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최민혁은 예민한 최두진 사장의 반응에 혀를 찼다. 그 역시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벌써 그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까지는 간과했다.
그는 뒤늦게 최두진 사장이 최주민을 생각보다는 아낀다는 것을 눈치챘다.
따라서 이번 일은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최 사장님도 앞으로 내 조언을 무시하기는 어렵겠지.’
“이번 조언에 대한 대가는…….”
“알았다. 만약 사실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지분을 주마!”
“사장님을 믿겠습니다.”
“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최민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IMF라는 핵폭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청주 경기 악화는 한때 지나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KM 그룹 구조조정을 일으킨 이유도 이와 관련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신규 인원 채용 문제를 가지고 최 사장님을 찾은 것도 다 관련이 있습니다.”
청주에서 일어나는 부도 사태는 결국 세금으로 때우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 발생한다. 물고 물린 부패의 고리가 터져 나온다. 그 일이 그냥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만약 지역 업체에서 줄도산이 이어진다면 최주민 사장은 검찰 조사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최주민 사장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 미국으로 도피해 버릴 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손을 쓴다면 가족에게 떨어지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최두진 사장도 최민혁을 반박하려다가 최근 최주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들은 바를 떠올렸다. 최민혁 주장을 빈틈을 메꿨다.
그는 바위처럼 굳은 얼굴을 한 채 최민혁의 이야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최민혁은 굳이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이 나서려는 것을 손으로 막은 채 조용히 일어섰다.
하지만 분노한 최두진 사장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잡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민기식 고문 변호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기 바빴다.
“민 변, 당장 이번 일을 조사해 봐!”
* * *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능력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조사를 해왔다. 최민혁이 가끔 보이는 능력을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도 구체적인 물증을 찾지는 못했다.
최두진 사장 방문에 동행할 때는 이 문제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민혁은 신기할 정도로 최두진 사장 일가에 대해서 잘 알았다.
장승일 실장은 서울로 가는 차량 안에서 백미러로 힐끗 뒷좌석의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저기 실장님, 최 사장님 일가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던데…….”
최민혁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툴툴거렸다.
“협상하러 가는 자리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상대에 대해서 기본적인 정보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도 최주민 사장을 둘러싼 이야기는 저도 처음 들어서 말입니다.”
최민혁은 오히려 장승일 실장의 무능을 질타했다.
“그 말은 기조실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 아닙니까? 곧 실장님은 이제까지 놀고만 있었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기는 한데…….”
까칠한 최민혁 반응에 장승일 실장은 눈동자만 굴리다가 옆자리에 앉은 김명준 과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김명준 과장은 수상할 정도로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역시 뭔가 있구나.’
아무리 KM 전자가 잘나간다고 해도 계열사 기획실에서 최두진 사장 일가 주변 상황을 그렇게 샅샅이 파악할 수가 없다.
따로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조사를 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과연 누구에게 그런 조사를 맡겼을까.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뭔가 많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실장님.”
“괜한 소리 말고 운전이나 집중하세요. 교통사고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정 아니다 싶으면 김명준 과장님에게 핸들을 넘기든지 하시고요.”
“아, 네.”
장승일 실장은 입맛을 다신 채 힐끗 최민혁을 아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한번 알아봐야겠어.’
* * *
전국적인 건설 경기 불황은 일시적인 일처럼 보였다. 한국 경기는 드러난 것만 봐서는 외국 여행객이 사상 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 경제에서 일어나는 불황에 대해서 언론도 딱히 절박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 입에서 나온 이 정보를 이전처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조실 입장에서는 황당했다.
“지금 갑자기 건설 경기는 왜 조사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설마 KM 건설도 구조조정을 하려는 겁니까? KM 건설은 이미 구조조정 명단에서 배제하기로 한 것으로 압니다만?”
“아,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냐. 그냥 확인만 하려는 것뿐이야.”
하지만 기조실 직원 처지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KM 그룹은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면서 내부적으로 계속 혼란스러웠다.
직원들도 모였다면 하면 최민혁 실장과 최문경 부회장의 한판 대결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심지어 내기를 건 이들도 있었다.
뜬금없는 지시에 고개를 갸웃하던 구길모 차장은 1차 조사를 끝낸 후에 굳은 얼굴을 한 채 두터운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별일 아니라면서?”
“죄,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자는 게 아니야. 어떻게 기조실에서 건설업계 돌아가는 상황도 몰라?”
“그게 KM 건설이 구조조정 명단에서 배제된 후에 건설 쪽은 조사를 등한시한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네. 아니, 그게 한 그룹의 사업 방향을 책임진 기획조정실에서 할 소리야? 일을 제대로 하기는 한 거야?!”
쿡 고개를 숙이는 구길모 차장은 참담한 얼굴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승일 실장도 예상을 벗어난 이 상황에 새삼 최민혁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보고서 내용을 살피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주민 사장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최주민 사장이 불법 대출을 받아서 투자한 삼익 건설 재정 상태는 최악이었다.
총자산 4,200억으로 매출액만 4,500억이 넘고, 당기 순이익만 53억에 달하는 회사다. 매출 성장세도 꾸준하게 증가를 거듭했는데, 도급 순위로만 49위에 올라 있었다.
수원에 대규모 아파트 공사까지 벌일 정도로 잘나가는 회사다.
“그런데 최근 공사 수주량이 급감했고, 아파트 분양 저조로 미수금이 늘어났습니다. 관급 공사는 아예 배제되어서 자금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
장승일 실장은 충격적인 보고에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구길모 차장은 왜 자신이 뒤늦게야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알았는지 자책했다. 그는 장승일 실장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장승일 실장은 굳이 구길모 차장을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흔들릴 회사는 아니잖아?”
“무리한 타인 자본 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세를 늘리는 중에 미수 분양금이 급증한 것이 문제입니다.”
“…설마 부도가 나겠어?”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삼익의 다른 계열사가 상황이 좋지가 않습니다.”
다만 구길모 차장은 ‘마치 우리 KM 그룹 계열사랑 똑같습니다. 외형만 늘어났지 수익성이 개판이라서 자금 흐름이 좋지가 않습니다.’란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착잡한 얼굴을 한 채 지난 일을 돌이켜 봤다. 그는 KM 그룹이 침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기를 떠올렸다.
“딱 구조조정 전의 우리 KM 그룹이랑 판박이군.”
“…네.”
구길모 차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삼익 건설 상황을 보자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KM 그룹 역시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면 삼익처럼 안 된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지금 상황은 다르다.
1차 구조조정에 따라서 최악의 계열사는 이미 체질 개선에 들어갔다. 비록 노조 시위 때문에 주춤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내부적으로 일단 과거 KM 전자 보고서를 다시 재검토 중입니다. 이미 그 보고서에서 언급한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중입니다.”
“알겠네.”
* * *
장승일 실장은 보고서를 들고는 곧장 최용욱 회장을 찾아갔다.
최용욱 회장은 혀를 차면서 묵묵히 보고서를 살폈다. 그는 최주민 사건에 최두진 사장이 투자한 현황을 파악하고는 혀를 찼다.
“딱히 최 사장이 관여한 정황은 없잖아?”
“친형이 투자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최주민 사장은 최두진 사장의 투자를 받았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중소기업이나 중견 기업이 최주민 사장을 믿은 이유입니다.”
실제로 몇몇 중견 기업은 최두진 사장에게 꽤 큰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그 때문에 최주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만약 일이 터진다면 최두진 사장도 책임을 피해가지 못한다.
“아마 일이 터지면 채무자가 최두진 사장에게도 몰려갈 겁니다. 검찰 고소도 할 텐데, 조사를 피해가기 어렵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흘러가겠어?”
“자금 규모가 너무 큽니다. 대부분이 서민이나 중소기업 돈입니다. 그들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상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기가 막히네. 그래도 수고했네. 비록 다소 늦었지만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니까.”
“제가 찾은 것이 아니라 최민혁 실장님이 찾은 정보입니다.”
“…정말인가?”
‘아니, 어떻게?’란 질문까지 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었다.
“실장님이 제대로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기조실에서 제대로…….”
“기조실이 무슨 대주주 가족 내역까지 살피는 단체야? 말도 안 되는 변명은 하지도 마!”
“죄송합니다.”
“허.”
최용욱 회장은 또다시 손자 최민혁의 능력을 직면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이야기에 마냥 부담스러웠다.
그는 뒤늦게 최두진 사장의 서자 김현우 상무 일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서자나 친동생이 최두진 사장 발목을 계속 잡기 때문이다.
그는 유일한 친구인 최두진 사장을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건 그냥 둘 수가 없어.”
* * *
최용욱 회장은 결국 장승일 실장과 같이 최두진 사장 별장을 찾아갔다.
최두진 사장 안색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이 내민 보고서를 보고도 흥분하지 않았다. 이미 내부적으로 확인을 거친 것이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선을 확실히 긋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자칫하면 자네도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수 있어.”
“내가?”
최두진 사장은 기가 찼다. 문제는 건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삼익 건설은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더 투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동생을 고발할 수도 없잖아?’
그런데 또 지금 와서 최주민을 고발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삼익 건설 여신은…….”
“서울은행부터 시작해서 어지간한 은행은 다 걸려 있는 것 같아. 투금, 종금사도, 보험도 다 문제가 될 것 같아.”
최두진 사장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어떻게 손을 써서 손실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고맙네.”
“나도 다를 것이 없어. 만약 민혁이 그놈이 아니었다면 자네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부닥쳤을 테니까.”
최용욱 회장은 착잡한 얼굴을 한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익 건설이 처한 상황을 보니, KM 그룹 역시 마냥 안심을 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룹 내부 사정을 좀 더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어.’
* * *
최민혁은 묵묵히 기다리다가 최두진 사장의 연락을 받자 냉큼 달려갔다. 그는 먼저 말을 꺼내기보다 묵묵히 최두진 사장 반응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최두진 사장 반응이 이전과는 또 사뭇 달랐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냐?”
“협상하러 갈 때 당연히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최주민 일은 이번 협상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