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04화 (304/1,021)

#304.

남수현 변호사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최민혁 실장 얼굴을 보자 뒤늦게 후회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일에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감수한 일입니다.”

똑 부러진 남수현 변호사는 최민혁과 일정한 거리를 뒀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DL 그룹 때문이다.

비록 이번 일을 맡아서 진행하기는 하지만 괜히 최민혁까지 엮여서 DL 그룹과 불구대천지원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최민혁이 끼어들면 이 싸움을 자기 힘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남수현 변호사 홀로 DL 그룹과 싸우는 것과 최민혁 실장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최민혁도 물론 남수현 변호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티가 나게 도울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님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은 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최소한 대응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남수현 변호사님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서 설사 소송에 이겨서도 사람들이 모를 수가 있어요.”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그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최민혁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제가 오성 전자 쪽에 대화 채널이 좀 있습니다. 그쪽의 도움을 얻는다면 상황이 좀 다르죠. 최근 오성 전자는 DL 그룹과 사이가 안 좋기 때문입니다.”

남수현 변호사는 최민혁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설마 최민혁이 이런 제안을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하면 제가 할 일은 뉴스 인터뷰에 나가서 폭로하란 말입니까?”

“폭로라기보다는 남 변호사님이 잘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굳이 과장하거나 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남 변호사님은 평소처럼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서 재판에 충실한 점을 피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흠.”

남수현 변호사는 처음에는 최민혁의 주장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떤 선동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 이길 것이라는 점을 말하란 말씀이군요.”

“그렇죠. 그게 핵심입니다. 나머지는 방송사나 언론사에서 오라면 가서 이야기하고, 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뉴스 인터뷰 자리는…….”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형식적으로 방송국에서 먼저 나선 것으로 하죠. 제가 관여한 흔적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남수현 변호사도 딱히 최민혁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는 최훈열 재판에서 왜 자신이 당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식이구나.’

* * *

오성 기획 팀은 올해 들어와서 파란만장한 일을 자주 경험했다.

오성 전자 윗선의 다양한 압력은 물론이고, 주변 다른 팀에서도 견제를 당했다.

심지어 김현우 수석 부장 일 때문에 내부적으로 많은 욕을 먹었다.

그나마 최근 한 일은 e오성호의 순항을 도왔다는 점이다.

바로 오큘러스 지분 인수에 성공한 일이다. 실제로 이 일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아서 황광수 차장과 임권수 부장은 인센티브를 따로 받았다.

두 사람 다 어리둥절했다. 자칫하면 회사에서 잘릴 수가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칭찬을 들은 것이다.

권태성 실장 역시 윗선에서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상무로 승진 이야기를 계속 듣기 때문이다. 다만 표정만큼은 과거보다 더 굳어 있었다.

그는 늘 e오성 경영 성과에 집착했다.

임권수 부장이 오히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위성 디지털 방송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무궁화 위성 발사만 마치면 국내 이슈를 선점할 겁니다.”

“그래서 더 문제를 잘 살펴보라는 거잖아. 위성 발사 쪽에 보낸 안지영 박사는 뭐래?”

“이미 완벽한 테스트를 거쳐서 최종 점검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성 발사를 주관하는 맥도넬 더글러스 애들이 바보가 아닌데, 대충하겠습니까?”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여전히 이번 일이 못마땅했다. 일이 잘 풀기만 하면 괜찮지만 사고가 생긴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였다.

보다 못한 황광수 차장이 나섰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 꼼수를 많이 부린다고 해도 위성에 손을 쓰겠습니까?”

“그것 때문이 아냐. 정말 돈이 된다면 최 실장이 중간에 그렇게 손 털고 나갈 이유가 없어. 다른 문제가 분명히 있어.”

두 사람은 답답한 얼굴로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른 팀장 역시 산적한 문제를 내버려 둔 채 e오성 일에만 매달리는 권태성 실장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만 최 실장은 지금 뭘 하고 있지?”

“그게 얼마 전에 롤링홀에서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롤링홀? 그게 뭔데?”

롤링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기획실 전체 회의에서 나올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다들 기가 찬 표정이었다.

권태성 실장조차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설마 최 실장이 기획사를 차리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미래 기획사의 송도연 연습생과 계약을 체결했는데, 내부적으로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상업적인 기획사와는 다릅니다. 만약 그런 목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다른 연예인과도 계약을 추진해야 할 텐데,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습니다.”

처음에는 쉬쉬하던 다른 기획 팀장도 다들 눈빛을 반짝인 채 이야기에 집중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KM 전자 내부 이야기라서 결국 호기심을 느낀 것이었다.

다행히 이 회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 전화 때문이었다.

결국 기획 팀 정식 회의는 시작한 지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중요한 회의 내용은 생략한 종결되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도 권태성 실장을 비웃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권태성 실장은 오성 그룹 황태자 안재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 * *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권태성 실장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최민혁 실장 모습을 살폈다. 그는 혹시나 콜린스 매각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 최민혁 입에 집중했다.

비서가 마실 것을 내와도 입에 들어가지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했다.

최민혁은 따가운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임권수 부장 역시 경계 어린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황광수 차장도 딱히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지는 않았다.

e오성 사태 이후에 두 사람도 최민혁 실장을 경계한 것이었다.

아니, 바짝 긴장했다는 것이 정확했다.

최민혁은 홍삼차를 홀짝이면서 그 맛을 음미했다.

“이거 맛이 좋네요.”

“원래 회장님에게 갈 물건이었는데, 계열사별로 조금씩 받은 물건입니다.”

“호, 그렇습니까?”

이제 이십 대로 팔팔한 최민혁으로서는 홍삼이 썩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는 권태성 실장 모습에 피식 웃었다.

“너무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설마 제가 오성 전자를 상대로 해코지를 하겠습니까.”

“DL 그룹 상황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아, 재열이 형 말하는 건가 보네요. 아니, 별장 성 접대로 구속된 일이 저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권태성 실장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 그의 신경이 곤두선 것은 따지고 보면 무궁화 위성 발사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위성 발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최민혁이 디지털 위성 지분을 일부 남겨놓았다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실장님이 왜 지분을 전량 다 오성 그룹과 DL 그룹에 넘겼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위성 사업 쪽은 우리 KM 전자가 가는 방향과는 달랐어요. 그래서 매각한 것뿐입니다.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허, 정말 의심도 많군요.”

권태성 실장은 여전히 최민혁 실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면 오늘 갑자기 뵙자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도움이라면…….”

“자세한 내막은 여기서 더 말할 것은 없을 같고, 아마 DL 전자 김용만 전무와 제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알 겁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서 이번 특정금전신탁 사건을 좀 더 키우고 싶어요. 꼭 이 사건이 아니라고 해도 남수현 변호사 같은 분이 억울하게 누명 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무리 오성 전자라고 해도 DL 그룹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명분이야 있죠. 이번에 오성 생명도 꽤 큰 타격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 보복이면 좋겠네요. 그 정도면 괜찮을 겁니다.”

권태성 실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최민혁이 어이가 없었다. 이제까지 최민혁에게 많이, 아니, 일방적으로 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는 앞에서 협박받은 것은 또 처음이다.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입니까?”

“전혀요. 부담스러운 상대죠. 아, 물론 저도 공짜로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최민혁 눈빛은 마치 심술 천 단인 것처럼 반짝였다.

“e오성이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권태성 실장은 경기 들린 사람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서, 설마 디지털 위성 사업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겁니까?”

“전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위성 사업 지분을 다 털어낸 이유가 궁금할 겁니다. 그 답을 가르쳐 주죠.”

“진심입니까?”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제 제안이 장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권 실장님은 다를 겁니다. 몇 번 뜨거운 맛을 보셨을 테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권태성 실장도 최근 DL 화재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잘 알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일 때문에 오성 생명 자금이 경직되면서 다른 계열사에도 된서리가 쳤다.

오성 생명은 심지어 DL 화재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고객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것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무궁화 위성 발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세요. 솔직히 제가 못 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룹 내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서죠.”

* * *

오성 전자 기획 팀은 최민혁 실장이 다녀간 후에 발칵 뒤집혔다.

권태성 실장이 직접 무궁화 위성 발사와 관련해서 조사를 진행한 것 때문이다.

현재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한창 발사 준비가 진행 중인 무궁화 위성 발사에 관한 조사가 진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성 전자가 디지털 위성 발사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궁화 위성 발사에 직접 관여하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위성 제조 기관인 록히드 마틴 쪽에서는 오히려 비웃었다.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우리 회사 기술을 무시하는 겁니까?]

오히려 고압적인 소리만 나왔다.

위성주 관제소에서도 권태성 실장의 일방적인 태도에 오히려 화를 냈다.

[정확한 근거도 없이 위성 발사를 다시 재검토하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오성 전자 내부에서도 이번 일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권태성 실장에 불만을 느낀 세력이 하나둘씩 힘을 합쳤다.

권태성 실장이 안재운 황태자와 손을 잡은 것에 불만을 느낀 세력이 아예 작정하고 권태성 실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권태성 실장도 뒤늦게 아차 싶었다. 최민혁 실장에 또 속았다고 자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만약 무궁화 위성 발사에 실패하게 되면, 디지털 위성 사업이 몇 년이 연기될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오큘러스 법인은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데, 그 책임이 결국 안재운 황태자에게 돌아간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고도 남을 사태였다.

결국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습니다. 이번 위성 발사만 성공한다면 어떤 일이든지 돕겠습니다.]

[좋은 태도입니다. 그러면 이번에 권 실장님을 믿고, 한 가지 사실을 말씀 드리죠. 잘 아시겠지만 제가 ETRI 쪽과도 인맥이 있는 것은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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