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면서 한동안 침묵했다. 최문경 부회장의 자극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지만 실상 최민혁에 대한 질투심이 컸다.
그리고 늘 나오는 최용욱 회장의 최민혁 배후설 이야기 때문이다.
벨린 투자가 그렇게 급속하게 덩치를 키워갈 수 있는 것도 다 최용욱 회장이 손을 쓴 것이라는 음모론이 꽤 많이 돌았다.
국세청, 금감원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한동안 최민혁 기획실장에 대한 내사도 있었다. 최민혁이 밝힌 자료가 아니라도 국세청은 이미 최민혁 실장의 자금 흐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민혁에 대한 국세청, 검찰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최민혁이 한 투자의 결과를 안 정부 공무원도 경악했다.
그들은 투자의 신이라고 해도 최민혁처럼 결과를 도출하기 힘들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김이경은 아는 라인을 통해서 이미 이 정보를 들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아버지 최용욱을 향해서 압박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혹시라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최민혁 배후에 최용욱 회장의 비자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니 최용욱 회장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여전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면 아버님은 짐작하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나도 몰라.”
결국 골프 복장을 한 최씨 일가는 다들 장승일 실장이 내놓은 보고서를 돌려 보면서 침묵했다.
그 광경이 얼마나 특이한지 골프장을 오가는 이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골프 치러 와서 보고서를 살피는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보고서를 확인한 최문경 부회장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골프장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가족은 최용욱 회장에게 뒤늦게 사과한 후에 도망치듯이 골프장에서 사라졌다.
실로 초라한 모습. 탐욕에 완전히 자신이 먹혀서 감히 최용욱 회장을 상대로 압박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도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안쓰러운 장남 최문경 부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손자 최민혁을 도와주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이 최씨 일가가 내팽개친 보고서를 모아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사전에 보고해야 했는데…….”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이미 최민혁 상황을 다 알았다.
“자네라도 뾰쪽한 수가 없잖아. 이미 벨린 투자 통해서 사전 정리 작업을 다 한 후에 미국에 가자마자 바로 건물 매입 서명을 했으니.”
“그래도 알려면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마. 민혁, 그놈도 제정신은 아니니까.”
최용욱 회장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2억 달러를 문구점에서 닭꼬치 사 먹듯이 쓴 손자 최민혁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장남 최문경 부회장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저놈을 도와주기는 해야겠는데, 그것도 고민이야.’
* * *
최민혁은 빠르게 실리콘 밸리에서 자리 잡으면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고민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한국에서 갑자기 걸려온 최용욱 회장의 전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간단한 안부와 더불어서 최용욱 회장이 전화를 건 이유가 있었다.
[섭섭하구나. 손자 이야기를 내가 기사보고 알아야 한다니. 이쪽저쪽에서 전화가 오는데, 내가 다 민망하더구나.]
[큰일이 아닙니다. 저도 남들처럼 부동산 투자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2억 달러가 넘는 투자가 남들이 하는 평범한 부동산 투자라고?]
[뭐, 돈에 대해서는 생각 못했습니다. 당장 그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최민혁은 나름 실리콘 밸리 투자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반복했다.
[정확히는 부동산 투자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는 않았다.
[안다. 나도 부동산 투자는 반대 안 해. 하지만 국내도 얼마든지 부동산 투자가 가능하잖아. 굳이 태평양 건너 남의 땅에 투자할 필요가 있느냐?]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일방적인 부동산 투자론 주장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감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최민혁이 내심을 털어놓는다고 생각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앞으로는 국내 부동산 시장이 안 좋을 거라는 소리냐?]
최민혁은 자신의 말을 또 임의대로 해석하는 최용욱 회장 태도에 혀를 찼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할아버지가 판단하셔야죠.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하기 싫습니다.]
[KM 그룹 보고서를 말하는 거냐?]
[더 말하기 싫습니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면 전화는 끊겠습니다.]
최민혁은 더 전화하기 싫었지만, 최용욱 회장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있다. 내가 알기로 실리콘 밸리 땅값이 많이 오른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거냐?]
[…….]
최민혁은 잠깐 멈칫했다. 사실 적당히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투자’란 말에 생각을 바꾸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설마 할아버지도 여기 실리콘 밸리에 투자할 생각입니까?]
[원래는 생각 없었다. 하지만 투자의 신이란 손자 녀석의 투자를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
최민혁은 생각도 못 한 최용욱 회장의 제안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돈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그래서 떡밥(?)을 던졌다.
[제가 할아버지 일에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 부동산 투자는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그렇단 말이지. 대답해 줘서 고맙구나. 한국에는 언제 올 거냐?]
[여기 일이 끝나면 바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 한국에 오면 이 할아비에게 먼저 오너라. 할 말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서야 한동안 최용욱 회장이 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왠지 할아버지가 비자금을 이용하지 않을까 싶었다.
‘첫째 큰아버지 때문일까? 뭐 차라리 잘되었지. 일단 비자금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 * *
최민혁은 자신이 원한대로 일단 최용욱 회장이 움직인 것을 확인하자 미국에 와서 염두에 둔 일을 바로 진행했다.
그 시작은 벨린 투자 이름으로 NextOS사에 투자하는 것이다.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건물 매입에 성공한 우영민 부장은 이번 일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당당한 자세로 NextOS사를 방문해서 투자 상담을 진행하려고 했다가 사장 스티븐에게 쌍욕만 먹고 쫓겨나고 말았다.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2~3차례나 시도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NextOS 사장 스티븐은 마치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우영민 부장을 쫓아냈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한 상황 전개였다.
우영민 부장은 뒤늦게야 최민혁을 찾아가서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설마 스티븐 사장이 그렇게 미친놈인 줄은 몰랐습니다.”
스티븐 사장이 그렇게 미친놈처럼 군것은 사정이 있었다.
쉽게 말해서 NextOS 사정이 좋지가 않았다.
2년 전에 하드웨어 사업부를 도려내면서 심각한 내부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른 임직원에게 퍼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NextOS 사정은 해가 갈수록 더 나빠졌다.
흉흉한 소문 때문에 회사를 떠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더 황당한 사실은 그런 스티븐을 노려서 돈을 보따리에 사 들고 투자하려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과거 스티븐의 성공을 그만큼 믿는 이들이다. 그들은 스티븐에게 제대로 된 환경만 주어진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우영민 부장이 달랑 돈만 믿고 스티븐 사장을 상대로 염장질했으니, 스티븐 사장이 그렇게 광분한 것이다.
‘사실 지금의 스티븐과 손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최민혁은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우 부장에게 위기감을 느껴서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네?”
“NextOS 경영 성과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당장 2년 전에 하드웨어 부분을 청산하면서 내부 갈등을 심하게 경험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장 NextOS가 자랑하는 당시 제품은 모니터만 해도 기존 고급 제품의 두 배가 넘었고, 디스플레이 주파수는 무려 68Hz나 됩니다. 흑백 화면이 마치 정지 화면처럼 보여서 당시 소비자의 높은 관심을 받았죠. 캐논은 무려 1억 달러 투자까지 하면서 아시아 판매를 담당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물론이죠. 심지어 이 제품에 사용된 NextOS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이 하드웨어 사업을 다 매각한 후에 NextOS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사장 스티븐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차에 KM 전자와 관련이 있는 벨린 투자에서 갑자기 투자하겠다고 찾아왔으니, 좋게 봤을 리가 없다.
아니, 적대감을 가졌을 것이다.
“…….”
우영민 부장은 최민혁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고 난 후에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최민혁 실장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그는 새삼 최민혁의 또 다른 통찰력을 느끼자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최민혁이 저런 사실을 어떻게 아는 지 의아했다.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나올 대답은 뻔해서 차마 묻지 못했다.
‘이번에는 KM 전자 기획실이 사전에 조사한 거라고 하겠지?’
그런데 기획실이 저렇게 세세한 정보를 알 것이냐는 좀 다른 문제다.
저건 마치 스티븐 사장과 NextOS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 나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런가 싶다. 어차피 미국에 오기 전에도 별 생각이 없었잖아.’
결국 최민혁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NextOS를 철저하게 조사를 한 후에 작업을 해야 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건 맞아요. 팔로알토 네트웍스만 해도 판 것은 고작 건물이죠. 정작 핵심이 되는 기술이나 인력과는 무관했죠. 더욱이 이번에는 회사 구조조정을 해야 한 위기 상황에서 당장 돈이 필요하니, 좋은 대접을 한 것뿐입니다. 아마 우리를 완전히 믿지는 않을 겁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 사람들 보기와는 달라요. 인종 차별까지는 아니지만, 동양인과 일정한 선을 그을 겁니다. 그런 점은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콜린스를 예로 들었다.
“만약 우 부장님이 스티븐 사장에게서 콜린스 사업부를 넘기라는 제안을 받으면, 웃겠습니까? 아니면 몽둥이를 들고 휘두를 겁니까?”
“그거야…….”
“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스티븐이 꼭 돈만 생각했다면 지금이라도 줄 서 있는 투자자는 많아요. 그러니 상대를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우영민 부장은 왠지 최민혁 실장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막상 자신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미국 내의 더 나은 투자자가 있다면 말이다.
“실장님, 혹시 그 투자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까요?”
“로스 페리 정도면 이름은 들어봤겠죠?”
우영민 부장도 곰곰이 한 이름을 떠올리고는 깜짝 놀랐다.
“로스 페리라면, 설마 지난 미국 대선 후보 로스 페리를 말하는 겁니까?!”
“네.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사실 최민혁은 이미 이 일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라서 한번 찔러나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내심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슬쩍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제가 조사하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님 소개로 받은 스카우트 통해서 일단 필요한 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좋네요.”
최민혁은 세 사람 중에 이번 일에 키맨 역할을 하는 크레이그 행크스 이력을 살폈다. 후일 그 유명한 모바일 OS를 개발하는 이였다.
흥미로운 것은 조사한 자료에는 크레이그 개인 행적에 대한 것도 있었다.
‘역시 지금은 한창 고민할 때지.’
하지만 그는 크레이그 행크스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스티븐 사장을 따라서 이직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일단 크레이그 이 친구부터 시작하죠.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될 겁니다. 비록 직장 생활 2년 차지만 쉽게 스카우트 제안을 받지 않을 겁니다.”
우영민 부장도 스티븐에게 호되게 당해서인지 이전처럼 튀지 않았다.
“이번에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두고 보면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