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02화 (302/1,021)

#302.

‘하긴 아버님 성정은…….’

기업 경영에서 최용욱 회장은 나름 일가를 이루었다. 문제는 자부심은 이에 비례해서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그 자부심은 아집이 되었고, 자신에 반하는 이들은 혹독하게 대했다.

정미선 그녀는 직접 최용욱 회장 수법에 당해봤기에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았다.

그러니 갓 데뷔 영화를 찍는 심진모 감독이 최용욱 회장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자신이 최용욱 회장 며느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미선은 오히려 최용욱 회장이 이전과는 달리 자기편을 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시아버지 최용욱 회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행보였다.

그녀가 아는 최용욱 회장은 결코 자신에게 저런 자세를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영화 촬영장까지 행차한 것일까?’

더욱이 밥차라니.

그녀가 아는 최용욱 회장은 절대로 자의적인 판단으로 남에게 선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정미선은 이유야 어쨌든 최용욱 회장이 까칠하기는 했지만 지금 분위기에서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최용욱 회장 덕분에 영화 촬영은 앞으로 순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특히 이번 영화 때문에 친해진 김승연을 따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말 잘되었어. 승연이에게는 천군만마나 마찬가지야.’

그녀는 안정을 찾은 김승연 손을 잡은 채 밝게 웃었다.

오히려 백도 없고, 연기 경험도 별로 없는 김승연이 당황했다.

“선, 선배님이 결혼한 분이 KM 그룹 사람이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정미선은 그제야 최용욱 회장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식 최민혁 행보 때문이다.

비록 뉴스로 소식을 듣고는 있지만, 최민혁 행보를 접할 때면 자랑스러웠다.

의문은 많았다. 자신에게 보낸 경호원 두 사람부터 시작해서 너무 이상했다. 서자인 최민혁이 어떻게 그런 성과를 이루었는지 그녀의 상리와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식 앞길에 장애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예 최민혁에게 단 한 번의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아버님이 민혁이 때문에 여기 나타난 거야?’

* * *

정미선은 최용욱 회장과 같이 촬영장을 벗어났다. 한강 변의 화창한 모습이 그녀 앞에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광경을 즐길 상황이 아니었다.

“아버님, 연락하셨으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을 텐데, 갑자기 무슨 일로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최용욱 회장은 움찔했다.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당연히 최민혁의 혼사 때문이었다. 무조건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잠깐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의아한 정미선 눈빛을 보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민혁이 혼사 때문이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그제야 이해했다.

“아버님, 민혁이 나이가 이제 겨우 20살에 불과합니다.”

“안다. 약혼을 생각 중이다. 굳이 이렇게 성급하게 나서는 것도 나조차도 상대가 놓치기 힘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꼭 정략결혼 때문이 아니다. 그 정도 인물이면 결혼 상대로 나무랄 것이 없다.”

그녀도 어이가 없었지만, 자식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괜찮은 혼처가 있다면 꼭 반대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상대가 누구기에…….”

“오성 그룹의 안건민 회장이다.”

“……!!”

그녀도 재벌가 사람답게 오성 가문에 대해서 제법 알았다. 다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라서 멍하니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오성 그룹이라면 서, 설마 오성 그룹 막내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그 오성 가문이다. 더욱이 안 회장 막내는 다른 재벌가 여식과는 달라. 털털한 성격에 가정불화를 일으킬 타입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민혁이 상대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맙소사!”

정미선은 경악했다. 그녀는 고작 KM 그룹 집안의 텃새에 시달려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다. 그런 KM 그룹조차 오성 그룹에 비하면 중소기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녀가 반대할 일은 아니지만,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용욱 회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래. 뭐 너도 뉴스를 보고 있다면 민혁이 그 녀석이 얼마나 주목받는 지는 잘 알 거다. 하지만 기사로 나온 사실은 빙산에 불과하다. 민혁, 그놈의 능력은 진짜이니까.”

“세상에 오성가라니.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네 말이 맞다. 특히 안 회장의 막내 사랑은 유별나다. 이미 증여받은 주식 가치만 해도 나도 무시하기 힘들어. 그럼에도 이 중매 자리를 제안한 것은 그만큼 오성 가문에서 민혁이 녀석을 괜찮게 봐서다.”

정미선은 순간적으로 좋아했다. 상대가 워낙 좋아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과연 민혁이가 오성 일가의 사위가 되어서 잘 적응할까 고민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슬쩍 한 가지 사실을 토로했다.

“하지만 민혁이는 서자 출신이라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최용욱 회장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그 녀석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잖아. 그러니 서자 출신 따위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아. 이미 그놈은 경영적인 면에서 일가를 이루었으니까.”

그녀는 최용욱 회장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최용욱 회장의 최민혁 자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최민혁이 집에 온 이후로 기획실장이 되어서 한 일이 가감 없이 나왔다.

“…….”

그녀는 한편으로 자식 자랑을 최용욱 회장에게 들어서 통쾌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뒤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만약 화자가 최용욱 회장이 아니라면 아예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민혁이는 이제 나도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했다. 설사 안건민 회장이라도 해도 민혁이를 가볍게 보기 어렵다.”

“그, 그렇게까지 민혁이가 성장했습니까?”

“그래. 그 결과 중의 하나인 콜린스 매각설 때문이라고 봐야지. 그 일 때문에 안건민 회장도 이 일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으니까. 콜린스가 자칫 소니에 매각되면 오성 전자는 큰 타격을 받아. 안 회장이 절박하지. 그러니 네가 걱정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가장 큰 문제는 민혁이 애미인 너의 결정이니까. 네가 반대하면 민혁이는 절대로 이 혼사를 용납하지 않을 거다.”

“…….”

실로 충격적인 이야기.

정미선은 고작 중견 기업의 막내와의 결혼에도 그렇게 구박을 받았다. 모진 정신적인 학대도 경험했다. 그만큼 재벌가의 벽은 높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성 가문에서조차 최민혁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성장했다니. 그녀는 솔직히 최용욱 회장 말이 잘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뉴스 이야기로는 콜린스 매각설은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내가 이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는 말하기 그렇구나. 하지만 진실은 좀 달라. 안건민 회장이 날 생각해서 이번 중매를 밀어붙이는 것은 아니다. 민혁이 녀석이 그만큼 부담스러워서다. 그러니 네가 굳이 그런 문제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정미선도 이야기하면 할수록 충격적인 이야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 최용욱 회장이나 오성 안건민 회장이 남의 눈치를 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자식 최민혁이라니.

최용욱 회장은 한강 벤치에 앉았다. 그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최근 최민혁이 한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팠다.

특히 차입금과 KM 그룹 구조조정은 아예 그의 경영 신념과도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반대는커녕 오히려 그 계획을 밀어주고 있으니.

최용욱 회장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심란했다. 그는 무릎을 툭툭 치면서 툴툴거렸다. 더욱이 며늘아기 앞이라서 마음이 편했다.

“민혁이 그 녀석이 얼마나 까칠한지 말도 못 한다. 나도 이제 그놈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어.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는 마라.”

쇼킹한 이야기에도 정미선은 이번 중매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민혁이 이미지는 아버님이 만들었다는 소리가 파다해요. 그런 상황에서…….”

“그건 네가 잘못 아는 거다. 지금 KM 전자는 민혁이가 스스로 만든 거다. 나도 형식적으로는 KM 전자에 힘을 쓸 수가 없어. 더욱이 KM 그룹 계열사 임직원 중에도 민혁이 그 녀석을 미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러니 네가 하는 걱정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영화를 찍으면서 사회생활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버님도 참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민혁이 능력이 대단해도 민혁이 나이를 고려하면,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에요?”

그는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을 지적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니. 문경이하고 갈등도 문제야. 솔직히 난 네가 나서서 그 일을 중재했으면 한다. 너밖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 민혁이는 이제 재벌 3세 따위가 아니다. 그는 자기 성을 만들고 있는 기린아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니까.”

“…….”

그녀는 그제야 입을 딱 벌렸다. 이 답답한 어르신이 왜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났나 싶었는데, 결국 최민혁이 부담스러워서였던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탄식했다.

“그리고 며늘아기야, 네가 날 용서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 하지만…….”

“그래. 시간이 필요하겠지. 좋은 답변을 기다리고 있겠다.”

“…네.”

정미선은 그제야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아들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최용욱 회장이 항복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집을 떠나던 자식 모습을 떠올리면서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들에 대해 걱정했던 건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들에 대해 따로 사적으로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최민혁이 중앙지검에서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거동도 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뒤늦게 최민혁이 무죄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고 정신을 차렸다. 다시 영화계로 리턴한 이유였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 * *

김명준 과장은 한강 변에 도착해서 갑자기 다시 차량을 돌리라고 한 최민혁이 의아해서 힐끗 쳐다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모습만 보고 지시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이 아는 최용욱 회장은 결코 어머니 정미선을 찾을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뻔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과거처럼 행패를 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밥차라니.

‘정말 사과를 하러 왔구나.’

그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최민혁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최용욱 회장이 바뀐 사실 한 가지를 기억했다.

‘하긴 차입금을 취소했고, 심지어 KM 그룹 구조조정까지 진행했었지. 이건 인생 1회차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야.’

최민혁이 특히 놀란 것은 이제 멀쩡하게 정상을 찾은 정미선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과의 사과 때문인지 안색도 좋았다.

그 역시 정미선 주치의 통해서 정미선의 정신적인 상처 원인이 최용욱 회장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안다고 해서 최용욱 회장 보고 정미선을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한다고 최용욱 회장이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최민혁이 최용욱 회장을 협박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실장님.”

최민혁은 실소를 터뜨렸다.

“별것 아닙니다. 순리대로 잘 돌아가는 상황을 봤으니, 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지켜만 봅시다.”

“네?”

“전 솔직히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다시 압박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 회장님의 성격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모습은 좀 달랐어요. 그 반대였으니까.”

“하긴 상황이 잘 돌아가는 상황에 실장님이 끼어들면 애매해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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