 고위 인사를 통해서 인사 청탁도 무지 들어온다.

그런 믿음을 토대로 한 말이다. 어떤 이가 들어도 귀를 쫑긋할 것이다.

하지만 NextOS 일상에 절어 있는 크레이그는 우영민 부장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아니, 한 귀로 들어가도 한 귀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의 표정에는 괜히 이 자리에 나온 것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딱히 KM 전자나 벨린 투자를 얕잡아 봐서는 아니라 현실과 이상은 다른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장 잘나가는 실리콘 밸리 기업도 엔지니어 사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잘만 줄을 잡으면 스톡옵션을 받아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운이 좋아야 했다.

실제로 NextOS를 선택한 것도 그런 점을 감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경험한 NextOS 분위기는 이상적인 상황과는 달랐다.

사장 스티븐이 워낙에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를 믿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드웨어 사업부를 정리하면서 많은 이들이 회사를 떠났다.

그렇게 떠난 부사장급 임원 숫자는 2년 전에 무려 7명이나 되었다. 그 이후로 스티븐 사장 성격도 제법 변하기는 했지만 NextOS 이사회 분위기는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사회생활 2년 차인 크레이그가 쉽게 견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NextOS에 입사하면서 가진 꿈을 쉽게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우영민 부장 이야기는 나름 그럴듯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내적 갈등을 깰 정도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벌떡 일어난 크레이그는 걸음을 옮겼다.

다급한 우영민 부장은 크레이그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자, 잠깐만요. 크레이그 씨, 잠깐 이야기를 더 들어보세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귀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팔로알토 네트웍스 사에 다니는 지인 통해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대단한 회사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면 좀 더 이야기를…….”

“전 꼭 귀사가 아니라도 이직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왜 이 자리에…….”

크레이그는 다시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 자리에 나온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다만 그도 사과하면서 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면서 팔짱을 낀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기획실장이라는 직위가 그제야 떠올랐다.

‘아, 콜린스를 개발한 회사였지. 가만 최민혁 실장이라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우영민 부장보다 최민혁에게 더 시선이 갔다. 자신이 떠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오히려 호기심을 느꼈다.

고개를 갸웃한 크레이그는 의아한 눈으로 최민혁을 다시 살폈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크레이그는 어렵지 않게 한 기억을 떠올렸다.

“아, 혹시 IFA 기조연설을 했던 최민혁 실장님?”

최민혁은 방긋 웃으면서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맞습니다.”

“맙소사 설마 최민혁 실장님이라니.”

크레이그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IT 분야 종사자답게 IFA 기조연설에 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당시 소니 오다 히로 부사장을 대리해서 나온 최민혁 실장은 그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그제야 우영민 부장이 장황하게 자신에게 늘어놓은 제안을 떠올렸다.

결코 가벼운 제안이 아니었다. 그 제안이 최민혁 실장과 관련이 있으니까. 아니 고작 2년 차인 자신을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최민혁 실장이 이 자리에 온 것이 신기했다.

“제가 알기로 최민혁 실장님은 KM 전자에 있는 분으로 압니다만…….”

“크레이그 씨같은 인재를 잡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뿐입니다. 잠깐만 앉아보세요. 꼭 스카우트 제안이 아니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뻘쭘한 크레이그는 그제야 우영민 부장 눈치를 보면서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 한쪽에 걸쳤다. 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우영민 부장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면 더 이야기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누구보다 이런 텃새를 자주 경험했기에 피식 웃었다. 자신의 행보를 간혹 드러낸 것도 이런 일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효과는 제법이 있었다.

그리고 삼고초려라고 하지 않은가.

최민혁은 굳이 탁월한 인재를 확보하는 자리에 자존심 따위는 내세우지 않았다.

“사실 이 자리에서 자세한 말을 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 회사가 차세대 제품으로 밀고 있는 사업이 있는데, 전문 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 NextOS 개발자입니다. 제가 알기로 우리 회사에서 다른 제품에 적용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 워크스테이션 쪽은 아니에요. PC 쪽도 관심이 없고요. 모바일 쪽입니다.”

“핸드폰 말입니까? 하지만 핸드폰 CPU로는 아예 적용하기도 힘들 텐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기 곤란하네요. 정확히는 특허 문제도 있고 하니 그쪽은 당장 손을 댈 생각이 없습니다. 아예 다른 프로젝트니까요.”

“이상하군요. 제가 주로 하는 일은 Darwin 쪽입니다. 그건 그쪽에 적용될 리가 없을 텐데요?”

“마침 Darwin을 이용하는 거죠. 이리저리 알아보니, 이쪽 분야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마침 크레이그 씨가 이쪽 분야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크레이그도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는 버클리 대학을 다닐 때도 유명했다. 그런 이력을 인정받아서 NextOS에 들어온 것이다.

“XNU 커널을 이용하려는 겁니까?”

“네.”

“흠.”

크레이그도 그제야 이번 스카우트 의미를 이해했다. 다만 왜 굳이 최민혁 실장이 이 자리에 나왔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정중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일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당장은 이직할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최민혁은 단호한 크레이그의 거절에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면 바로 연락 주세요. 대우는 최상일 겁니다. 스톡옵션을 포함해서 무상 렌트인 집까지 제공할 테니까. 필요하다면 아는 지인 한 사람 정도에게 벨린 투자에 괜찮은 자리를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레이그는 달콤한 유혹에도 바로 거절했다.

최민혁은 단호하게 돌아서는 크레이그 모습을 보면서 아쉬워하기는 보다는 오히려 입맛을 다셨다. 그는 왜 크레이그가 끝까지 스티븐을 따라서 이직했는지, 후일 모바일 OS의 양대축 하나를 개발한 최고 책임자가 되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영민 부장은 이번 일도 실패하자 최민혁 눈치만 봤다.

“이번 일도 이렇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니까.”

“네?”

“떡밥은 충분해요. 본인은 아직 그걸 모를 뿐이죠. 시간이 지나면 좀 달라질 겁니다. 우 부장님이 할 일은 계속 자극하는 겁니다.”

“하지만 태도가 저런데, 그게 되겠습니까?”

최민혁은 크레이그 프로필에서 그의 여자 친구 켈리 사진을 손가락으로 쿡쿡 찍었다.

“켈리, 이 친구를 이용하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두 사람이 지금 동거하는 거로 나오죠. 그런데 켈리는 최근 뉴욕 쪽의 한 대기업에서 취업 오퍼를 받은 것으로 나옵니다. 아마 켈리가 이 제안을 받으면 뉴욕을 떠나야 할 겁니다.”

“설마 크레이그가 이걸 싫어할 거란 말입니까?”

“글쎄요. 장거리 연애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마 크레이그도 겉으로는 그 일을 환영해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켈리가 벨린 투자에 들어오려고 할까요?”

“우 부장님은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아, 그게 좀…….”

우영민 부장도 문득 벨린 투자의 가치를 떠올리고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미국 대기업이 얼마나 잘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조 단위의 현금을 굴리는 벨린 투자도 만만한 회사는 아니었다.

더욱이 스탠포드 경영학을 졸업한 켈리 처지에서는 안정적인 미국 대기업보다는 이미 성장세가 계속되는 벨린 투자가 꽤 매력적인 회사였다.

최민혁은 방긋 웃었다.

“자,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알겠죠? 중요한 것은 우연히 일을 잘 진행하는 겁니다. 우연히 일자리 정보도 얻도록 말이죠. 그런데 남자친구가 우연히 관련 회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겁니다. 개연성이 없는 우연한 전개지만 인생은 어차피 개연성 따위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 * *

우영민 부장은 즉시 우연한 소개를 가장해서 스탠포드 대학 총장을 만나서 200만 달러 기부를 제안했다. 그는 이 대가로 켈리가 속한 경영학과 지도교수를 우연히 만나 투자를 약속했다.

그가 지도교수에게 원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바로 벨린 투자 성공 스토리를 통한 회사 홍보였다.

지도교수 처지에서는 딱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벨린 투자와 KM 전자 성공 스토리가 제법 미국에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벨린 투자가 15억 달러 이상의 투자 수익을 낸 것은 일약 주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KM 전자의 콜린스 신화는 켈리 지도교수조차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교수님, 잘 부탁합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 일은 도와줘야죠. 다만 벨린 투자 쪽에서 사람을 뽑지 않습니까?”

“뽑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천을 받아서 소수로 뽑습니다.”

“호, 그래요? 그렇다면 이번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매입은 미국 투자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입니까?”

“비슷합니다.”

우영민 부장은 딱히 당장은 새로운 사람을 뽑은 생각이 없었다. 다만 굳이 이번 일을 위해서는 기름칠을 할 필요가 있었다.

켈리 지도교수도 그런 점은 순순히 인정했다.

“제가 이번에 벨린 투자 홍보를 적극 할 테니, 저만 믿으세요.”

“알겠습니다.”

우영민 부장도 자신이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미국 기업에 대한 투자와는 달리 대학은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벨린 투자 유명세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겠지.’

* * *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정작 미국인 중산층의 삶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과도한 공과금도 문제지만 한 달에 2,000달러가 넘는 집 대여비도 살인적이다.

거기에 이런저런 비용을 다 합치면 한 달에 들어가는 비용만 무려 4,000달러가 훌쩍 넘어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