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99화 (299/1,021)

#299.

김현탁 사장은 힐끗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특정금전신탁이란 문제가 터지자 편법을 동원하기는커녕 정면 대응 했다. 수백 억 손해를 보면서 계약 해지를 원하는 고객 손을 들어주었다.

그 덕분에 이번 일도 어느 정도 수습 국면에 접어든 것이었다.

그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자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 같았다.

‘젠장맞을.’

* * *

“흠.”

김상구 회장은 김희찬 부사장이 내놓은 보고서를 한 동안 묵묵히 읽었다. 그는 김희찬 부사장처럼 분노하지 않았다.

그보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동기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정말 최민혁 실장, 이놈이 이번 사건의 배후가 맞느냐?”

“그건 보고서에 적힌 것처럼 확실치 않습니다. 한정 로펌의 남수현 변호사를 만나봤는데, 그 역시 이번 일은 그저 고객 의뢰를 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 역시 남수현 변호사가 동부지검장일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능력도 있고, 적당히 때가 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남 변호사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해?”

“네.”

“하, 개가 웃겠네.”

전 동부지검장 출신으로 전관 변호사인 남수현은 검사 시절에도 딱히 청렴한 검사는 아니었다. 적당히 알아서 챙기는 타입이었다.

지금도 전관 변호사로 있으면서 주로 권력자 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이번 일에는 사회적인 약자 편에 섰다.

이미 남수현 변호사를 다시 몇 차례 만난 김희찬 부사장은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민혁 실장을 믿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예 최민혁 실장 쪽에 도박을 건 것 같습니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안현수 변호사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김상구 회장도 이 말엔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서와 김희찬 부사장 보고를 들으면서 묵묵히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한 곳을 떠올렸다.

“안현수가 벨린 투자로 자리를 옮겼군. 가만 벨린 투자라……. 거긴 이미 최 회장이 정리하기로 한 것으로 아는데?”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 실권을 잡으면서 다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 KM 전자 투자를 비롯해서 다양한 종목에 투자했는데, 투자 성과 자체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

김상구 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벨린 투자 재무제표를 살폈다.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주식을 빼고, 늘어난 현금 자산만 무려 2,700억이 넘었다.

최민혁 지시를 받아서 진행한 코스피 상승장과 하락장을 나누어서 한 도박과 같은 초창기 투자와는 달리 무리한 투자를 배제한 채 꾸준하게 나아간 결과다.

“그렇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상황을 분석해 봤는데, 구체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번 일로 보복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정확히는 DL 그룹과 KM 전자가 겹치는 사업 구조가 없었다. DL 전자만 해도 TV, 오디오 쪽 사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민혁이 이제까지 DL 그룹을 쉽게 건드리지 못한 이유와도 같았다.

DL 그룹 역시 견제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는데, 최문경 부회장처럼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견제하기도 쉽지 않았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설 때문에 오성 전자는 한 걸음 물러나겠군요.”

“현탁이 말로는 권태성 실장과 최민혁 실장 사이가 원래 안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콜린스 매걱설 이후부터는 급격히 지난 일을 정리하는 수순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민혁, 이놈이 이런 일을 혼자 벌였다고 할 수는 없어. 겁을 상실하지 않고서야 정부를 이용하지 않을 거야.”

“그 배후에는 최용욱 회장이 이지 않을까 추론하고 있습니다. 최훈열 전무 소송 과정에서 KM 전자 부실이 다 드러났고, 그 일에 우리 DL 그룹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이상했지.”

그런데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당시 KM 그룹은 내부 혼란을 정리한다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DL 그룹과 칼부림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덩치가 되지 않으니, 최용욱 회장도 그냥 참은 것이다.

김상구 회장은 그 내막을 잘 몰랐다. 차라리 그때 일에 앙심을 품고 차근차근 보복했다고 판단하는 게 마음 편했다. 그러면 이 상황이 다 설명이 된다.

“그때 이후로 딱히 나에게 내색하지 않았는데, 최 회장을 가볍게 볼 수만은 없겠어.”

“아무래도 이 땅 위에서 반도체와 TV를 시작한 거인이니까요.”

“그렇지.”

김상구 회장은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하자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김희찬 부사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비록 날벼락을 맞기는 했지만 그 이후 일 처리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손실이 난 것이야 앞으로 얼마든지 메꾸면 간단했기 때문이다.

“손실이 좀 큰 것은 아쉽다지만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서서 고객에게 정면으로 대응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일 이후로 계약 해지가 대폭 늘기는 했지만 오히려 고객이 조금씩 더 늘고 있어.”

“다른 대기업도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는 모질게 대한 자신의 행동에 단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던 장남 태도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이번 일은 잘했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최 회장이 이번 일에 관련되었다면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알거라. 다만 현탁이나 용만에게 쓸데없이 이 일에 나서지 말라고 해. 괜히 문제를 만들면 그놈들의 지분을 다 압수할 거다.”

“…알겠습니다.”

김희찬 부사장은 드러내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정말 갑툭튀로 나온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 이놈에 대해서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어.’

* * *

요즘 KM 그룹 구조조정 때문에 치매가 왔다는 악평을 들은 최용욱 회장은 의외로 외부에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언론이 뭐라고 떠들어도 무시했다.

그는 오히려 지금만 같았으면 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입금에 미쳐 있던 장남 최문경 부회장이 정신을 차렸고, 요즘 몸을 사렸다. 더욱이 최근 정신을 차려서 필리핀 일도 잘 끝냈다.

필리핀 정부와 화해를 넘어서서 KM 건설에도 사업권을 던졌다.

심지어 단기 아니라 5년 장기 조건으로 투자를 받아서 수익성이 탄탄한 반도체 증설 작업을 순조롭게 처리한 것에 점수를 주었다.

이런 최문경 모습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좋아.’

최용욱 회장이 특히 만족한 것은 바로 최민혁 실장의 행보다. 화끈한 사이다 경영을 선보이면서 KM 그룹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장남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KM 전자는 딱 지금의 구도가 가장 좋았다.

젊은 피와 관록자의 피가 서로 경쟁 구도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동영 상무다. 너무 안정 지향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그 덕분에 KM 그룹 내에서도 존재감을 떨치지 못했다.

‘한편으로 본다면 민혁이 그놈이랑 부딪치지는 않았기에 나쁘지는 않아. 이건 이것대로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봐야 하니까.’

최동영 상무는 나름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승부사 타입이었다.

KM 그룹의 경영 성과 보고서를 살피던 최용욱 회장은 조용히 자신 앞에 선 장승일 실장에게 입을 열었다.

“큰놈은 요즘 어때?”

“지오텍 관련 마무리 일을 직접 처리하고 있습니다.”

“민혁이가 다 한 거잖아.”

“그래도 자신이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놀라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 입장에서 최민혁 일 처리는 정말 마늘 하늘에 내린 날벼락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던 일이 최민혁이 손을 쓴 후에 불과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깔끔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때문에 최민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성정과는 다른 행보였다.

“그래? 놀랍네.”

장승일 실장 역시 필리핀에서 돌아온 최문경 부회장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이전처럼 쉽게 흥분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이기는 한데…….’

최용욱 회장은 물론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보다 김상구 회장의 갑작스러운 미팅 요청이 더 궁금했다.

“김 회장은 왜 갑자기 정색한 목소리로 날 보자고 한 건가?”

“그게 좀…….”

“설마 민혁이 일이야?”

“…맞습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서 제가 말을 꺼내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평소와는 달리 살기마저 가득한 김상구 회장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설마 내막도 잘 모르는 자리에서 김 회장에게 뒤통수 맞으란 소리야?”

“아, 아닙니다.”

장승일 실장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최민혁 실장, 김재열, 김현탁 사장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기조실에서 확인한 정보로만 보면…….”

대다수는 김희찬 부사장이 알고 있는 정보와 비교하면 반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증거는 없었다. 그저 연결 고리만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럴싸했다.

최용욱 회장도 대기업 회장이 모이는 자리에서 늘 나오는 특정금전신탁 편법 이슈를 모를 수가 없었다. 화재나 보험 쪽의 계열사라면 다들 알게 모르게 사용한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하나 확인을 해가다가 뒤늦게 특이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연기 연습생인 송도연은 뭔가? 설마 민혁이는 연예 기획사라도 차릴 생각인 건가?”

“그게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보컬 트레이너를 비롯해서 꼭 필수적인 인원을 채용하는 것을 봐서는 관련은 있습니다.”

“이상하군. 돈도 많은 민혁이라면 그냥 기획사 인수하면 간단히……. 아, 다른 놈을 의식하는 건가. 하긴 한 명 정도라면 문제될 것은 없겠군.”

딱 송도연 한 사람만 관리한다.

아무리 언론사에서 이 일을 안다고 해도 고작 연습생 한 사람에게 신경 쓸 리는 없었다. 일테면 KM 전자가 연예 기획사를 설립한다는 빌미를 걸고넘어질 일은 아니었다.

장승일 실장은 다행히 남의 일이 아니라서 최근 송도연 무대 소동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송도연의 노래 실력은 제법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무대에서 힙합 곡을 불렀는데, 알고 보니 저작권 등록까지 마친 곡입니다.”

또 갑툭튀로 나온 노래에 최용욱 회장은 혀를 내둘렀다.

“힙합 곡?”

“네. 영어로 된 노래라서 한국 내수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영어 노래를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고는 거야. 설마 미국에 앨범을 내서 대박이라도 터뜨리겠다는 거야?”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다. 지금 최민혁이 하는 일은 앞과 뒤가 없었다. 설마 MP3에 탑재할까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노래가 좋다고 해서 고작 그 노래 한 곡으로 홍보 효과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이미 이런 귀신 놀음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민혁이, 그놈은 도대체 무슨 의도가 있는 거야?”

“…아직 확인 중입니다.”

장승일 실장이 김희찬 부사장과 다른 점이라면 안현수 변호사를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물론 애매한 답변만 듣고 말았다.

“그래서 안 팀장이 이번 일의 배후란 소리야? 아니면 아니란 소리야?”

“애매한 답만 했습니다. 한정 로펌의 남수현 변호사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흠.”

최용욱 회장은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역시 김재열 구속 사건과 최근 하루도 끊이지 않고 나오는 특정금전신탁 편법 이야기를 알았다.

간혹 경제 단체장 모임에 가면 나오는 이야기가 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DL 화재 때문에 웬만한 10대 대기업도 다 유탄을 맞아서 다들 김상구 회장을 마구잡이로 씹었다. 그 역시 넌지시 같이 합류해서 김상구 회장 욕만 했다.

유예 기간이 있다고 해도 고객의 부정적인 인식 자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새로운 고객은 아예 색안경을 끼고 쳐다본다.

그러니 실적 자체가 작년에 비해서 무려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실적이 회복하기야 하겠지만 다른 기업 입장에서 정말 황당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일에도 한정 로펌이 아닌, 최민혁이 연루되어 있다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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