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박 여사가 아무래도 민혁이 출신 때문에 많이 갈등이 고민을 했나 봐요. 그런데 민혁이 명성이 점점 커지면서 태도를 바꾸었어요.”
“안 회장은?”
“안 회장도 요즘은 암묵적으로 허락했나 봐요.”
“암묵적인 허락은 또 뭐냐?”
“당시도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허 참.”
“그런데 이제 어쩔 거예요. 이번 일 때문에 민혁이 어미 일도 이제 정리를 해야 할 텐데…….”
“며늘아기 말하는 거야?”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세요?”
“으음.”
아니, 안다. 모를 수가 없다. 본인도 과거 결혼 문제 때문에 최민혁의 모친 정미선을 괴롭힌 사람 중의 하나니까. 다만 최용욱 회장 성정상 그게 정미선을 정신적으로 괴롭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영주 여사가 탄식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이 한 짓이 뭔지 모르고 있나 봐요.”
“그러는 당신은 잘했다고 생각해?”
“아니, 내가 무슨 죄가 있어요. 당신이 그 난리를 치는데, 그러면 내가 당신하고 싸워야겠어요?”
“며늘아기 불러 한번 물어볼까?!”
“아, 몰라요.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요!”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 일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막내 최병문은 이미 죽고 난 다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영특한 막내 최병문을 아꼈다. 정미선과 만남을 그래서 막았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최민혁 중매 이야기를 꺼내려면 반드시 정미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최민혁이 절대로 용납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최용욱 회장이 강압으로 최민혁 보고 만나 봐 한다고 손자 최민혁이 순순히 따를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의 성정을 천천히 떠올려 보다가 강압적인 방식은 바로 포기했다.
‘이놈은 지 할애비를 공격하고도 남은 녀석이야.’
“그런데 이상하군. 왜 갑자기 중매 이야기가 또 나오는 건가?”
“TV 사업부 매각설 때문에 박 여사도 고민이 많은가 봐요. 안 회장조차 이번 일을 은근히 떠민다고 하니까. 아니, 내가 민혁이 녀석이 서자라서 집안에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오히려 능력만 좋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러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보통 재벌가도 아니고 오성가에서 서자 사위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굳이 사람은 많은데,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이번 일도 콜린스 매각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번 일은 그도 가볍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김상구 회장의 압박 때문에 민혁이, 이 녀석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중매는 좋은 방패였다.
‘확실히 안 회장과 사돈을 맺는다면 민혁, 그 녀석 성격도 좀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혹시 며느리 의견은 확인해 봤어?”
“만나 봤죠. 아무래도 당신이 가서 직접 사과하는 것이 필요해요.”
“내가?”
“당신은 자신이 그때 한 짓이 병문이를 위해서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그 아이에게 얼마나 가혹했는 지는 모를 거예요.”
따가운 질책에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거야 당신이 한 행동에 비하면, 아, 알았어.”
“장 실장인가, 그 친구도 데려가서 괜히 사고를 치지나 마세요!”
“…그래.”
* * *
최민혁은 최근 갑자기 연락이 부쩍 늘어난 할머니 이영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는 지금 산적한 일 처리 때문에 골치인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안건민 회장 이야기다. 그는 과거 부모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 박서현을 만났다. 그것도 박서현은 잠깐 국전 행사 소개를 맡은 후에 안건민 회장을 단 한 번 만나서 약혼까지 했다.
박서현 여사는 본인 자신도 이런 식의 중매를 싫어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맹렬하게 항의했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굳이 남의 연예가를 듣고 싶지 않은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안 회장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에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닌데, 뒤에서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KM 그룹과 오성 그룹 사이에 그렇게 나쁜 거래도 아니었다.
상대는 안건민 회장이 그렇게 아낀다는 막내 안지연이었다. 그녀는 이제 막 이원 대학교에 입학해 있기도 했다.
최민혁은 좋게 좋게 거절한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전 결혼이든, 약혼이든 관심이 없습니다.]
[민혁아, 남자는 말이다. 가정을 꾸려야 큰일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이영주 여사는 최민혁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 그녀는 좋은 게 좋다는 태도였다. 아니, 정미선 일 때문에 더 이번 일을 적극 추진했다.
최민혁으로서는 상상도 못 한 반격이었다.
[하지만 저도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제 임의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네 할아비가 그 아이를 만나서 설득할 거다.]
[…….]
어이가 없는 최민혁은 크게 당황했다. 이런 식의 전개는 상상도 못 했다. 그가 아는 최용욱 회장은 절대로 며느리에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당장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했다.
“당장 어머니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세요.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요.”
“네? 아,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도 전화 통화로 중매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한국 남자라면 오히려 열광할 일에도 인상을 잔뜩 구긴 최민혁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안 회장 막내라면, 미모로도 유명한 것으로 알아. 그런데도 저렇게 반발하다니, 정말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건가?’
* * *
한강 둔치 한 곳에서는 한창 영화 촬영 때문에 스텝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영화 ‘하이에나’에 임하는 심진모 감독은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자살 시도를 한 김승연의 심상이 자신이 그린 영화 주제와 흔들리지 않도록 화면을 세세히 살피면서 계속 몰아붙였다.
그 정도가 심해서인지 김승연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좋지가 않았다. 여린 성격 탓에 강간 장면을 찍으면서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심진모 감독 그 자신이 원한 방향이라서 적당히 다독거려 주었다. 지금까지 영화 전개는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는 김승연 어머니 역을 맡은 정미선이 김승연을 다독거려 주는 모습을 보면서 슬쩍 물러났다. 정미선 덕분에 촬영은 생각보다는 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최재현은 계속 김승연을 쳐다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강간 신을 찍으면서도 노골적인 감정을 담았다.
김승연의 흔들리는 모습에 오히려 음흉하게 히죽 웃었다.
실상 강간 장면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표정 연기가 오히려 정신적인 고통을 더 주었다.
김승연이 계속 최재현을 배척하는 이유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심진모 감독은 자신이 원한 분위기라서 오히려 이런 분위기를 내버려 뒀다. 그는 김승연보다 오히려 정미선을 힐끗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보다는 나이가 10살 많지만, 오히려 그의 취향에 맞았다.
그건 최재현도 다르지 않았다. 그도 김승연 못지않게 정미선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결국 최재현이 참지 못한 채 슬쩍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미선 선배님 연기가 대단합니다.”
정미선은 최재현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고마워요.”
그는 슬쩍 정미선의 연기에 대한 것을 늘어놓으면서 접근했다. 이미 이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던 터라 이번이 최적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김승연은 냉랭한 눈으로 최재현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지금 쉬는 시간이란 것을 잊었어요?”
“현정 씨와 관계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40대 초반의 고혹적인 정미선은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묘하게 남자를 끄는 그녀의 외모였다.
김승연도 비슷한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완숙미는 차이가 난다.
정미선 입장에서는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난 이미 한 번 결혼까지 한 사람이에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 마음이죠.”
어이가 없는 상황에 정미선은 황당한 눈으로 최재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힐끗 주변 스텝을 쳐다보았지만 다들 시선을 피했다.
심진모 감독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은 김승연하고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자꾸 김승연을 감싸고도니, 그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재현이나 심진모 감독은 물리적으로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심리적으로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걸 알아도 굳이 나서지 않은 것은 심진모 감독이 실력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 흐름을 수채화 식으로 표현하는 그의 기법은 그녀도 탄복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 영화에 상처 입은 여성의 감수성을 입히려 한다는 점이다.
정미선은 지금까지 참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결국 아들 최민혁이 보낸 경호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차량 행렬이 촬영장 바로 앞에까지 쭉 이어진 것이다.
“……?”
그녀뿐만 아니라 최재현, 심진모 감독도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차량은 뜻밖에도 밥차였다.
그 차량 행렬 가장 뒤쪽에서는 근사한 정장을 입은 노인과 그 수행원이 우르르 내렸다.
정미선은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노인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깨달았다.
“아, 아버님?”
“허허, 며늘아가, 오랜만이구나.”
“아, 아버님이 어떻게…….”
“쯧, 설마 넌 내가 누구인지 모르냐, 널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을 보고도 아는 척도 안 하는구나. 하긴 내가 이제까지 잘못한 것이 참 많지.”
“아, 아닙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녀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떨렸다.
이미 이곳을 찾기 전에 정미선 담당 의사를 찾았던 최용욱 회장을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촬영장 스텝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지난 일에 대해서 사과하러 왔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과거 일에 대해서 내가 다시 한번 사과하마.”
꾸벅 고개를 숙이는 최용욱 회장 모습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대나무보다 더 완고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 바로 최용욱 회장이기 때문이었다.
“……!”
정미선을 입을 딱 벌린 채 최용욱 회장 행동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최용욱 회장이 한 행동은 저기 최재현 배우가 보여준 것보다 더 지독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지난 일에 대한 앙금 일부가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회한의 눈물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내리자 결국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최용욱 회장 때문에 누구도 뛰어들지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정미선의 눈물을 보는 순간에 자신에 대한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치의 말이 틀리지 않군.’
정미선의 정신 질환의 근원은 그 누구도 아닌 최용욱 회장과 그 일가였다. 그중에 주축을 이루는 최용욱 회장이 따스한 모습을 보이자 자연스럽게 정미선에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덕분에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심진모 감독과 촬영 스텝은 다들 눈치를 봤다. 그들은 패닉에 질린 채 허겁지겁 최용욱 회장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숙였다.
“뵈,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당신이 이번 영화감독인 심진모인가?”
“그, 그렇습니다.”
“이번 영화가 데뷔작이라면서?”
“맞습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심진모 감독을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내 나이 정도 되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아네. 하지만 저 아이는 내 며느리일세. 그러니 신경을 좀 써주게.”
“다, 당연합니다.”
“만약 엉뚱한 수작을 부리면 영화 바닥에서 버티기 어려울 거야.”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지.”
묘한 말을 남긴 최용욱 회장은 눈치껏 더 끼어들지 않았다. 그 역시 정미선 입장이 아주 애매하다는 것을 보고서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처럼 연기 일에 매진하는 것이 오히려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했지?’
옆에서 패닉에 질려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최재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힐끗 정미선 눈치를 보면서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벌벌 떠는 그 모습에 정미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최용욱 회장이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