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22화 (322/1,021)

#322.

“DL 화재가 지금까지 1조가 넘는 손실을 봤고, 덕분에 중공업이나 화학 쪽으로 영역을 넓히려던 청사진을 다 조정해야 할 상황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정략결혼설로 조 단위의 시세 차익을 올리고 말이야?”

“그런 셈입니다.”

“가만 그러면 DL 그룹 손실이 너무 크잖아. 김 회장이 그냥 손 놓고 보고 있어?”

“아무래도 일본 쪽에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단기 자금이라. 그거 자칫하면 큰일 날 텐데, 황당하군.”

그 잘나가는 DL 화재가 흔들리면서 DL 그룹이 휘청이는 모습은 DL 그룹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최민혁 실장의 짓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DL 화재 때문에 타격을 입은 다른 대기업이 DL 화재 영역을 야금야금 먹었기 때문이다.

김상구 회장조차 최용욱 회장을 비난하면서도 직접 손을 쓰지 못한 이유였다.

최문경 부회장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자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이번 기회가 우리에게도 절호의 찬스인 것은 맞는데, 과연 민혁, 그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나도 김현탁 사장 꼴 나는 것 아냐?”

“이번 사건은 이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KM 전자 주가는 주가 조작의 정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증권감독원이나 검찰도 이번 일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몇 번이나 했잖아. 난 결과가 필요해.”

“민상수 부장이 증권감독원이나 검찰 쪽에 지인이 꽤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번 일은 잘될 겁니다.”

“좋아. 자네만 믿겠네. 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네가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이 엿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증권감독원은 최근 거래양이 폭증한 중민상사와 청화의 시세 조종 협의나 내부자 거래 협의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이들은 두 회사가 주가 조작 협의가 의혹이 짙다고 확신한 것이다.

중민상사만 해도 하루 거래량이 40만 주에 불과했다가 최근 130만 주를 넘어섰는데, 그 사이에 주가가 무려 22% 가까이 상승했다.

청산의 경우에 하루 평균 20만 주에 불과했는데, 최근 며칠 동안은 무려 230만 주가 거래되면서 37% 가까이 폭등했다.

증권감독원은 이들 두 회사의 주가 상승률이나 거래량을 참고로 해서 검찰에 고소했다.

따라서 최근 하루 평균 거래량이 120만 주로 폭등한 KM 전자 역시 주가 조작 의혹이 생기는 게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KM 전자는 두 회사와 큰 차이점이 있었다.

주식을 매입한 세력이 국내 회사가 아니라 외국계 회사란 점이다.

이 외국계 회사도 모두 10개가 넘었다. 이들은 작전세력이 아니었다. 엄연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회사였다.

오히려 KM 전자 주식을 소유했던 국내 물량이 외국계 기업으로 다 넘어갔다.

따라서 증권감독원도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크게 당황했다. KM 전자 주식이 주가 조작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제보가 들어왔다는 점이다.

남부지검 증권 수사 팀 박상희 부부장검사도 증권감독원 실무자에게서 KM 전자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고민에 빠졌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그런데 제보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결국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번 사건의 키맨인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박두영 부장검사를 찾아갔다.

한 까칠한 박두영 부장검사는 정보 출처부터 따졌다.

“KM 그룹의 민상수 비서실 부장이 이 건에 대해서 제보했다는 소리야?”

“딱 봐도 경영권 분쟁 때문에 이 쇼를 벌이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으면 언론에 제보하겠다고 하는데, 골치입니다.”

최민혁 실장을 지지하는 박두영 부장검사로서는 도저히 제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철저한 최민혁 실장이 일을 이렇게 어수룩하게 처리할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다 좋은데, 이번 KM 전자 주가가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니까요. 거래량이 폭증한 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현상입니다. 뭐 시작은 정략결혼설 때문이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요즘 경제란을 장식하는 최민혁의 데이트 사진 기사를 슬쩍 내밀었다.

“아, 혹시 최민혁 실장의 그 데이트 사진 말하는 거야?”

“네. 그겁니다.”

“…….”

박두영 부장검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가 뭔지 알았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이 이번 일 때문에 열이 단단히 받았나 보군. 하긴 무려 400만 주를 단기에 팔아치웠다고 하니까. 최 실장이 미친 건가? 도대체 왜 일을 이렇게 벌인 거지?’

“이걸 주가 조작으로 봐야 하는 거야?”

박상희 부부장검사도 어깨를 으쓱한 채 부러운 눈으로 최민혁 데이트 사진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서요. 어떻게 보면 피해를 본 주주는 최근 주식을 매입한 외국인 주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계속 KM 주식을 매집하고 있으니까.”

“KM 전자 주식을 보유한 기존 주주는 어때?”

“그들이야 재미를 단단히 봤습니다. 수십억을 번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아주 KM 전자의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하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KM 전자 주가가 많이 내린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KM 전자 주가가 많이 내려가지는 않았어.”

박상희 부부장검사도 툴툴거렸다.

“주식 시장에서 물량을 정리한 것도 있지만 직접 만나서 블록딜 거래로 꽤 많이 처리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외국인 투자자가 이번 거래에 응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주가 조작이란 소리야, 아니면 정상적인 주식 거래란 소리야?”

“형태는 주가 조작을 띄지만, 결론적으로 피해를 본 이들이 없습니다. 주식을 매집한 세력도 만족한 거래이니까요.”

박두영 부장검사는 새삼 최민혁 실장이 무슨 다른 의도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면 문제될 것은 없잖아?”

“아무래도 그 형식적인 면이 문제입니다. 조사를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명분이 작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를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박상희 부부장검사가 걱정하는 부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나보고 최민혁 실장을 만나서 협박이라도 하란 소리야?”

“협박까지는 아니고, 앞으로 좀 자제해 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제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기에는 부담스러우니까요.”

“쯧, 알겠네.”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이한 경우는 또 처음입니다. 최문경 부회장 쪽의 시선도 걱정됩니다.”

“지난번에 내가 부탁한 것도 있으니까. 알았어. 자네 말대로 해주지.”

박두영 부장검사는 혀를 차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 한 번 거하게 벌였어.’

* * *

조성돈 팀장은 주가 폭등에 대해서 우려를 했지만, 장승일 실장 통해서 최문경 부회장 쪽이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받자 이번 일을 따로 조사했다. 그는 여러 채널을 통해서 KM 전자 주가 폭등과 관련된 움직임을 보자 최민혁을 찾아갔다.

그는 정략결혼설 이후에 일어난 최문경 부회장 라인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최민혁 실장에게 꼼꼼하게 보고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최민혁은 딱 한마디만 했다. 그는 딱히 정략결혼설에 대해서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인상을 찡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이번 KM 전자 주가를 조사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비서실에서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이번 일이 증권감독원이나 심지어 검찰 쪽에서도 따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여의도 증권 수사 팀에서 실장님에 대해서 따로 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이번 일로 단단히 작정했나 보군요.”

걱정이 가득한 조성돈 팀장은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딱히 이번 일로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도 없는데 말이죠.”

“그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만약 KM 전자 주가가 폭락했다면 큰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폭락하지 않았으니, 상관은 없잖아요.”

실제로 KM 전자 주가는 22만 원을 정점으로 찍은 후에 다시 15만 원까지 추락했지만 다시 반등에 성공해서 18만 원에 도달했다.

다만 주가 등락폭은 심해서 15만 원과 19만 원선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최고가 대비해서 20% 남짓 차이가 있으니, 주가가 폭락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신기한 사실은 이런 와중에도 개미가 팔아치운 주식을 외국인이 대부분 매집했다는 점이다.

조성돈 팀장은 이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주가가 폭락한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최민혁은 힐끗 조성돈 팀장을 쳐다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굳이 이번에 주식을 대량으로 매각한 이유는 MP3 출시 연기와 IMF 대응 때문이다. 다만 조성돈 팀장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굳이 두 가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무궁화 위성 발사 소식은 알고 있으시죠?”

“그것과 주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관계가 있죠. 이번 위성 솔루션에 적용된 기술 중에 제 특허도 제법 있으니까.”

“하지만 그 특허 수입은…….”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수익이 다른 특허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KM 전자가 가지고 있는 특허를 잘 들여다보면, 위성 솔루션 특허와 관련된 기술이 다양합니다.”

“아, 설마…….”

최민혁은 씩 웃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위성 사업을 통해서 우리 특허 가치를 인정받으면, MEG 표준화 협회에서 우리 특허를 좀 더 적극 들여다볼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건 곧 KM 전자 특허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국인 투자자가 굳이 우리 회사 주식에 매달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KM 전자 주가는 폭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비록 정략결혼설 때문에 주가가 폭등했지만, KM 전자 주식은 오히려 제 가격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오히려 주식을 너무 많이 들고 있는 것이 문제죠.”

“…….”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MP3 사업을 떠올리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MP3가 가치 있는 사업 아이템이란 것을 알았지만 체감하지는 못했다.

MP3가 아직 시장에 얼마나 팔렸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그제야 차창을 내다보면서 양손을 쫙 펼쳤다.

“중요한 것은 MP3를 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면 이에 따라서 따라오는 특허 수익이 더 큽니다. 아직 그 의미를 제대로 읽는 사람은 얼마 없지요. 있다고 한다면 외국인 투자자 정도일 겁니다. 그것이 이번 주가에 반영된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실장님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과는 받죠. 그러니 기획 팀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몇 가지 더 충고하는 중에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전화가 오자 몇 가지 기획팀 지시 사안을 더 남긴 후에 자리를 떠났다.

* * *

박두영 부장검사는 서울 근교의 한 별장을 찾아가면서 최민혁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번 일은 딱히 최민혁 실장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증권감독원이나 검찰에서도 이번 일을 그냥 넘겨 버릴 수도 없었다.

다행히 최민혁 실장은 과거의 그 까칠한 모습과는 좀 달랐다.

“이번 KM 전자 주가 폭등 때문에 검찰에서도 주시하나 보군요.”

“최문경 부회장이 계속 검찰이나 증권감독원에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정치권까지 동원해서 벌인 일이라서 쉽지가 않습니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절 압박하려나 보군요.”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여의도 증권 수사 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박두영 부장검사도 최민혁 실장 눈치를 봤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KM 전자 주식 폭등으로 최민혁 자산이 폭증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조가 넘는 자금이라니.’

최민혁은 눈치를 계속 보는 박두영 부장검사의 태도에 피식 웃다가 김명준 과장에게서 이미 준비해 둔 파일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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