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96화 (296/1,021)

#296.

남수현 변호사는 로펌에 돌아와서 다른 변호사를 불러 모아 이 안건을 상의했다.

그런데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본격적으로 거운 해운을 인수한 HJ 중공업을 조사 중입니다. 이와 엮어서 하농 인수 부분은 기업결합 신고서를 제출만 하면 불공정 행위를 검토한다고 합니다.”

“공정위에 있는 제 친구 말로는 그냥 단순 조사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필요하다면 특별 세무조사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한정 로펌 자체가 검찰과 판사 출신 변호사로 이루어진 터라 제법 정보를 많이 알았다. 나온 이야기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었다.

남수현 변호사는 혀를 찼다.

“자네들도 이번 일이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군.”

“단순히 나온 송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김상구 회장이 선을 넘은 것은 분명합니다. 아니, 이미 관행적으로 진행되던 일인데, 이번에 제대로 들통이 난 거죠.”

‘안현수 변호사’와 ‘KM 전자’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다들 쉬쉬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 의뢰를 포기하지 말자는 건가?”

“이기는 쪽에 붙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에게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시간이 갈수록 최민혁 실장의 명성은 점점 커져만 갔다.

특히 콜린스 매각설과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지만,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KM 전자의 덩치를 봤을 때는 당장 콜린스에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

차라리 이 사업에 맞는 오성 전자에 비싼 가격에 넘기는 것이 두 회사를 위해서도,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좋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KM 전자는 천문학적인 매각 대금을 얻고, 오성 전자는 자사 영업망으로 전 세계에 판매해서 천문학적인 매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오성 전자 권태성 실장이 언론을 조장한 이야기로 시작된 지라시지만 이 설에 손을 들어주는 젊은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이 바보가 아니니, 다른 대안도 있을 거라 예상했다.

콜린스 매각설이 실현될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소문만으로 최민혁 실장은 늘 직장인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니 한정 로펌의 젊은 변호사는 최민혁 실장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남수현 변호사는 혀를 내둘렀다. 그도 최민혁 실장의 악명을 잘 아는 이들의 태도에 웃고 말았다. 중앙 지검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서에게서 김희찬 부사장이 찾아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자네들 의견은 알겠네.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 * *

김희찬 부사장은 수행원 세 사람과 같이 남수현 변호사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상대를 압박했다. 비서조차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남수현 변호사가 나타나자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이런 압박감에 익숙한 남수현 변호사조차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김희찬 부사장이 직접 자기 사무실을 찾아올지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것도 화가 엄청난 채로 말이다.

그는 가벼운 인사로 일단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김희찬 부사장의 태도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누굽니까?”

“네?”

“설마 변호사님이 김소연 씨 의뢰를 순순히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제가 말씀드렸지만…….”

“저 바보로 압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한정 로펌 분위기는 결론이 났다. 그들 역시 최민혁 실장 쪽을 선택했다.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믿을 수가 있으니까.’

DL 화재는 어떨까. DL 화재가 돈이 많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당장 김소연만 봐도 DL 화재는 믿기 힘든 회사였다.

최민혁 실장은 KM 전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성과는 단순히 개인을 뛰어넘어서 KM 전자 구조 자체를 바꾸었다.

부실한 사업부를 다 도려내고, 핵심 사업부만 남겨놓았다.

그다음에 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전형적인 한국 대기업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힘과 능력을 겸비한 실력자였다. 이에 비해서 당장 눈앞에 있는 김희찬 부사장만 해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남수현 변호사는 김희찬 부사장을 앞에 두자 자신이 지금까지 왜 오락가락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결국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확실히 최 실장은 모든 면에서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이야. 동료가 된다면 같이 성장할 수도 있어. 그런데 DL 화재는 이야기가 다르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버릴 사람들이니까.’

“후유, 김 부사장님, 저는 정말 모르는 사실입니다. 우리 로펌에도 사회적인 기여도 측면에서 서민을 도와주는 의뢰를 종종 받습니다. 이 일도 그 연장선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면 일이 커졌으니, 이 정도에서 멈출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건…….”

“의뢰를 포기해 주면, 우리 DL 화재는 한정 로펌에 우리 소송 건 중에 50%를 다 맡기겠습니다.”

50% 의뢰라면 절대 작지 않았다. 아니, 막대한 의뢰 건수였다.

하지만 남수현 변호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DL 그룹은 내무 법무 팀도 있고, 이미 한국 4대 로펌으로 유명한 다른 로펌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바꾸면 됩니다.”

“글쎄요. 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마 우리 DL 그룹과 싸우겠다는 의미입니까?”

“…….”

남수현 변호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막상 말을 하다 보니, 김희찬 부사장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따가운 눈총을 받자 슬쩍 말을 돌렸다.

“…무, 물론 의뢰인과 협상이 잘 끝난다면 굳이 더 나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

입을 다문 남수현 변호사.

김희찬 부사장은 몇 번이나 남수현 변호사를 압박해도 통하지 않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남수현 변호사를 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남수현 변호사는 김희찬 부사장이 사라지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는 이게 과연 최선인지 스스로 반문했다.

최훈열 전무의 재판 동안 당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최민혁 실장이 DL 그룹에게 밀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숨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데,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잘 모르겠군. 한동안 우리 로펌도 힘들겠어. 자칫하면 나도 표적이 될지 모르니. 일단 안 팀장에게 이야기라도 해둬야겠어.’

* * *

최민혁도 안현수 팀장을 통해서 김희찬 부사장이 남수현 변호사를 압박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상황 자체가 꽤 만족스러웠다.

물론 안현수 변호사는 약간 걱정 어린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남수현 변호사가 실력도 있고, 경력이 쟁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난 재판 때문에 앙금이 있는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설마 변호사가 자기 사익을 위해서 고객의 뒤통수를 치겠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안현수 팀장은 복잡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최민혁도 좋아서 남수현 변호사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남수현 변호사는 전관 변호사로 꽤 유명한 이였다.

실제로 실력도 제법 괜찮아서 명성을 떨친다. 한정 로펌은 덕분에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서 4대 로펌과 경쟁할 정도로 커졌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다른 로펌과는 달리 남수현 변호사는 그 어떤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특히 의뢰를 받은 고객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서민을 상대로 할 때는 그야말로 치가 떨릴 변호사였지. 대기업 간의 소송 건에 대해서도 중재를 잘해줬고, 필요하다면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서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기도 했어.’

최훈열 전무 소송이 그 좋은 예였다.

최민혁이 아는 변호사 중에는 이런 변호사는 손으로 꼽았다.

그가 비록 최훈열 전무 재판 때문에 트러블이 있었지만 남수현 변호사를 선택한 이유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이번 소송도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남 선배 실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생활에서 영원한 적은 없습니다.”

“실장님 의견이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빌런에게 일을 맡기면 오히려 상황이 사이다처럼 풀리지 않겠습니까. 아마 다른 대형 로펌에 이 일을 의뢰해도 이처럼 순조롭지는 않을 겁니다.”

안현순 팀장은 ‘빌런’ 이야기는 슬쩍 넘겼다.

“다른 변호사는 DL 그룹 압박에 넘어간다는 말씀입니까?”

“네.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아니면 중재를 명분으로 정보를 넘기든지 하겠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정황은 없지 않습니까?”

안현수 변호사는 의외의 최민혁 실장 말에 혀를 내둘렀다. 소송은 의외로 불협화음 없이 잘 풀렸다. 최민혁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긴 남수현 변호사가 제 고향 선배라서가 아니라 믿을 만한 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 보세요. 안 팀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정작 그분을 못 믿습니까?”

“…그래도 설마 반대편에 섰던 변호사에게 의뢰를 맡길 줄은 몰랐습니다.”

김명준 과장조차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최민혁의 이번 일 처리에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인생 1회차를 경험한 그라고 해서 남수현 변호사를 선택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인재풀이 그렇게 넓지 않기 때문이다.

“자, 일단 우리는 불구경이나 하죠. 남수현 변호사에게 언론을 이용해서라도 공정위나 정부를 계속 자극하라고 하세요. 요즘 공정위 반응 봐서는 절대로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 * *

특정금전신탁을 이용해서 특정 기업 경영권을 빼앗은 행위는 정부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여론이 나빠지자 즉시 관련 조직을 동원해서 공청회까지 열었다.

[당장 특정금전신탁을 중지해!]

모인 시민의 반응은 맹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객 돈을 이용해서 사익을 속여 뺏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도 이 편법을 전면 허락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했다.

1년 미만의 신탁 상품은 아예 대대적으로 손을 보기로 했다.

실상 이 편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탁 계정 자체로 돈이 몰리는 것이다. 이 돈이 심지어 시중 금리를 상승시켰다.

그러니 아예 확정 금리로 못을 박았다.

DL 화재는 이 방법을 이용해서 재미를 보다가 된서리를 맞았으니, 억울하지는 않았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다른 보험 업체다. 그들은 DL 화재로 시작된 특정금전신탁 사태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말았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정부 채널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협상에 들어갔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최소한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DL 화재 때문에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론이 너무 나빠졌습니다.]

[아니, 저희 말은 특정금전신탁을 유지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리할 시간을 달라는 겁니다. 당장에 손해를 보고 계약을 정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부도 이전과는 달리 이 제안을 들어주기 힘들었다.

하농 인수에 대한 것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 문제였다.

그 당사자가 DL 화재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DL 스카이의 김재열이 성 접대, 마약, 조직 폭력배를 이용한 폭력 행위 등으로 구속된 것이 문제였다.

DL 그룹은 고객 돈을 이용해서 조직 폭력배를 고용해서 인신매매까지 한 집단으로 비난받은 것이었다.

그러니 정부도 이 문제만큼은 그 어떤 협상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부 공무원도 바보는 아니었다. 비록 전면 불허라는 극약 처방을 했지만, 암묵적인 유예 기간을 둔 것이다.

다만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DL 화재다.

이 회사만큼은 해당 사안이 없었다.

1,500억 계약 해지 건에 이어서 추가로 500억이 늘어났다. 무려 2,000억 물량의 계약이 일시적으로 해지된 것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2,000억 계약 해지가 DL 화재에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내막을 잘 들여다보면, 생각보다도 더 큰 타격을 줬다.

이 2,000억이 단순히 그냥 2,000억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