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소송이 진행되면 그때마다 이슈가 터져서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겁니다. 김현탁 사장이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안현수 변호사님에게 잘 좀 전해주세요. 중요한 것은 소송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까짓 것 보상은 우리가 해주면 그만이에요. 이보다는 DL 그룹 자금줄을 막아버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자금의 흐름을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DL 그룹 성장에 제동을 걸 수가 있어요.”
DL 그룹은 IMF를 거치기 이전부터 덩치를 키워갔다. 특히 중공업을 비롯한 제조업 쪽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
그 사업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반도체다.
사전 정지 작업의 목적으로 KM 산업을 노린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KM 산업은 반도체 패키지 분야에서는 이미 국제 경쟁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비메모리 쪽으로 그 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민혁이 생각하는 DL 그룹 공략의 첫걸음은 DL 그룹의 덩치를 줄이는 것이었다.
“…네.”
“아, 그리고 괜히 말 나오지 않도록 한 부분은 알아서 잘하셨겠죠?”
“남수현 변호사가 대표인 한정 로펌 쪽에 의뢰를 해놨습니다. 의뢰인은 KM 전자와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그러니 설사 그 정보가 들통났다고 해도 변명할 구실 정도는 마련해 두세요. 우리가 만난 증거는 다 지우세요.”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일도 신경 써서 손을 써두세요. 솔직히 DL 그룹 쪽에서 알아도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아무리 증거가 없다고 해도 송도연까지 빼온 것은 문제가 될 겁니다. 그러니 다시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의 지시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내심 최민혁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DL 그룹이 최훈열 전무를 통해서 한 짓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안 팀장에게 다시 한번 연락을 해봐야겠어.’
* * *
안현수 팀장은 김소연과 박현권 부장을 소송하는 것의 사전 정지 작업은 그 자신이 했다. 이번 일은 꽤 흥미로운 것이라서 나름의 관심을 뒀다.
그런데 그도 최민혁 지시를 받자 아쉬워하면서도 남수현 변호사에게 이 의뢰를 넘겼다.
남수현 변호사는 안현수 팀장의 의뢰에 처음에는 고민했다.
그런데 그도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을 무시하지 못했다.
KM 전자 올해 예상 매출액은 1조 3천억 원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파다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대기업 계열사와 비교하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의 나이를 감안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최훈열 재판에 자신이 반대편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지난 일에 관해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전 동부지검장 출신 남수현 변호사도 호탕한 최민혁 행동에 감탄했다.
‘대단한걸?’
뒤끝이 무섭다고 악명이 자자한 최민혁 행보와는 많이 달랐다.
남수현 변호사는 편한 마음으로 이 의뢰를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소송이 진행되면서 나오는 상황이 그가 예상한 것과는 좀 달랐다.
특정금전신탁이 증인과 증거가 나오면서 드러난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하농 인수는 어떻게 보면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건 좀 문제가 되겠는데.’
중간에 합의도 어느 정도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이 아무리 막 나가도 DL 그룹과 갈 데까지 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 삐져나오는 증거가 문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소연이 내놓은 녹취록이 문제다. 처음과는 달리 추가로 계속 증거를 더 내놓았기 때문이다.
남수현 변호사는 그 변화를 자신을 찾아오는 기자 숫자를 통해서 알았다. 인터뷰해 달라고 몰려드는 기자 수가 계속 늘어났다.
그는 크게 당황해서 안현수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수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는데, 소연 씨가 추가로 증거를 더 발견한 것 같다고 하네요.]
[아니, 그걸 인제 와서 말하면 어떻게 해? 너 지금 내가 DL 그룹 김상구 회장이랑 원수지간이라도 되라는 소리야?!]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야!]
남수현 변호사는 뒤늦게 안현수 변호사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안현수 변호사 말처럼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 이번 소송에 대한 것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DL 그룹 김희찬 부사장에게 걸려온 전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 변호사님, 오랜만에 전화드립니다.]
[아, 네.]
[오늘 시간이 있으면 잠깐 봤으면 합니다.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혹시 금전신탁문제 관련 소송 문제 때문입니까?]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김소연과 안현수 변호사를 다시 만나서 플랜B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그렇지 않고 김희찬 부사장을 만나봐야 의미가 없었다.
[오늘은 좀 곤란합니다. 제가 다시 일정을 확인해서 전화드리겠습니다.]
[남 변호사님.]
차갑고 묵직한 목소리는 전화 통화임에도 의미를 전달했다.
남수현 변호사도 크게 당황했다. 그 역시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안현수 변호사에게 의뢰를 받을 때만 해도 DL 화재에 충격을 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랑 한번 해보겠다는 뜻입니까?]
[후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이번 의뢰를 받을 때까지는 이렇게 흘러갈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의뢰인이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하아, 저도 정말 몰랐습니다. DL 화재가 낀 소송이라서 적당히 중간에 타협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적당한 보상금만 받으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될 테니까요.]
[그러면 상황을 왜 이 지경으로 만든 겁니까? 지금 아주 작정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던데?]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사실입니다. 소연 씨가 언론사에 저 몰래…….]
[그게 법정 대리인으로 할 이야기입니까?!]
[전 정말 DL 그룹과 척을 질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 초년생이 아닌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설득이 효과가 있었다. 김희찬 부사장도 잠깐 침묵하다가 결국 넌지시 이야기했다.
[좋습니다. 제가 이틀 후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남수현 변호사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 후배인 안현수의 제안을 받을 때만 해도 최민혁 실장과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환호했다.
아니, 최민혁과 최훈열 전무 소송에서 생긴 악감정만 정리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DL 그룹과의 협상을 중재한다면 그것만으로 자신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 봤다.
그런데 김상구 회장과 척을 질 상황이 되었으니.
그는 안현수 팀장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변호사님, 안현수 변호사님의 전화입니다.]
[바로 연결해 봐.]
* *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뷰가 좋은 레스토랑은 가격 때문인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남수현 변호사는 안심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으면서 툴툴거렸다.
“이번 의뢰 말인데, 자네는 이미 내막을 알고 있었나?”
“저도 잘 몰랐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에게서 자료를 나누어서 받았을 뿐입니다. 그때마다 자료를 넘긴 것에 불과합니다. 의뢰인인 김소연이 중간에 자기 마음대로 할지는 몰랐습니다.”
안현수 팀장은 딱히 거짓도, 진실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건 정보만 조각내서 대략 입을 열었다.
“이번 의뢰 때문에 내 처지가 곤란해졌어.”
툴툴거리는 남수현 변호사.
안현수 팀장은 고향 선배인 남수현 변호사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최민혁 지시에 따라서 남수현 변호사에게 이번 일을 넘겼다. 그런데 자신과는 달리 전관 변호사인 남수현이 대기업과 척을 질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지금 이 만남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 실장님은 왜 굳이 남수현 선배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일까?’
그 역시 나름 법조계에 인맥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남수현 선배가 전관 변호사이기에 유리한 점이 있었다. 문제는 남수현 변호사가 서민 편에 선 사람이 아니란 점이다.
“솔직히 저도 최 실장님 지시를 받아서 의뢰를 맡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수현 변호사는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 이름을 듣는 순간에 몸을 움찔 떨었다. 지금의 최민혁은 과거 최훈열 재판 당시 당사자인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
“최 실장님(?)이 말인가?”
안현수 변호사도 달라진 남수현 변호사 모습에 혀를 찼다.
“네. 최 실장님은 남 선배님의 실력을 믿는다면서 이 의뢰를 맡긴 겁니다.”
“나보다 이런 일에 적임자는 많아.”
그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최민혁에게 들은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선배님보다 입이 무겁고, 믿을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더군요. 그건 저도 공감합니다. 지금 이 자리가 그 증거입니다.”
“내가 DL 그룹 쪽에 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배님이 설사 이 의뢰를 중간에 포기할지라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저도 최 실장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하.”
그로서는 안현수 변호사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훈열 전무 재판에서 결국 졌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왜 자신을 찍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비록 최훈열 소송은 졌다고 하지만 만약 최민혁이 온갖 편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재판을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민혁은 그런 점도 높이 평가했다. 그가 걱정한 문제는 지금 당장은 안현수 팀장이 DL 그룹과 대놓고 대립하는 것도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선을 긋기 위해서라도 중간 연결 고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남수현 변호사였다.
내막을 잘 모르는 남수현 변호사는 오늘따라 안심 고기 맛이 없다고 느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당황했다.
앞날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에서 물러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혹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뒀기에 의뢰 맡길 때도 그렇게 서둘렀나?”
“그건 아닙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한 과정에서 최 실장님께서 일을 진행하게 한 겁니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대로 이번 의뢰를 진행하면 난 DL 그룹에 완전히 찍혀. 김상구 회장에 눈 밖에 나면 우리 로펌도 힘들어져.”
“그런 경우라면 최민혁 실장님이 앞으로 선배님 로펌을 밀어줄 겁니다. KM 전자 능력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미 최 실장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선배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줄줄이 나오는 이야기는 지오텍으로 이어졌다. 지오텍 법적 분쟁에서 있었던 일은 내수 전문 로펌으로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시즈벨과 손을 잡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남수현 변호사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청했다. 그도 KM 전자를 둘러싼 이야기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서 유심히 지켜봤다.
“…….”
남수현 변호사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최훈열 전무 재판은 정말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후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봤다. 날이 갈수록 변해가는 KM 전자는 도저히 KM 그룹 계열사로 보이지 않았다.
콜린스 성공 신화에 이은 최민혁의 행보는 눈부시기만 했기 때문이다.
남수현 변호사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안현수 팀장 제안을 도저히 거절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소한 이번 소송은 끝내야 했다. 그 자신은 힘들다고 하던 일을 중간에 내팽개치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마 최 실장이 나의 이런 성격도 사전에 조사한 것일까?’
갈등은 생각보다 길었다.
하지만 그는 불쑥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콜린스 사업부 매각설 말인데, 정말 사업부를 매각하는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가? 알겠네. 하지만 이번 일은 나 혼자 단독적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 우리 로펌 동료 의견도 고려해야 하니까.”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