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다른 한국 10대 대기업처럼 DL 그룹도 계열사를 이용해서 막대한 비계열 상장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대기업은 자기 돈으로 이들 비계열 상장 기업 주식을 가졌다. 그들이 편법을 썼다고 해도 자기 자산인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DL 그룹은 위탁자의 자금으로 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이익 대다수는 DL 그룹이 편법으로 갈취했다.
이 연결 고리가 2,000억 계약 해지 때문에 일부 드러났다.
결국 DL 화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동산이나 건물까지 팔아서 이를 메꿔야 했다.
단순히 2,000억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은행 대출과 같은 형태로 늘어난 9,000억 규모를 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이 사태 해결을 위해선 알토란 같은 건물이나 부동산을 헐값에 팔아넘겨야 한다.
김상구 회장이 분노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찰진 소리와 함께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난 김희찬 부사장은 얼굴을 숙였다. 그의 뺨은 벌써 벌에 쏘인 사람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희찬아.”
김희찬 부사장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김희찬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김희찬 부사장은 지금까지 DL 화재를 잘 이끌어왔다.
김용만 전무와는 격이 다른 경영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DL 그룹을 흔들 정도로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이게 그렇게 말로 끝날 문제냐?”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급한 문제는 다 해결했습니다.”
“빌딩까지 처리해서 말이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괜한 말이 나오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뚝 부러진 대답에 김상구 회장도 혀를 차고 말았다. 그는 장남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문제가 터진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김희찬 부사장이 보여준 행동은 경영의 정석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 과정에서 수백억이 넘는 손실을 봤지만 흔들리는 고객 마음을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김희찬 부사장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회장실 안에 들어와 있는 DL 그룹 경영진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이 건수에 엮였다가 이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특히 김용만 전무는 아예 얼굴을 푹 숙인 채 가슴만 졸였다.
그는 김상구 회장이 큰형 김희찬을 때린 모습을 처음 봤다.
김상구 회장이 그만큼 열 받았다는 의미다.
뒤에 자리한 김현탁 사장은 파랗게 질린 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김재열이 구속 이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은 어어 하는 순간에 DL 그룹을 밑바닥부터 흔들었다. 특히 DL 화재가 휘청이면서 일시적으로 그룹 자금경색이 왔을 정도다.
물론 자금이 풍부한 DL 그룹이 이런 일로 파산하거나 할 일은 없다.
다만 근 10년 이내에 별다른 위기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김상구 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그룹 경영진, 특히 아들과 손자를 살피다가 김용만 전무 앞에서 바로 멈추고 말았다.
아니, 그는 손자 김재열과 관련된 일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재열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김용만 전무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힐끗 주변에 쳐다보았다. 다들 슬쩍 시선을 외면한 채 발을 뺐다.
김희찬 부사장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칼이 있다면 당장 자신의 목을 치고도 남을 정도로 냉혹하기만 했다.
심지어 김현탁 사장은 남인 것처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 새끼가.’
이 일의 발단은 따지고 보면 김현탁 사장이었다. 그가 멍청한 자기 둘째의 말만 들어줘 김재열이 구속되었다.
DL 그룹 이미지가 똥통에 떨어진 상황에서 DL 화재 사건이 터졌다.
안 그래도 여론이 최악으로 흐른 상황이라 도저히 손을 쓰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서 그 일을 들춰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그놈이 투자한 기획사 통해서 비밀리에 모임에 가입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 중앙지검 수사에 끼어서…….”
김상구 회장은 김용만 전무 앞에서 김희찬 부사장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단순히 성 접대 별장에 들어갔는데, 구속되었다는 소리냐? 아니, 그러면 우리 법무 팀은 병신이야. 고작 그런 죄로 그놈을 감옥에 두게?!”
살기가 가득한 김용만 전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바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눈치껏 아버지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별장에 자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걸 빌미로 영업했다고 합니다. 기획사에 아는 지인도 있고,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놈의 자식이!”
김상구 회장은 책상 한쪽에 놓인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날아간 재떨이는 정확히 김용만 전무 이마를 맞추었다.
빡 소리에 피가 나와도 김용만 전무는 이를 악문 채 신음을 삼켰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칫하다가는 골프채로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다.
겉으로 봐서 멀쩡한 신사처럼 보이는 김상구 회장은 분노하면 코뿔소도 울고 갈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걸 날 보고 믿으란 소리냐?!”
“죄, 죄송합니다.”
김상구 회장은 무조건 고개만 숙이는 김용만 전무 표정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마가 찢어져서 흘러내리는 피도 닦지 않았다.
그는 김희찬 부사장 입가에 떠올랐다가 사라진 미소를 보면서 혀를 찼다.
비록 이번 일 때문에 김희찬 부사장도 박살이 났지만, 김용만 전무 꼴은 더 안 좋았다.
성 접대 사건이 기사화되면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DL 그룹이기 때문이다.
한 지라시에서는 DL 그룹이 아니라 성 접대 그룹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김상구 회장은 바로 그 지라시가 난 신문을 김용만 얼굴에 집어 던졌다.
“내 살아생전에 이렇게 창피한 적은 또 처음이다.”
자기 이마에서 떨어진 피가 묻은 지라시.
‘DL 그룹은 성 접대 그룹인가.’란 헤드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김용만 전무는 이마 상처로 말미암은 고통보다는 기사로 말미암은 수치감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김상구 회장은 골치가 아픈지 한동안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축객령을 내렸다.
“삼 일 후에 다시 이 자리에 부르겠다. 그때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다. DL 그룹 승계나 지분에 관심이 없는 걸로 알겠다.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더 말하지 않겠다.”
“…네.”
* * *
“후유.”
손거울을 보면서 퉁퉁 부어오른 뺨에 살피던 김희찬 부사장은 힐끗 자신 앞에 서 있는 김현탁 사장을 쳐다보았다.
김현탁 사장은 마치 신병처럼 차렷 자세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김희찬 부사장은 아예 시선을 외면한 채 얼굴을 땅에 박고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현탁아.”
“죄송합니다.”
김희찬 부사장은 DL 화재 문제에 앞서서 여론을 최악으로 몰고 간 김재열 구속 사건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전개도 문제였지만 거기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 소송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남수현 변호사는 대충할 것처럼 말했지만, 행동은 그렇지가 않았다.
고소장이 너무 정교하게 되어 있어서 DL 법무 팀도 대응책을 마련한다고 고생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유독 중앙지검이 DL 그룹에만 냉정했다.
아무리 김재열이 성 접대 별장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중앙지검의 행동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만약 재열이 이슈만 안 터졌어도 조용히 덮어버릴 수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좋은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게…….”
그런데 김현탁 사장도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성 접대 별장 사건과는 달리 DL 화재 부분은 잘 몰랐다.
하지만 김희찬 부사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설마 박현권 부장을 모른다고 할 생각이냐?”
김현탁 사장도 억울했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몇 년 전에 다 끝난 일이었습니다.”
“박현권 부장 소송 배후에 한정 로펌이 있더구나. 남수현 변호사가 대표 변호사로 있는 법인이다. 전 동부지검장 출신으로 유명한 양반이지. 그런 양반이 박현권 부장을 도와줬다.”
“남수현 변호사는 이상하네요.”
그는 영문을 몰라서 자기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런데 역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김희찬 부사장은 김현탁 사장에게 더 뭐라 그러지 않고 김현탁의 비서 팀에게 받은 파일을 던졌다.
보고서를 살피던 김현탁 사장은 그제야 KM 전자와 연결 고리를 찾았다.
“…과거 KM 전자의 최훈열 전무를 변호했군요.”
“넌 설마 이 일에도 KM 전자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할 생각이냐?”
“분명합니다. 이 일이 그냥 갑자기 일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최민혁, 그 새끼가 저와 김재열에게 보복할 목적으로 벌인 일이 분명합니다!”
김희찬 부사장은 그제야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최 실장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너에게 보복한다는 소리야?”
“그건…….”
김희찬 부사장 목소리도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차가웠다. 김현탁 사장이 아들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매장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설마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입을 다물 생각이냐. 내가 몰라서 지금 너에게 질문한다고 생각해. 아버지 앞에서 그냥 입을 다문 것은 그렇다고 치자, 너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사실은…….”
김현탁 사장은 계속 망설였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차마 김재열과 짜고 했던 일을 전부 다 털어놓지 못했다.
김희찬 부사장은 뭔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김현탁을 압박하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 역시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서 사실 일부는 알았다. 다만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남수현 변호사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면 남수현 변호사가 왜 박현권 부장을 변호했는지 알 수가 없군. 그 양반이라면 대기업 쪽 편을 들었을 텐데…….”
김현탁 사장은 고개를 숙인 채 파일을 확인하다가 뒤늦게 보고서 한 항목에서 남수현 변호사가 안현수 팀장 고향 10년 후배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겁니다. 안현수 팀장은 KM 전자 법무 팀에 있었습니다!”
김희찬 부사장은 그제야 비서 팀에 전화해서 안현수 변호사에 대한 보고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비서팀도 안현수 팀장에 대한 자세한 것을 당장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 후 행적에 대한 자료를 쉽게 찾았다.
“얼마 전에 안현수 변호사가 벨린 투자 법무 팀으로 자리를 옮겼군.”
“벨린 투자라면…….”
김희찬 부사장도 그제야 탄식했다. 설마 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실소유주로 있는 투자회사다.”
“……!”
김현탁 사장은 김재열 사건 무마에 정신이 없어서 미처 간과했다. 설마설마했지만 뒤늦게야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최민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최민혁 실장 그 새끼가 이 일을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지금 봐서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벨린 투자 법무 팀이 한정 로펌을 내세워서 한 일로 보이니까. 아마 물어보면 모른다고 할 거다.”
“씨발, 아, 죄송합니다.”
김희찬 부사장은 여전히 김현탁 사장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내심 속은 미칠 것만 같았지만 일단 진실을 알고 싶어서 참았다.
“정말 몰랐던 거냐?”
“지, 진짜입니다.”
그는 어느 정도 대화의 문을 텄다고 생각하자 다시 설득했다. 아니, 은근슬쩍 압박했다.
“좋다. 그러면 재열 일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알아듣게 자초지종을 말해봐. 이번이 너에게 마지막 기회다.”
“그게 아무래도…….”
김현탁 사장은 최민혁에 대한 분노를 삼킨 채 아버지 눈치를 보다가 김재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거짓말했다가는 정말 끝장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다 듣고 난 김희찬 부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가 막혔다. 이 일도 알고 보면, 두 놈이 최민혁을 공격한 것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