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어지간한 일에는 최민혁을 두둔하는 최병연 팀장조차 슬쩍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 의도를 이해한 터라 입을 다물까 했다. 그런데 자칫하면 괜한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다.
그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신입 사원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최 실장님은 신입 사원 얼굴을 내세워서 일을 밀어붙이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는 다행히 최민혁 실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쉽게 말해서 최 실장님이 하려던 일입니다. 그게 신입 사원이 내놓은 기획안과 비슷한 방향이라서 밀어붙인다고 보면 될 겁니다.”
“가만 이 기획안을 다시 수정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우선 이 기획안은 누가 만든 겁니까?”
“그건 신입 사원이 만든 겁니다. 다만 최 실장님이 이제까지 늘 하던 이야기를 절묘하게 조합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게 딱 최 실장님 입맛에 맞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말은 최 실장님이 얼마든지 이 기획안을 수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죠. 그러니 너무 신입 사원이 내놓은 아이디어란 부분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기획안을 그냥 기획안대로 보고 작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흠.”
두 사람은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두 사람은 흥미로운 눈으로 기획안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최민혁 때마침 회의실에 도착해서 회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는 다소 자기 눈치를 보는 분위기를 읽자 피식 웃었다. 더욱이 시선을 피하는 조성돈 팀장을 보자 결국 숨겨둔 의도를 일부 털어놓았다.
“이번 일은 꼭 신입 사원이 내놓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병연 팀장이 최구만 과장이 이상한 소리할까 봐 먼저 나섰다.
“애초에 이 기획안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습니까?”
“이 기획안대로 진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정이 필요해요. 하지만 가는 방향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꼭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최민혁은 팔짱을 낀 채 잠깐 머뭇거렸다. 그도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강준석을 보고 떠올렸으니까.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이유도 있었다.
“요즘 KM 전자가 주식 초대박 때문에 말 나오는 것은 아시죠? 비록 검찰이나 증권감독원이 한 걸음 물러났지만, 이전과는 사뭇 달라요. 그들이 주시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대기업도 다르지 않다는 걸 뜻합니다.”
“…실장님의 행보를 철저하게 감시한다는 말씀이군요.”
최병연 팀장 말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주변 시선이 아주 달라졌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요즘 툭하면 스카우트 업체에서 계속 주기적으로 연락이 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최민혁이나 KM 전자에 대한 견제는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만약 신입 사원이 이 일을 진행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관심이 덜할 겁니다. 특히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아예 외면할 겁니다.”
“…이 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정확히는 이 기획안대로 적용하려면 디스플레이 타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불과 얼마 전에 최민혁 실장 자신이 KM 그룹 실무진, 특히 최문경 부회장 라인을 상대로 약속한 것을 무리하게 지키려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LCD 타입은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서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최민혁도 그들 걱정을 깨닫고는 씩 웃었다. 실제로 이 일은 단순히 MP3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IFA 강연에서 주장한 디지털 패러다임과도 관련이 있었다. 말뿐만이 아니라 결과로 세상 사람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해결해야죠.”
“물론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런데 터치 방식 소형 LCD는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그건 시간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설사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이 일에 달라붙는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최민혁은 뜻밖의 반박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소형 LCD 문제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LCD 계획, 정확히는 터치 LCD 계획이 실패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정 안되면 기술만 확보하면 되지. 스마트폰에서 터치 LCD는 빼놓을 수가 없는 핵심 기술로 이 원천 기술을 확보할 일본 애들 뒤통수친다는 의미도 있으니까.’
다만 굳이 그런 내심을 다섯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왕이면 이들이 좀 더 창의적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렵죠? 그래서 더 좋은 기회 아닙니까. 신입 사원에게 한번 기회를 줘봅시다. 과연 이 일이 정말 불가능할지 아닐지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너무 확신하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
다들 서로 눈치만 보면서 최민혁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도 지금까지 최민혁과 같이 있으면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
그런데 최민혁이 저렇게 확신할 때는 반드시 일이 성사되었다.
그래서 이해가 더 되지 않았다.
‘터치 LCD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어. 오성이나 LC 전자도 아직 문제를 해결 못 했어. 도대체 경험이 전혀 없는 신입 사원 강준석 씨가 어떻게 이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일까?’
* * *
이번 KM 전자 신입 사원 교육은 시작할 때부터 KM 그룹 내에서 말이 많았다. 오성 그룹 교육 설비를 빌리면서 더 혼란스러웠다.
언론조차 이 사건을 기사화하면서도 영문을 잘 알 수가 없어서 계속 기웃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신입 사원 교육 과정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내막을 최민혁 실장에게 들은 KM 전자 실무진조차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 경기장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최문경 부회장은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이런 일까지 확인해야 하나?”
“죄송합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그는 정말 입이 천 개가 있어도 한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 사소한 일도 간과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손을 대서 조용히 넘어간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냉수를 들이켰다.
“설마 이번 신입 사원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서 대박 치고 이러지는 않겠지?”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좀 특이한 과정이 있지만, 기본적인 신입 교육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리 승진도 있잖아?”
“그건 어디까지나 신입 사원 기를 부추기고, 기존 사원을 자극할 용도일 뿐입니다. 아니, 오히려 기존 평사원에게 반감만 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 민혁이 그놈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럴 겁니다. 솔직히 이번 신입 사원 교육으로 최민혁 실장이 얻은 것은 대외적인 평판입니다. 더욱이 안산 공장에 인력 부족이 심한 것도 한 원인입니다.”
“콜린스 생산이 늘어나서 인력 충원을 억지로 진행했다?”
“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이번 일을 통해서 사내 분위기를 혁신하려 한 것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KM 전자 분위기가 이전처럼 활기에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KM 전자 분위기가 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콜린스 매출이 안정화되면서 KM 전자 직원도 긴장감을 잃었다.
자연스럽게 회사 내부적으로 자기 몫을 지키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산 공장 노조 움직임은 그런 현상의 한 단면일 뿐이다.
최문경 부회장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권재홍 비서실장 주장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민혁, 그놈이 인수한 KM 산업 지분이 모두 6%라고 했지?”
“네.”
“확실한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정확히 김현우 수석 부장 통해서 얻은 정보이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괜히 최문경 부회장이 김현우 수석 부장 때문에 짜증 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서실을 총동원해서 얻은 정보입니다.”
“후유.”
한숨을 내쉰 최문경 부회장은 새삼 아버지 최용욱 회장을 원망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눈치껏 입을 열었다.
“회장님도 부회장님을 따로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애초에 최민혁 실장이 원했다면 장내로 KM 산업 주식을 사들일 수도 있습니다. 굳이 그게 최두진 사장 차명 지분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솔직히 최민혁 실장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회장님이 원하는 것은 그룹 내의 견제와 균형입니다. 최 실장이 계속 날뛰는 것도 원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민혁이 그놈은 조 단위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잖아?”
‘그건 최 실장의 능력입니다’란 말이 혀끝까지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부회장님, 지금은 KM 그룹에 집중해야 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처럼 최민혁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 지쳐갔다. 불행히도 당장은 대안이 없었다. 일단 최민혁 의도를 어떻게 해서라도 밟아버려야 한다. 반격은 그다음이었다.
“알아, 안다구. 그래서 더 이번 일을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놈이 이번 신입 사원 교육을 통해서 노리는 노림수가 있어. 그걸 파악해!”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혁 실장이 KM 산업 지분 매집을 계속 늘린다는 정보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이 또 미친놈처럼 난리 칠까 염려했다.
그건 최문경 부회장 이미지를 위해서 절대 좋지가 않았다.
‘확실히 이번 일은 그냥 대충 넘길 수가 없을 것 같아. 아무래도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어.’
* * *
박광민 사원은 조성돈 팀장 지시를 받았지만 혀를 내둘렀다. 그는 설마 신입 사원 교육 중에 나온 기획안을 실제로 검토할 줄은 몰랐다.
그는 때문에 임웅 대리와 같이 오성 그룹 신입 사원 교육원을 방문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임웅 대리는 역시나 이번 일에 불만이 많았다.
“실장님 의도를 이해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싶어. 이제 갓 신입 사원에게 이런 일을 맡기다니.”
이번 일이 내키지 않았던 박광민 사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도 뒤늦게야 이번 일이 신입 사원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기획 팀에서 이번 일을 맡는다면 아이디어를 도둑질한 것이 된다.
“그래도 신입 애들 아이디어를 최대한 보장해 주려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가능성이 있잖아. 이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냐.”
“그래도…….”
“광민 씨, 설마 지금 신입 애들 편을 들어주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다만…….”
“쯧, 그러지 좀 마.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 애들이 이 기획안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시간 낭비일 뿐이야!”
“하지만 최 실장님은 뭔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예 강연 중에 들어가서 시선을 끌라고 지시한 것만 해도 황당한 일이잖아. 난 이런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
박광민 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깨달았다. 덕분에 신입 사원 교육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 강준석 팀원은 사내 예절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팀별로 이루어진 책상 위에서 서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중이었다.
박광민 사원은 슬쩍 나서서 교육을 중지시킨 후에 강사와 잠깐 이야기했다.
[강준석 씨?!]
한창 예절 교육 필기에 여념이 없던 강준석은 고개를 갸웃한 채 머리를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교육을 같이 받는 이들 전체가 강준석을 쳐다보았다.
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분은 본사 기획 팀에서 나온 박광민 사원입니다. 강준석 팀이 내놓은 기획안을 기획 팀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다른 팀과는 따로 교육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러니 이분들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네? 하지만 지금 받는 교육은…….]
[안 받으셔도 됩니다.]
강준석 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도 다들 크게 당황했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섰다.
그는 상상을 초월한 전개에 그저 두 사람 눈치만 봤다.
임웅 대리가 그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