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43화 (343/1,021)

#343.

오상현 과장은 최민혁 실장의 진심을 알자 더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요, 저도 오성 전자에 있을 때부터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제 실력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 혼자 능력으로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인력이나 개발 환경 문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네요. 그러면 이현탁 과장에게도 말해서 이번 미국행을 준비하라고 하세요. 아직 준비 단계라서 자세한 내용은 말하기는 좀 그래요. 확정되면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준비도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오상현 과장은 실장실을 나서면서도 최민혁이 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도 Darwin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석사 시절부터 혼자 뭔가 하기에는 리눅스가 편해서 리눅스를 선택한 것뿐이었다.

‘뭐, 나랑 뜻이 맞는 친구도 별로 없었고, 하지만 미국이라면 상황이 달라.’

그러다가 뒤늦게야 이 일이 강준석 기획안에 나와 있던 흐름을 따라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강준석이란 친구를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겠어.’

* * *

강준석은 신입 사원 교육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최민혁 기획실장과 최문경 부회장을 만난 것이 꿈만 같았다.

다만, 한편으로 긴장했다.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를 잘 보면 최민혁 실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뒤늦게야 최근 기사를 보던 중에 두 사람이 경영권 때문에 대립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준석은 최민혁 실장에게 사실을 알린 것을 안도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 밑에 있으니, 최문경 부회장과는 거리를 뒀던 것이다.

그리고 신입 사원 교육 마지막 날에 기획안 덕분에 대리로 진급했다.

마지막 날 행사에 모인 320명의 KM 전자 신입 직원은 자신이 보면서도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최민혁 기획실장이 한 말이니, 지켜질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정말 신입 사원 성과만으로 대리로 진급할지는 몰랐다.

최민혁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한 가지 사실을 밝혔다.

[앞으로 우리 회사는 자신의 역량과 성과에 따라서 그만한 보상을 받을 겁니다. 단순히 대리 진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톡옵션도 따로 받습니다. 필요하다면 회사에서 독립까지 시켜줄 겁니다.]

강준석은 입사와 동시에 대리 진급한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치고, 정식 출근 날짜만 기다리는 중에 미국행과 관련해서 준비하라는 연락을 인사 팀에서 받았다.

[네? 미국요?]

[강준석 씨 출근 날짜가 미국으로 가는 날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철저하게 따로 준비하기 바랍니다.]

[아니, 이제 갓 회사에 출근하는 제가 무슨 일로 미국에 가야 합니까?]

[그거야 우리 인사 팀에서도 모르죠. 전 기획 팀에서 지시를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정 궁금한 점이 있으면 기획 팀에 문의해 보세요.]

강준석은 기획 팀에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조성돈 팀장이었다.

[자네 기획안 때문에 미국행이 결정되었어.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게. 정성근 대리가 자네를 도와줄 것이니, 필요하면 물어보고.]

[…알겠습니다.]

* * *

강준석은 미국에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것이라서 미국에 가본 적이 있는 동기, 선후배에게 연락해서 확인했다.

다행히 회사를 끼고 가는 미국행이라서 준비하는 서류 때문에 이것저것 번거로운 일은 있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정말 뜬금없네.’

그건 LC 전자에 합격해서 한창 자기 자랑에 바쁜 박진한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강준석을 열심히 찾아다니다가 대학 본관에서 필요한 증명서를 챙기는 강준석을 발견했다.

“형, 진짜 미국 가요? 아니, 이제 갓 신입 사원 교육을 받은 형이 무슨 미국으로 가요. 거짓말이죠?”

“흠.”

그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박진한의 말을 그냥 씹어버렸다.

하지만 박진한은 바퀴벌레처럼 집요하게 강준석 뒤를 따라붙었다.

강의 때문에 대학을 오가던 이들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만 그들도 칭얼거리는 박진한 이야기를 듣자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신입 사원 교육이 끝났는데, 회사 출근이 아니라 미국으로 간다니?”

“…별일 아냐.”

강준석은 따가운 시선에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우르르 강준석의 뒤를 따랐다.

질투에 불타오른 박진한은 오히려 소리를 놓였다.

“거짓말이죠? KM 전자에 들어갔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아니, 신입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미국 출장을 가요?!”

그도 어지간하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오가던 지인 10명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마냥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박진한이라면 분명히 이 사실을 과장해서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것이 분명했다.

“…사실 회사에서 인정을 좀 받았다. 그래서 이번 미국행에 나도 낀 것 같아.”

“형,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니, 신입이 뭘 안다고 미국행을 갑니까?”

박진한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KM 전자가 한국 대기업에 못 미친다고 해도 이미 중견기업 수준은 가볍게 뛰어넘었다.

강준석은 씩 웃더니, 결국 KM 전자 인사 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휴대폰 소리를 최대한 크게 해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지인 몇 사람은 호기심 때문에 귀를 휴대폰 가까이 댔다.

[이번 신입 사원인 강준석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 명함은 ‘대리’ 직급으로 나오는지 확인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으음, 명함은 대리 직급으로 이상 없이 나올 겁니다.]

[아, 그리고 이번 미국행과 관련해서 제출할 더 필요한 서류가 있습니까?]

[아니, 더는 상관없습니다.]

[혹시 비행기 표나 숙박비는 회사에서 다 지급하는 거죠?]

[물론입니다. 강준석 씨는 시간에 늦지 않도록 인천 공항에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핸드폰 소리가 작아서 비록 몇 사람만 들었지만 들은 이들은 입을 딱 벌린 채 경악해서 강준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특히 큰 충격을 받은 이는 바로 박진한이었다. 그가 아는 신입 사원은 회사에 들어가서 시작은 잡일만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강준석은 충격에 이성을 잃은 이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박진한을 쳐다보았다.

“야, 박진한, 이 정도면 설명이 충분해? 필요하면 내가 우리 회사 본사로 데려가서 보여줄까?”

“아, 아니에요. 하, 하지만 말도 안 돼요. 아니 신입 사원 교육과 동시에 대리로 진급하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운이 좋았어.”

강준석은 이제는 부러움에 가득한 시선을 받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막상 큰소리는 빵빵 쳤지만, 자신이 과연 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쓴 기획안은 현실성이 많이 떨어져. 그걸 어떻게 밀어붙인다는 것일까?’

* * *

강준석이 고민하는 동안에 다른 이들 역시 번민에 휩싸였다.

이현탁 과장과 오상현 과장 두 사람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특히 오상현 과장은 최민혁 실장에게서 이식성과 관련해서 과연 지금의 MP3 OS가 최선일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렇습니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최민혁 이야기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현탁 과장 역시 돌아가는 영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그는 시니컬한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큰 의미가 없었다.

두 사람은 미국행 준비를 하면서도 돌아가는 상황이 불안했다.

한편으로 기대도 했지만, 지금과는 상황이 바뀐다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최병연 팀장이 그런 두 사람을 위로해 주었다.

“최 실장님이 한 지시는 아무래도 MP3 OS를 단순히 MP3로 끝내는 것 아니라 차세대 모델을 고려해서 하라는 것 같아. 그러니 두 사람도 좀 더 긴 안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아.”

“알겠습니다.”

대답은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말처럼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최병연 팀장도 이제는 관리자에 오른 터라 현실적인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사실 최민혁 실장에게 이 문제를 따져야 할 직급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도 정말 바빠. 콜린스 소형화 문제도 있지만, MP3 관련 프로젝트도 일일이 검토를 해야 해. 두 사람도 잘 알잖아?”

게임 외주와 같은 프로젝트를 비롯한 곁가지로 진행되는 일은 꽤 있었다. 그중에는 반도체 설계와 같은 것도 있다.

* * *

최병연 팀장의 태도 때문에 KM 전자 중앙 연구소는 이런저런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또 있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아서 미국으로 간 전 재무 팀장 박경진이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 벨린 투자로 자리를 옮겼고, 벨린 투자 미국 법인 지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벨린 투자는 최병문이 사장일 때는 한창 잘나갔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최병문 사후부터 몰락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최용욱 회장이 최병문이 죽고 나자 벨린 투자를 대폭 축소했고, 비자금도 여러 경로를 거쳐서 다 정리해 버렸다.

그래도 벨린 투자가 여전히 살아남은 것은 이 회사를 설계한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박경진 부장은 벨린 투자 몰락 후에 열악한 벨린 투자 뉴욕 지부에 와서야 현실을 알았다. 지사 위치가 뉴욕에서 가까운 카운티에 있는 까닭에 미국 투자 법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었다.

카운티 근처의 고등학교는 나름 명문 축에 들어갔다.

그는 미국에 적응하기가 무섭게 처자식을 미국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미국 고등학교에 보낸 것이다.

그의 아내도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반겼다.

벨린 투자가 열악하기는 해도 월급은 따박 잘 나왔던 것이다.

박경진 부장도 고작 3명뿐인 뉴욕 벨린 투자 지사에 적응하면서 미국 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그는 딱히 최민혁 실장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감방에 가지 않고, 이렇게 미국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그가 우영민 부장에게 연락을 받은 것은 다른 것보다 너무 지루한 이 생활에 한창 젖어 있을 때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상이 없도록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을 받은 것이다.

박경진 부장은 아내에게 캘리포니아 출장을 말하자 축하도 받았다. 그녀도 남편이 마치 공무원처럼 축 늘어진 생활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아내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출장 갔다.

우영민 부장에게 지시를 받아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최고급 리무진 차량 두 대를 빌리는 것이었다.

박경진 부장은 렌트한 차량 두 대를 끌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몇 달 만에 보는 최민혁 기획실장을 볼 수 있었다.

“실장님!”

박경진 부장은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서 최민혁 실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동행한 이들은 갑작스러운 환대에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는데, 조성돈 팀장이었다.

“어, 박경진 부장님?”

“아, 조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설마 벨린 투자 지사에서 일하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뉴욕 지사에 있었습니다.”

“고생 많으셨겠네요.”

“뭐,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한국 지사 지시를 받아서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정말 지루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조성돈 팀장은 혀를 내두른 채 과거와 비교하면 한결 밝아진 박경진 부장을 살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손을 써서 두 번째 인생에서는 절로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최민혁 실장 일행의 물건을 차량 트렁크에 넣으면서 박경진 부장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지루하기만 한 지금까지 생활보다는 지금이 차라리 나았다.

최민혁은 아주 잘 적응한 박경진 부장의 모습에 혀를 찼다.

“미국 생활은 어때요?”

“최고입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는 제법 많이 바뀐 것 같네. 한국에 있을 때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매사에 적극성을 보이다니.’

최민혁은 자신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에 꽤 만족했다.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박경진 부장의 행동에 일행은 다들 색다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성근 대리가 간단하게 전에 KM 전자에서 재무 팀장을 했다고 알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KM 전자에 있던 이가 벨린 투자로 옮겨간 것이 신기해서 박경진 부장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최민혁 나름대로 박경진 부장 모습에서 벨린 투자의 뒷이야기를 떠올렸다. 벨린 투자를 설립한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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